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장로교회 2018. 3. 18. 13:55

https://drive.google.com/file/d/1YIGl7cqY_RshngQlCsQEJo9z_YDQd2CE/view?usp=sharing

 

예수님의 족보

 

마태는 복음서를 기록함에 있어서 그 시작을 예수님의 족보를 기록하는 것으로 하였다. 그러면 마태가 예수님의 족보를 가장 먼저 언급한 것은 무슨 연유에서였을까? 단순히 그가 말하고자한 예수의 탄생에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시간 순서대로의 기록을 위해서 그리하였을까? 요한과 마가도 복음서를 기록했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누가도 예수님의 족보에 대해 언급은 하였으나 그것으로 복음서의 기록의 시작점으로는 잡지 않았다. 그렇다면 마태가 복음서를 기록할 때 예수님의 족보를 가장 먼저 기록하면서 시작한 것에는 분명히 어떤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1: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1: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1:4)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1: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1: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1:7)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1:8)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1:9) 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1:10)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

(1:11)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를 낳으니라

(1:12)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1:13)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

(1:14) 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를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1:15)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1: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1:17) 그런즉 모든 대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러라

 

족보의 시작이 아브라함부터 시작이 되는데, 이 아브라함과 그리고 이삭과 야곱은 모두 족장들이다. 족장 시대에 그들이 족장이었다는 것은 이는 곧 그들이 왕에 해당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다윗부터 시작되는 그 조상들의 기록은 실제로 그 땅에서의 진실로 왕이었던 자들이다.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간 포로시대의 그 조상들의 기록은 비록 포로의 신분이기는 하나 그 땅의 왕의 후예들이니 그들은 왕의 핏줄이었던 것이다. 그 왕의 혈통을 따라 예수가 육신을 입었다는 것은 그가 왕이라는 사실을 이야기 함이다.

 

이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하여 기록된 책이다. 다시 말해 이 책을 읽을 자들이 유대인들이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자신을 구해줄 위대한 왕을 고대해온 족속들이다. 그들이 그토록 기다려온 메시아인 왕이 마태는 바로 이 예수라는 것을 그들에게 말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애당초 이스라엘 족속들은 그들의 왕이 되셔서 그들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해주시고 그들을 광야에서 먹이시며 가나안의 주인이 되게 하여 살게 해주신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이신 왕보다는 그들의 눈에 보이는 화려하고 장엄한 모습인 사람으로 된 왕을 원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외모가 준수한 사울을 그들의 왕으로 뽑히게 하셔서 그들의 왕이 되게 하셨다. 그러나 사람인 왕들은 하나님처럼 완전할 수 없었다. 그들을 바르게 인도 할 수 없었고 그들은 결국 이방인의 포로가 되는 처지에 이르게 되었다. 그 때 그들은 다시 하나님께 간구했다. 자신들을 그 처지에서 구해줄 참된 왕이신 메시아를 보내 달라고. 그 간구 속에 담겨진 그들의 원하는 메시아는 역시 사람인 메시아였다. 진정한 왕이 이 땅에 태어나 그들을 그 처지에서 구해낼 것이란 것이 그들의 메시아 대망론이었다. 이러한 기대를 가진 유대인들에게 마태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눈높이에서 복음서를 쓴 것이다.

 

마태는 특별히 예수의 족보를 언급한데 이어 예수님의 탄생과 작명에 관한 일을 언급하였다.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아기 예수의 이름은 사람이 지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시하심에 따라 그리했고, 그 뜻이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밝히고 있다. 이는 명백히 주님이 메시아라는 선언인 것이다. 참된 왕으로 오셔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라는 복음의 진수를 밝힘으로써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잘못된 메시아관을 바로잡아주고 있는 것이다.

