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장로교회 2018. 11. 21.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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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1. 18.

행함이 없는 믿음은?”

 

하나님이 너를 선택해 부르시고 너에게 구원을 허락하셨으니

너는 오직 하나님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살지라.

 

당연히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로서의 삶,

하나님을 닮았으니 하나님은 선하시므로 너도 선을 행하라.

이는 마땅히 행할 도리이니라.“

 

많은 설교자들이 설교를 통해 성도들에게 선을 행하라고 가르친다.

이와 같은 설교는 오해를 불러올 수 있다.

선을 행하는 것이 자신의 의지로 이루어질 수 있고, 그 결과로 자신이 의로운 자가 되게 된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결국 선을 행하는 것이 자신의 공로가 된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정말 그렇게 하는 것이 바른 믿음의 삶일까?

(14:1)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14:2)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14:3)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3:9)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3:10)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3: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3:12)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만약 선을 행하는 것이 자신의 공로가 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심각한 신앙적 오류에 빠진 것이다. 잘못된 믿음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이다. 내 의지로 구원을 이룰 수 있는가?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이 나의 공로가 된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곧 내 의지로 나의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아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선을 행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인가?

그것은 아니다.

(4:17, 개역)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벧전 3:17, 개역)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요삼 1:11, 개역)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선을 행하여야 하는 이유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고 주님을 통해 구원을 허락받은 것에 대한 당연한 도리로써 선을 행하여야 하는 것이다.

(14:2, 개역)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택하여 자기의 기업의 백성을 삼으셨느니라

(15:16, 개역)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43:1, 개역)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45:4, 개역) 내가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이스라엘을 위하여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게 칭호를 주었노라

(살후 2:14, 개역) 이를 위하여 우리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벧전 5:10, 개역)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그것은 일종의 의무와 같은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선을 행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주님이 베푸신 은혜에 대한 빚 갚음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빚을 갚기 위해 행하는 그 선이 하나님의 주시는 또 다른 선물이 되어 돌아온다. 이 일은 훗날 천국에서 주어지는 상급으로 우리에게 다시 주어진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더 큰 은혜의 빚을 질뿐이다. 결코 우리의 공로일 수가 없다.

 

(2:14, 개역)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2:17, 개역)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2:18, 개역)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2:20, 개역)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2:26, 개역)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믿는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보통은 말하기를 예수 믿으세요라고 한다.

그러나 예수를 믿으라가 아니라 하나님이 너를 택하사 구원을 허락하시려고 너를 부르셨다. 이제 너는 그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하지 말라. 예수를 통해 구원의 길을 준비하셨으니 너는 그를 영접하여 너의 구원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라.”라고 해야 한다.

 

애초에 우리는 우리의 능력으로 예수를 믿을 수 없다. 이는 우리가 범죄했으므로 그런 일에 무능하여졌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으라는 표현에는 우리에게 그런 능력이 있으니 우리의 의지대로 하면 된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제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너의 구원을 이루시려는 주님의 뜻에 순종하라는 것이 바른 소명이 된다. 그 명령에 따라 이를 행하는 모습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는 것이요, 예수를 믿는 일이다.

 

그러므로 믿으라해서 아무나 믿을 수 있는 자리에 설 수 없다. 세례요한이 세례를 베풀 때 누구든지 그에게 나아오는 자에게 세례를 다 베푼 것이 아니다.

(3:7, 개역)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우리가 경계하여야 할 것은 우리의 능력으로 우리가 믿음 안에서 무언가를 한다.’라는 것이다. 실상은 우리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능력 주시니 우리가 무언가를 할 수 있음이니 그 모든 결과는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주님의 주시는 은혜라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우리가 바르게 이해할 때 우리는 비로소 감사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바르게 이해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주님에게 감사할 수 없다.

오히려 섭섭하거나 원망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나는 그렇게 내 능력과 내가 가진 것으로 주님을 위해 노력하였는데, 왜 주님은 내게 은혜를 베풀지 않으시냐!’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님이 내게 능력을 주지 않으셨다면 내가 어떤 결과를 이루어 낼 수 있었을까?

그 어떤 결과를 우리가 이루어내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주님이 하신 것일 뿐이다.

나는 다만 그 일을 이루는 하나님의 한 방편이었을 뿐이며, 그런 일을 이루는데 나를 사용하신 것 자체가 은혜일뿐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직 이런 은혜를 베푸신 주님께 감사할 뿐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