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장로교회 2018. 7. 1. 14:51

2018. 7. 1.

 

네가 어디 있느냐

1. 나를 찾아오신 하나님

 

가출한 자녀를 찾기 위해 온 천지를 헤매고 있는 어미를 본 적이 있는가?

 

부모가 싫어, 아니 어쩌면 그 부모를 미워하고 싫어서 떠난 건지도 모른다. 흔히 하는 표현으로 불효막심한 그 자식이 무엇이기에 그 부모는 애간장을 다 태우면서 그 자식을 찾으러 다니는가? 도대체 그 마음은 어디서 온 것일까?

 

이 마음은 누가 가르쳐주어서 생긴 것이 아니다. 그냥 본능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 본능은 어디서 온 것인가?

 

성경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의 뜻을 고의로 어긴 아담이 하나님을 피해 숲 속으로 숨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3:8)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괘심하고 보기도 싫을 그 아담을 하나님은 직접 찾아 나선 것이다. 전능하시니 무엇이든 원하시는 바대로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원하시기만 하셨다면 아담을 끌어다가 바로 무릎을 꿇게 하실 수도 있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리 아니하시고 굳이 수고 하셔서 찾아가신 것이다. 얼마나 이끼고 사랑하셨으면 그리하셨을까? 하나님은 이 마음을 우리가 알아주기를 원하셔서 부모의 마음에 이 마음을 심어주신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부모의 본능이라 칭한다. 우리를 끔찍이 여기시는 하나님의 이 사랑을 우리는 이해 할 수 있을까? 부모가 되어 그 자식에게 이 같은 일을 행하기 전에는 절대로 이해 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부모가 되고 그 자식이 내 뜻과는 다르게 어긋난 길을 갔을 때 비로소 깨달을 수 있는 이 하나님의 나를 향한 그 사랑하심이여!

 

(3: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의 이 찾아오심은 훗날 주님이 죄인된 나를 살리시려고 찾아오신 주님의 그 찾아오심을 예표하는 사건이었다.

 

1) 죄인 된 나를 하나님이 직접 찾아오심임.

 

하나님은 당신의 선지자들을 통해 끊임없이 말씀하셨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그러하니 너는 너 있는 곳에서 돌이켜 내게로 오라고.

 

이는 장차 오실 주님의 그 오심에 대한 서곡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이스라엘은 도무지 자신의 길에서 돌이키지 않았다. 그들을 위해 찾아온, 하나님이 보내신 그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끝내는 죽이기까지 했다. 하나님이 한 선민,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그들을 통해 보여준 이 역사적인 사건들은 죄인 된 나를 위해 그리하실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신 예표였다.

(25:4, 개역) 여호와께서 그 모든 종 선지자를 너희에게 보내시되 부지런히 보내셨으나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으며 귀를 기울여 들으려고도 아니하였도다

(35:15, 개역) 나도 내 종 모든 선지자를 너희에게 보내고 부지런히 보내며 이르기를 너희는 이제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켜 행위를 고치고 다른 신을 좇아 그를 섬기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나의 너희와 너희 선조에게 준 이 땅에 거하리라 하여도 너희가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며 나를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이 나를 찾아오심이며 나를 부르심인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 어리석어서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그렇게 예수를 조롱하고 비방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드디어 당신의 자녀로 세우셨다. 주님을 영접케 하셨고 당신의 자녀가 되는 귀한 자리에 세우셨다.

지금 우리는 이 은혜를 온전히 깨닫고 이 은혜에 감사하는가?

 

2)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심은 우리의 생각의 변화를 요구하심이다.

 

하나님이 아담을 찾아오신 것은 아담으로 하여금 자신의 선택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으며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얼마나 큰 불행인지를 깨닫게 하셔서 다시는 그와 같은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말아야 되겠다는 그런 회개를 원하셨을 것이다.

 

그래서 그 순간에는 이 모든 것이 온전히 자신의 잘못이며, 자신은 하나님 앞에 큰 죄인임을 고백했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 기회의 순간, 하나님이 그를 살리려고 허락해 주신 그 기회의 순간에도 그는 여전히 자신의 잘못을 고백한 참된 회개자의 자리에 서지 못했다.

(3:11)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3:12)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주님 앞에서 여전히 자신의 의를 드러내려고 하는 우리의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 순간 아담이 그 아내 화와에게 잘못을 돌리지 않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면 하나님이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었을까?

 

하나님은 회개하지 않는 아담을 위해 그를 에덴에서 내어보내셨다.

 

처음 행위언약의 계약대로라면 아담은 바로 죽음으로 나아갔어야할 존재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아담을 사랑하셨으므로 그를 살리시려고 다시 기회를 주신 것이다. 에덴에서 내어보내심이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기쁜 일이었을까? 결코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 아담을 살리시기 위해 그 아픈 가슴을 부여잡으시고 그를 에덴에서 내어보내셨다. 그리고 그 아담이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는 날까지 힘들게 참아내셨을 것이다.

 

그런 아담이 바로 우리들인 것이다.

 

(3: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3: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3: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아담은 땅을 갈면서 깨달았을 것이다.