 

(2:1)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2: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특히 마태는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 기록을 하면서 그 아기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기록함으로써 이가 바로 유대인들이 고대하던 그 메시아라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리함으로써 유대인들로 하여금 바른 메시아관을 갖도록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고대한 메시아는 그 땅에서 멸시를 받고 고난을 당하는 그런 메시아가 아니라 장엄하고 화려한 모습을 그 땅을 호령할 자의 모습을 한 메시아였다. 그런데 주님은 온갖 멸시와 조롱을 받으며 끝내는 십자가에 달리는 모습을 유대인들에게 보여주었다. 이는 그들이 기다린 메시아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분이 진실로 메시아라는 것을 바르게 깨달으라고 마태는 유대인들에게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참조1: 유대인들의 메시아 대망론:

 

 유대인들은 구약의 예언대로 메시아가 오실 것을 믿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갈릴리로부터 오시지 않고 베들레헴으로부터 오실 것을 알고 있었다(2:5-12; 7:41-42). 그들은 메시야가 유대인의 왕이 될 것을 알고 있었으며(2:2)

 

그러나 유대인들이 이처럼 구약에 나타난 메시아에 대한 예언의 근본적인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의 메시야 대망 사상은 왜곡되어 있었다. 유대인들의 왜곡된 메시아사상은 다음과 같다.

 

1. 시간적인 왕을 대망함

 

 유대인들은 이사야 53장에 나타난 수난의 종 대신에 일시적인 왕을 대망했다. 바울의 초기 생애 가운데서 읽을 수 있듯이(3), 유대인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죄에 대해 무감각했고, 그들이 죄에서부터 구속함을 받아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결국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들의 거침돌이 되었다(고전 1:23; 벧전 2:8).

 

그들은 메시야가 수난의 종으로 오실 것을 생각지 못하고 오히려 일시적인 왕으로 오실 것을 대망하고 있었다. 수제자 베드로까지도 왜 그리스도가 죽어야 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16:21-25).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죽음의 뜻을 이해할 수 있기 까지는 3년 이란 세월이 걸린 것이다(2:22). 따라서 그 당시 유대주의를 배운 대중이 그리스도의 죽음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12:32-34).

 

2. 초월적인 능력의 사람을 대망함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성육신하실 것을 대망하지 못하고 초월적인 능력의 소유자가 나타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유일신 개념 때문에 그리스도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할 때 이를 믿을 수가 없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이같은 주장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중한 죄라고 생각했다(26:63; 14:62-64; 5:17-18; 10:32-36).

 

 유대인들은 오늘날까지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들이 그리스도가 우리들의 구속을 위해 세상에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3. 국가적인 소망을 성취할 자를 대망함

 

 유대인들은 그들에게 심판을 선포할 사람을 대망하기보다 그들의 나라에 다윗왕과 솔로몬왕 시대 같은 번영을 회복시킬 자를 기대하고 있었다. 예수님의 부활 이전은 물론 부활 이후에도 이같은 생각이 제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오순절에 성령을 받기까지는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올바른 뜻을 제자들까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1:6)라고 질문한 제자들의 마음은 이를 증명해 준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과 스데반 그리고 바울 사도를 비난하면서 예수님과 그의 추종자들이 유대 백성과 유대인의 율법과 유대인의 성전을 반대한다고 주장했다(26:61; 6:13-14; 21:28; 25:8). 이와 같은 잘못된 견해는 유대인들이 구약의 선지자들의 글을 해석함에 있어서 너무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그들에게 적용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유대인의 성전만이 타당한 예배의 처소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분명하게 가르치셨다(4:20-24; 27:51).

 

 그리고 성전이 파괴될 것을 가르치셨다(24:1-2). 예수님은 유대 백성이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지 못하므로 다른 백성이 그들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며(21:43) 유대인들이 율법의 의식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명확하게 가르치셨다(7:19); 11:41).

 

4. 로마의 통치에서 해방시킬 자를 대망함

 

 유대인들은 영적(靈的)인 구원자를 기다리기보다 그들을 로마의 통치에서부터 해방시킬 정치적 혁명가를 기대하고 있었다. 예수님이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었을 때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억지로 잡아 왕으로 세우려 했다(6:15). 예수님이 그들의 육체적인 필요를 채워 주시기 위해 이적을 행하셨을 때 유대인들은 그들의 대망하고 있는 메시아가 바로 이와 같은 이적을 행하는 사람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고 주님을 그들의 왕으로 세우려고 했다.

