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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 이스마엘 그리고 이삭(1)

영동장로교회 2019. 10. 6. 12:30



 https://drive.google.com/file/d/1PBdh-wIBwiBfPvvUFKgAVrg2YXN8sP-B/view?usp=sharing

2019. 10. 6.

아브라함, 이스마엘 그리고 이삭(1)

 

창세기에 유독 아브라함이라는 한 사람의 이야기를 거의 열다섯 장에 걸쳐 그렇게 길게 기록하게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아는 대로 단지 그가 믿음의 조상이기 때문일까?

 

아브라함의 일대기를 성경이 언급한 것은 하나님의 우리를 선택하여 불러주시고 당신의 자녀 삼으시며 구원하시려 하심이라는 바로 우리의 그 구원을 증명하여 보여주시고자 함이었다.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신 것은 바로 소명이었다. 하나님의 이 부르심은 모두에게 열려 있다. 이를 일반적 소명, 외소’(外召)라 한다. 이 세상에 성경이라는 것과 하나님이라는 것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있을까? 밀림 속과 같은 오지에 선교사들이 들어가는 것은 바로 이 부르심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그 부르심에 모두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것은 아니다. 오직 창세 전에 택하심을 입은 자만이 그 부르심을 입을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유효적 소명’, 내소’(內召)라 한다. 바로 아브라함이 이 유효적 소명의 은혜를 받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따라서 그는 부르심을 입은 우리를 대표하며 또한 상징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믿음의 조상인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하나님의 그 음성을 듣지 못했다. 그의 아버지는 하나님의 이 유효적 소명을 받지 못한 자였다. 우상이 지배하던 그 당시의 화려한 도시였던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 그를 구원할 자로 정하시고 불러내신 것이다.

(15:7)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로라

 

이제 하나님은 그 부르신 자를 구원에 이르게 하시려고 중생하게 하신다. 이는 죄로 인해 죽어있는 영혼을 하나님이 살리시는 일이다. 성령의 역사로 그에게 새 생명의 씨가 심겨지고(새 생명의 발생), 심령에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새 생명의 출생) 자라게 된다.

 

자식을 낳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 자신의 다시 태어남이라 볼 수 있다. 자신이 다시 태어나는 것, 중생이라는 의미이다.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허락하시겠다함은 아브라함이 다시 태어남, 즉 거듭남을 의미한다.

주님께서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이를 수 없다 하셨다. 죄인이었던 자, 즉 심령이 죽어있는 자가 하나님의 은혜, 즉 성령의 역사로 거듭나는 이 중생이 없이는 결국 천국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3:3,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아브라함이 살았던 곳, 갈대아 우르는 우상을 섬기는 도시였다. 그 아비 데라도 그 우상을 조각하여 판 자였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그 우상을 섬겼던 자였을지도 모르는 죄인이었다. 그런 그에게 자식을 허락하시겠다는 것은 그를 중생하게 하는 은혜를 허락하신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중생한 자는 그의 주관적 성향이 하나님께로 향하는 변화를 얻게 된다. 주관적 성향의 성화를 이루게 된다. 아브라함이 그랬다. 이전의 습성, 우상과 더불어 사는 삶을 청산하고 전혀 하나님의 뜻을 쫓아가는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화려한 도시, 갈대아 우르가 아니라 황량하고 사람 살기 어려운 그길, 가나안을 향한 그 길을 나아갔다.

 

그러나 자식을 주마하신 하나님의 그 약속이 속히 실현되지 않았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그 약속이 속히 이루어지지 않음으로 스스로 엘리에셀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겠다고 했다.

(15:2)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그 시대는 양자를 들여 자신의 재산을 물려주고 자신의 노후와 장사지내는 일까지 맡겼다 한다. 그런 세상적인 풍습으로 자신의 중생을 이루려고 한 아브라함이었다.

 

중생은 결코 자신의 능력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 분명히 알게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또다시 자신의 노력으로 자신의 중생을 이루려고 시도한다. 바로 이스마엘의 탄생이다.

(16:2)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16:3)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가져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한지 십 년 후이었더라

(16:8) 가로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가로되 나는 나의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16:9)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16:10)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자손으로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16:11)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잉태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16:15) 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람이 하갈의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

(16:16)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이었더라

 

십년을 기다려도 하나님의 응답이 없었다. 사람의 입장에서는 내가 할 만큼 하고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 할 수 있는 기간일지 모른다. 그러나 천년이 하루 같으신 하나님이시다. 그 십년이 결코 하나님에게는 충분한 시간도 아니다. 다만 사람의 기다림일 뿐이었던 것이다.

 

그 기다림을 자신의 공로로 내세우고 하나님께 그것을 담보로 하여 중생을 허락해 달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인간의 욕망일 뿐이다. 중생은 인간의 그 무엇에 대한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주어지는 선물일 뿐이다.

 

이는 백 퍼센트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일 뿐이다. 아브라함의 나이가 일백세가 되고 사라의 나이가 구십세가 된 그 때에 하나님이 이삭을 선물로 주신 것은 참된 거듭남이란 인간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선물로 그 택하신 자에게 주시는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신 일이다.(다음 주에 계속)

(18:11)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 늙었고 사라의 경수는 끊어졌는지라

(21:1)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하셨고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21:2) 사라가 잉태하고 하나님의 말씀하신 기한에 미쳐 늙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21:3) 아브라함이 그 낳은 아들 곧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을 이름하여 이삭이라 하였고

(21:4) 그 아들 이삭이 난지 팔일만에 그가 하나님의 명대로 할례를 행하였더라

(21:5)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낳을 때에 백 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