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장로교회 2018. 4. 22.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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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의 의미"

- 아담에게서의 선악과 의미는?

 

아담의 후손 중에 후손된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죄인된 자의 자리에 섰을 때, 호세아 선지자가 이렇게 말했다.

(4:1, 개역)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거민과 쟁변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하나님과의 계약을 위반한 이스라엘의 죄악은 진실과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는 것이다.

진실은 하나님의 속성으로서 말과 행동의 신실함을 나타낸다. 이는 곧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내용에 충실하지 않은 이스라엘의 범죄를 지적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아담은 하나님과의 맺은 그 계약을 가벼이 여겼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를 이루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경외심이 없었다. 그래서 선악과를 가까이 하는 것을 두렵게 여기지도 않았다. 오히려 탐하는 자리에 까지 나아갔다. 아담이 그랬던 것 같이 이스라엘도 그랬다.

 

인애는 언약에 기초한 사랑으로서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은총과 긍휼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란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경험에서 얻게 되는 체험적 지식을 말한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지 않으려고 하는 그 체험 속에서 얻어지는 그 지식이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그런 지식이 없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거짓 신들을 섬기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 그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지 않고 감사치도 않았다.

(1: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1: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1: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게다가 사랑과 진실을 도외시하였다. 이처럼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 숭배로 타락한 이스라엘에게 주어지는 것은 심판과 멸망에 대한 선포였다.

 

또 호세아는 이렇게 말했다.

(6:6, 개역)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 우리를 향한 그 사랑이 어떠한 것인가를 온전히 깨달아 아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아담을 낳으셨다. 성경은 하나님이 처음 사람 아담을 창조하셨다고 말한다. 그 창조는 하나님의 온 사랑으로 그를 지으심이니, 이는 차라리 아담을 낳으셨다는 표현이 더 적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낳았다는 것은 온전한 사랑으로 그를 만들었다는 것을 족히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온전한 사랑을 다 쏟아 부어 만든 그 아담이 아담에 대해 가지신 당신의 사랑을 온전히 알아주기를 원하셨다. 아담이 하나님의 그 사랑을 온전히 이해할 때 비로소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는 진정한 관계가 이루어지고 아담은 자원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자리에 설 수 있게 될 것이었다.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담으로서는 가장 복된 자의 자리에 서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런 관계가 맺어질 때 하나님은 그에게 완전한 복을 허락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이삭이 그의 장자 에서를 축복하고자 할 때 그 아들로 하여금 사냥을 해서 그 고기로 자신을 기쁘게 해달라고 했다. 이는 에서가 진심으로 그 아비 이삭을 사랑하는지를 보고자 함이었다. 그 사랑을 확인함으로써 그는 그 아들 에서에게 무한한 복을 허락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27:2) 이삭이 가로되 내가 이제 늙어 어느날 죽을는지 알지 못하노니

(27:3) 그런즉 네 기구 곧 전통과 활을 가지고 들에 가서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27:4) 나의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다가 먹게 하여 나로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

 

하나님이 아담에게 원했던 것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이었다.

아담으로 하여금 선악과를 통해 알게 하려 하셨던 것은 그 아담이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을 갖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그 사랑은 하나님이 그에게 강제로 심어두심이 아니라 아담이 자원하여 스스로 획득하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은 무한한 기쁨을 얻으시고, 그 결과는 아담에게 무한대의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아담은 하나님을 아는 지혜를 얻어야만 했다.

하나님이 동산 중앙에 선악과를 두신 것은 이 일을 위해서였다.

 

아담이 하나님이 두신 그 선악과를 보았을 때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웠다고 느꼈다.

(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 말 속에는 아담이 궁극적으로 도달해야할 삶의 목표가 무엇이었는지를 알 수 있는 단서가 있다. 지혜롭게 라는 말이 그것이다. 아담의 원하는 바가 선악과에 투영되어 나타나 있다.

 

하나님께서 그 땅의 모든 것을 지켜 다스리게 하셨으므로 그는 반드시 지혜로와야만 했다. 하나님이 아담으로 하여금 지혜로와지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아담이 알았으므로 그는 지혜로와지기를 원했던 것이다. 아직 그는 신앙적으로 원숙한 단계에 이르지 못한 자였기에 하나님이 그로 하여금 지혜로와지기를 원한 이유를 완전하게 깨닫지 못한 것으로 보여진다. 다만 지혜롭게 되기를 원하는 그 수준에 있었다.