 

 주님은 유대인들이 가졌던 왕국 개념을 철저하게 배격했으며(참조, 1:6), 유대인들의 지도자나 니고데모에게 올바른 왕국에 대하여 가르쳐 주셨고(3:1-12) 빌라도에게 그의 왕국의 참다운 본질에 대하여 가르쳐 주셨다(18:36). 신약성경 어느 곳에서도 예수님이 지상에 오신 목적이 지상에서 그의 왕국을 세우려는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지 않다(참조. 14:17). 이스라엘을 로마의 통치에서부터 해방시켜서 지역적인 왕국을 세우리라는 유대인들의 메시아관과 진정한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가르친 메시아관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5. 유대인만을 위한 왕국 설립자를 대망함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설립한 왕국이 아브라함의 자손에게만 해당된다고 생각했다. 이와 같은 사상은 복음서 전반에 걸쳐서 찾아볼 수 있다. 세례 요한이 그가 세례 베푸는 곳에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오는 것을 보고 꾸짖어 가로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3:7-9)고 했다. 세례 요한이 이렇게 말한 것은 유대인들이 그들의 조상이 아브라함이기 때문에 그들도 자동적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바리새인들을 꾸짖으셨다. 그들은 자기들이 참다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주장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가리켜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하셨다(8:44). 예수님은 사역 초기부터 마지막까지 유대인들이 그를 배척할 것이며, 하나님은 그들 대신에 이방인을 부르실 것이라고 천명하셨다. 유대인들이 그들의 메시아요 주님이신 예수님을 배척했을 때, 복음은 땅 위의 모든 백성들에게 전파되었다. 예수님께서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은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8:11-12)하신 것은 바로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파될 것을 뜻한다.

 

같은 뜻으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21:43) 하셨다. 예수님께서 자기 땅에 오셨으나 자기 백성은 그를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그를 영접하는 자 곧 그를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1:11-12). 예수님의 오심은 세상을사랑하셨기 때문이다(3:16). 그리스도는 유대인만을 위해 메시아로 오신 것이 아니라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의 구주로 오신 것이다. 이 사실을 유대인들은 깨닫지 못했다. 그들의 이기적 신앙이 그들의 눈을 가렸던 것이다.

 

*참조2: 이사야서의 메시아사상

 

이사야의 이름의 뜻은 구원으로 이사야서의 핵심적인 내용은 메시아사상이다. 이사야서 전체를 통하여 메시아가 오실 것과 메시아의 탄생, 메시아의 모습, 메시아의 활동, 메시아의 죽음과 무덤에 묻히심, 메시아의 부활 등을 예언 하고 있다.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시는 역사는 메시아 즉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하신다. 이사야가 예언한 메시아 예언은 구약의 초점이라고 말 할 수 있다.

 

1. 이사야서에 기록된 메시아 예언

1) 메시아시대에 관한 예언 2:2~4

2) 여호와의 싹

3) 임마누엘 7:13~14 - 메시아의 탄생

4) 기묘자 9:1~2, 6~7

5) 한 가지 11:1~10

6)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실 메시아 25:6~9

7) 한 왕으로 오실 메시아 32:1~2

8) 메시아의 기적 35:5~6

9) 목자이신 메시아 40:5, 10~11

10) 이방의 빛 42:1~11

11) 메시아의 고난 53:

12) 세상의 빛 60:

13) 치료하시는 메시아 61:1~3

14) 새 이름으로 받으실 메시아 62:2, 65:15

15) 메시아의 나라 62:4

 

오시는 메시아를 고난의 종으로 묘사하고 있다. 십자가의 고난을 너무나 명확하게 예언하고 있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실 것을 예언하는 말씀이다.