내가 이 흙에서 지음 받은 참으로 미천한 존재였는데, 하나님의 복 주심의 그 생기의 불어넣으심으로 내가 참으로 존귀한 자가 되어 하나님을 대신해서 다스리는 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어찌하여 교만한 자가 되어 하나님을 배반하였던가!” 그래서 그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사죄를 요청하는 제사를 드렸을 것이다. 이는 그의 자식들이었던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린 것으로 알 수 있다. 아담이 그런 제사를 드리지 않았다면 어떻게 가인과 아벨이 제사 드리는 것을 알 수 있었을까?

(4: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3) 생각이 변화되면 행동이 변화되고 행동이 변화되면 우리의 삶이 변화된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도 아담처럼 그런 깨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다. 그래서 이전의 모든 잘못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따르려고 할 때 내 행동도 변화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주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것은 그들이 의인이기 때문에 부르신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진실로 자신들이 죄인임을 깨닫고 그것을 고백할 수 있었을 때 비로소 그들은 주님의 참된 제자들로 거듭날 수 있었다. 마치 주님이 행하신 것처럼 그렇게 그들도 이적을 행할 수 있었다.

(18:13, 개역)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9:40, 개역)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 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가로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주님이 부활하셔서 베드로에게 찾아와 물으신 이 물으심에 베드로는 깊은 죄의식을 느끼며 자신이 도무지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는 생각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더 이상 자신을 주장하지 못하고 다만 그 모든 것을 주께서 아신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 때서야 비로소 주님은 그에게 사명을 맡기셨다. 그리고 베드로는 주님처럼 그렇게 위대한 사역을 감당했다.

(21:15)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주님이 그 제자들에게 원하셨던 것처럼 지금 우리에게도 그렇게 원하신다. 이것이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인 것이다. 우리가 주님의 그 제자들처럼 그렇게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내가 진실로 죄인이니이다라는 고백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것이 시작점이다.

 

 

2. 찾아오신 하나님을 영접하자.

 

찾아오신 하나님을 아담은 영접하지 못했다. 그가 스스로 하나님 앞에 큰 죄를 지었다는 것을 고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했으므로 그의 삶은 고달픔의 연속이었다. 하나님은 그 사랑하는 자가 그것을 깨달을 때까지 그 고달픔을 거두지 아니하신다. 이는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시는 표징이다.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지 않으신다면 굳이 그렇게 하실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냥 버려두셨다가 그에게 영원한 사망을 내리시기만하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자는 그를 살리셔야 하므로 그가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는 순간까지 그를 고달프게 하시는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니 그로 하여금 바로 죄인이라는 고백을 하게 하실 수도 있으실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그 고백은 그 사람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것이니 사죄의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주님이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실 때 어린 나귀새끼를 타셨다. 어린 나귀새끼를 타심은 죄 없는 자를 당신의 사역자로 쓰신다는 것의 상징이다. 어린 나귀는 때 묻지 아니한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어떻게 이 나귀와 같이 때 없는 존재가 되어 주님의 사역자로 쓰임을 입을 수 있을까? 그것은 주님의 그 보혈을 의지하여 내가 진실로 죄인임을 고백할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의 그 죄에 대한 고백을 담보로 당신의 보혈로 우리를 깨끗케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의 고백은 곧 주님을 영접하는 일인 것이다.

(19:30)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19:31)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19:32)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19:33) 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19:34)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19:35)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19:36) 가실 때에 그들이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쓰실 새끼 나귀를 가져 오라하셔서 그 나귀를 타신 것에서 나귀는 주님을 영접할 우리의 모습을 상징한다.

그 새끼 나귀는 자신의 의를 드러내지 아니하였고, 아무도 타지 않은 순수함을 가진 그런 모습이었다.

 

왜 주님은 굳이 그런 새끼 나귀를 타셨을까?

주님이 쓰실 사역자의 모습이 이런 것임을 보이신 것이다. 죄의 고백과 주님의 보혈을 통한 죄 씻음으로 인한 칭의로 죄를 청산한 자, 그는 바로 이 새끼 나귀와 같은 모습이 되는 것이다. 그런 자는 자신의 의를 드러내지 아니하며, 순전한 자의 모습을 가지게 된다. 그런 자만이 주님의 사역자로 사용되는 것이다.

 

이 순간 우리는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보아야 한다.

나귀 주인이 주께서 쓰시겠다할 때 토를 달지 않았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새끼 나귀는 누구도 타지 않은 순수한 모양이었다. 나는 주님 앞에 순수한가?

주님을 태운 나귀는 아무 말이 없었다. 자신의 의를 드러내지 않았다. 만약 나였으면 얼마나 기고만장 했을까? 내가 주님을 태웠다고!

주님의 쓰시겠다고 한 그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했다. 우리는 그렇게 순종할 수 있을까?

 

하나님이 아담을 에덴동산에 두시고 그에게 찾아와 물으신 것은 첫 번째 기회였고,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찾아오신 것은 두 번째 기회를 주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기회를 다시 놓칠 것인가!

 

3. 사명을 주심에 대해 감사함으로 행하자.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기회를 붙잡아 주의 은혜로 사명자로 거듭나게 하려 하심이다. 처음 아담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의 사명자로 삶을 살 수 있는 은혜의 자리에 세워졌다. 그러나 그는 실패했다.

이제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셔서 그 자리에 세우려고 하신다. 나를 특별히 구별하여 선택해 주신 하나님의 그 사랑에 대해 감사함으로 나의 사명을 감당해야하지 않을까?

(6:6)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6:7)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6: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