 

지혜의 근본이신 하나님의 그 모습을 닮는 것이 아담의 이루어야 할 바였다. 성경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라고 밝히고 있다.

(9:10, 개역)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이 지혜의 절대적 지향점은 여호와를 경외하는데 있다. 그리고 이 지혜는 여호와를 신앙하는 것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 그리고 얻어진 이 지혜는 하나님을 섬김의 수준을 한 층 더 높여준다.

 

아담은 바로 이 사실을 바르게 깨달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자의 자리에 있었다.

아담은 분명 자신을 지으신 여호와를 바르게 알아가야 할 본분에 있었다.

 

하나님을 아는 지혜를 얻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바르게 경배할 수 있는 그 수준에 이를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아담은 신앙적으로 미숙한 단계에서 출발하여 드디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경지, 바로 하나님을 바르게 경배하는 그 경지에 이르도록 수고하여 그 지혜를 얻어야 하는 입장에 있었다.

 

이 수고로움은 하나님이 그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명령으로 드러나 있다. 따먹지 않으려고 무던히 노력해야할 그 수고가 하나님을 아는 길이었던 것이다.

(2: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그러나 그 아담은 수고하여 그 경지에 이르기를 선택하는 대신 가장 빠르고 가장 쉽게 수고로움도 없이 그 경지에 이르기를 원하는 쪽으로 선택을 했다. 이것이 선악과를 취한 이유였다. 분명히 그 선악과를 보았을 때 지혜롭게 할 만큼 보였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잘못된 선택이며, 그 선택은 분명히 욕심이었다는 것이 탐스럽게 보였다는 말 속에 담겨 있다.

 

이렇게 한 것은 그가 지닌 지식의 수준에서 보아 능히 가능한 일이었고, 그것이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라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욕심이라는 것이 잉태된 것이다. 이 선택은 하나님이 주신 지적 능력을 가장 잘못 사용한 예가 되고 말았다. 여기서 생겨난 욕심은 결국 선악과를 먹는 결과를 낳았고 그 결국은 사망으로 이어졌다.

(3: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3: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3: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아담의 잘못은 그가 지혜를 얻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임을 깊이 알지 못함에서 비롯되었다. 그가 그 사실을 바르게 깨달아 알고 있었다면 그가 지혜를 구하는 그 일을 자기의 뜻과 자기의 방법으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방법이 무엇이었을까를 늘 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대신 자신의 생각을 앞세웠다. 그것은 그가 하와의 말을 듣고 그것을 먹었다고 하신 하나님의 판결 속에 담겨 있다. 하와는 아담에게서 나왔으니 하와의 뜻을 따름은 곧 자신의 생각을 우선한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선택은 아담의 몫이었다.

 

하나님이 아담으로 하여금 지혜자에 이르도록 하심은 아담이 하나님의 속성을 닮는 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었다. 하나님을 알게 되면 하나님의 그 속성을 닮게 되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그 때서야 비로소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우리의 형상을 닮은 자의 모습이 완성되어 드러나는 것이다.

(1: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하신 대로의 모습이 아담에게서 온전히 드러나기를 바라셨다. 그래서 선악과를 두시고 그것을 통해 아담이 스스로 하나님의 바라시는 그 모습을 완성시켜나가기를 바라셨다. 이 모습의 완성은 아담이 하나님 앞에 온전한 경배드림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그 모습 위에 하나님은 아담을 온전히 복 있는 자로 세우시고 원하시는 대로 그에게 복을 부어주셨을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는 가장 큰 기쁨이 되었을 것이다.

아담이 진실한 지혜자가 되었더라면 그는  '하나님을 아는 것'에 온전한 자가 되었을 것이고, 그 결과는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헌신뿐만 아니라 사람을 향한 진실한 사랑까지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하나님에게 뿐만 아니라 그 아내 하와에 대한 진실한 사랑을 이룬 자가 되어 하나님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먹게 된 그 책임을 전가하는 그런 비열한 자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3:12)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예수님 당시 그 땅의 바리새인들도 이 지혜가 부족한 점에서는 아담과 같았다. 그런 바리새인들을 향해 예수님은 그들의 외식적인 경건과 형식주의를 책망하고 긍휼과 자비를 원하신다고 말씀하셨다.

(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12:7)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의 소유자라야 하나님께 순종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온전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혜자가 되어 하나님이 주실 바 영생의 소유자가 되어 영원히 그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셨다. 이 사실을 주님이 이렇게 밝히셨다.

(17: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17: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