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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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4. 28.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마 27:46)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막 15:34)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제 구 시쯤이란 예수께서 운명하시기 직전의 순간을 말한다. 크게 소리를 지르셨는데 이 순간은 온 몸에서 기력이 다하여 한 마디도 하기 어려운 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있는 힘을 다해 내 뱉으신 말씀이시다. 그리고 하신 말씀이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느냐’는 것이다. 그것도 다름 아닌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한 그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셨다는 것이다.
왜 예수께서 이같이 행동하셨을까?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다. 이는 죄에 대해 결코 눈감으실 수 있는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것이다. (신 32:4) 그는 반석이시니 그 공덕이 완전하고 그 모든 길이 공평하며 진실무망하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정직하시도다
(느 9:33) 그러나 우리의 당한 모든 일에 주는 공의로우시니 우리는 악을 행하였사오나 주는 진실히 행하셨음이니이다
(욥 8:3) 하나님이 어찌 심판을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욥 34:17) 공의를 미워하는 자시면 어찌 치리하시겠느냐 의롭고 전능하신 자를 네가 정죄하겠느냐
(시 9:8)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단을 행하시리로다
또한 그 하신 말씀을 변개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삼상 15:29)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면서 또한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성품이 그대로 반영된 일이었다. 하나님의 공의의 집행은 아담이 하나님과의 행위언약을 어김에서부터 시작된 일이다.
하나님은 아담으로 하여금 모든 인류의 원수(元首)의 자리에 서게 하셨다. 그로 하여금 인류의 대표자가 되게 하셔서 그와 더불어 약조를 맺으셨다. 하나님이 세우신 그 에덴동산에서 아담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기뻐하실 자의 자리에 이르도록 하시기 위해 그와 하신 약속이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먹지 말라고. 그리고 그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을 것이라고. 이는 행위언약이었다.
(창 2: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그러나 아담은 그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써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하였다. 일방적으로 하나님과의 약속을 깨어버렸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담에게 공의를 집행하셔야만했다. 그 이후로 모든 인류는 이 피할 수 없는 죽음의 노예가 되어버렸다.
(창 3: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시지만 또한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그것을 기뻐하실 수 없으셨다. 사랑의 하나님이시므로 공의는 집행하시되 그들을 살리실 수 있는 방도를 마련하셨다.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이는 하나님의 필연적 행위가 되신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신 것은 죄로 인해 얻게 된 영원한 수치인 그 죽음을 면하게 하실 것에 대하여 드러내어 보이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그대로 드러내어 보이신 것이다. 그 가죽 옷은 곧 주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예표하고 있는 것이다.
(창 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죄인된 우리를 구하시려고 당신의 독생자이신 예수를 속죄의 제물로 내어주실 것을 이미 예정해 두신 것이다. 독생자란 하나뿐인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독생자를 희생의 제물로 내어주신 하나님의 그 심정을 우리가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그 마음을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알게 하셨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번제물로 드린 것은 하나님이 그의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서 희생의 제물 삼으실 것에 대한 온전한 예표이다. 그 순간의 아브라함의 그 마음을 하나님 외에 누가 이해할 수 있으랴!
(창 22: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창 22: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창 22:4)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창 22:5) 이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창 22:6)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창 22:7)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창 22:8)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창 22:9)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창 22: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창 22: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창 22:12)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창 22: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은 우리의 믿음의 조상이다. 이는 믿음 안에서라야 만이 그 심정을 알 수 있게 하신 것이란 의미가 될 수도 있다. 우리가 온전한 믿음의 소유자가 될 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사 당신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그 사랑에 대한 깊은 이해와 넘치는 감사를 드릴 수 있게 될 것이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우리의 죄를 사하시려는 하나님의 공의의 집행이셨다.
하나님은 정작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시는 그 고통을 외면하셨을까?
그러면 그는 사랑의 하나님이 되실 수도 없고 우리를 사랑하사 그 아들을 십자가의 희생물로 내어놓으신 그 사랑도 거짓이 되고 만다. 성부 하나님도 주님이 십자가에서 신음하시는 그 순간에 애를 끊는 고통을 함께 하신 것이다. 정녕 나를 위해 그 모진 아픔을 견디신 것이다!
주님이 운명하시기 직전에 온 몸의 힘을 모아 외치신 것은 성부하나님의 그 공의의 집행이 거짓이 아님에 대한 선언이신 것이다. 그 사랑하는 아들이니 적당히 눈가림 정도로 했으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주님의 이 외치심으로 그런 일은 결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면 그는 공의로우신 지극히 도덕적인 하나님이 되실 수 없을 것이다. 주님이 그렇게 외치신 것은 성부 하나님의 그 공의의 집행이 참으로 진실하다는 것에 대한 선언이었다.
그 공의의 집행이 진실하므로 우리가 정말로 죄로 인한 그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되는 것이 사실이라는 것이다. 믿는 자에게는 더 이상 죽음은 두려운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믿는 자에게 죽음이란 단지 하나의 문과 같은 것이다. 그 문을 지나면 영원한 생명이 있는 새로운 세상이 기다리고 있을 따름이다. 만약 하나님의 이 공의의 집행이 없었다면 죽음의 문을 통과하면 영원한 죽음이 기다리는 곳으로 가게 되었을 것이다. 이는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가게 될 그곳이다.
주님이 마지막 순간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른 것은 성부 하나님이 진실로 자신의 하나님이요, 아버지이심에 대한 고백이다. 두 번이나 부르신 것은 진실로 그러하다는 것에 대한 주님의 고백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십자가 위에서 당하는 고난이 사사로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우리를 살리시려는 공적인 일이라는 것에 대한 증언이셨다.
(마 27:46)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것은 성부 하나님의 그 공의 집행과 우리를 살리실 그 사랑이야말로 참으로 진실하였다는 것에 대한 주님의 확정이셨다.
버리심이 완전하였다는 것은 희생의 제물로 삼으신 것이 참으로 진실되게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 우리를 살리실 그 일이 참으로 완전하시다라는 것에 대한 선언이셨다. 이는 진실로 주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한 그 예언이 참으로 이루어진 것에 대한 선언이셨던 것이다.
(사 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철저히 고난당하시면 당하실수록 우리의 속죄는 완전하여질 수 있었다. 그것은 우리를 대신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에 대한 보상이니 오죽 가혹했을까! 그러므로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더 이상 있을 수 없는 완전한 고난을 당하셨던 것이다. 이제는 참된 믿음의 백성이 되어 나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당하신 주님의 그 고통을 잊지 말고 그 은혜에 대한 의무인 우리의 성화를 이루어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