 

2. 메시아 왕국의 영광과 유대의 현실 비교

 이사야서 2장에 미래에 나타날 메시아 왕국은 너무도 영광스러운 반면 당시 유다나라의 상태는 우상숭배와 교만의 죄로 가득 차 있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성전으로 모여오는 이유는 그곳에서 율법이 나오며 하나님의 말씀이 나오기 때문이다 란 율법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교훈을 의미하고 복음말씀을 의미한다. 율법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의미하며 그것은 시내산에서 계시된 모세의 율법이 완성된 시온의 율법을 의미하는데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리킨다. 이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전 세계로 전해질 사실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사야 기록에 의한 그리스도(=메시아)재림으로

 예루살렘에 중앙정부가 세워지고

 예루살렘이 만방에 뛰어나 만민이 그리로 모여올 것이다.

 주님께로부터 율법이 흘러나와 만민을 가르치며 만민이 하나님을 경외하게 될 것이며

 전쟁은 종식되고 평화가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은 그 택하신 족속들을 미워하시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바라는 그 메시아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로 잡아주시고 참된 메시아에 대한 인식을 함으로써 그들의 구원이 이루어지도록 하시기 위해 마태로 하여금 이 복음서를 기록케 하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루시기 위해 마태로 하여금 이 복음을 기록케 하신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 마태복음은 유대인들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오늘날 이 땅을 살아가는 많은 믿음의 백성들 또한 메시아에 대한 바른 인식을 하지 못하기는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과 마찬가지이다.

 

이 땅의 믿음의 백성들 중에 오직 이 땅에서 복을 주시기만 하는 그런 메시아를 바라는 자들이 참으로 많다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마태복음의 기록은 이런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메시아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갖도록 하게하고 그래서 참된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깊으신 섭리가 담겨있다고 보아야 한다.

 

예수님이 사역하셨던 그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은 어두워져 있었고, 귀는 멀어져 있어 참된 메시아를 보지도, 그 말씀을 바르게 듣지도 못했다. 마태는 특히 주님이 장님의 눈을 뜨게 하신 일과 귀머거리를 고치신 일들을 소상히 기록하였는데, 이것은 바로 유대인들의 이 잘못을 교정해 주려는 하나님의 은혜 베푸심의 위대함임을 밝히려 한 것이다. 마태복음에만 기록된 맹인과 벙어리를 고치신 이적의 기록이 이것을 증거하고 있다.

(9:27)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가실새 두 소경이 따라오며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9:28)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소경들이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밑줄 친 부분의 말씀은  예수님이 메시아 됨을 증거하심이며, 이 메시아에 대해 순종할 것이냐의 물음이다.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9:29) 이에 예수께서 저희 눈을 만지시며 가라사대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신대

(9:30)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예수께서 엄히 경계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게 하지 말라 하셨으나

 

(9:32) 저희가 나갈 때에 귀신 들려 벙어리 된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9:33) 귀신이 쫓겨나고 벙어리가 말하거늘 무리가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때없다 하되

 (9:34) 바리새인들은 가로되 저가 귀신의 왕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


  이런 일은 밑줄 친 이 부분의 말씀은 메시아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어서 메시아가 올 때 이루어질 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일이 지금 이루어졌으니 이 일을 행하신 이가 메시아라는 것이다.

 

(9:34) 

 

 마태복음 12장에 눈 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치신 이적이 기록되어 있다.

        (12:22) 그 때에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자를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벙어리가 말하며 보게 된지라

  (12:23) 무리가 다 놀라 가로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하니

  이 사건의 이 부분의 기록이 눅 11:14에도 있으나 거기에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기록이 없다.

  이는 마태는 예수님이야말로  진실로 참된 왕이신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12:24) 바리새인들은 듣고 가로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느니라

 

  마태를 통해 이 복음서를 기록케 하신 하나님의 그 깊으신 은혜에 우리는 어떻게 보답해야 할!

 온전한 깨달음을 얻고 그것이 나의 믿음이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그 감사에 대한 보답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