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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주님의 뜻은?

영동장로교회 2018. 1. 14. 14:00

https://drive.google.com/file/d/1M7bR9QpWA2NxTa3aV3FvdjvRlFpkQKsu/view?usp=sharing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주님의 뜻은?”

 

요한복음의 저자인 요한은 주님이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이적을 언급하며 이것이 갈릴리로 오신 후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라는 것을 굳이 밝히고 있다. 그러면 이 이적이 무슨 의미가 있기에 굳이 그렇게 말했을까?

(4:54)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 행하신 두번째 표적이니라

 

 

1. 병든 아이의 등장은 무슨 뜻이 담겨져 있는 것인가?

이 아이의 병은 서서히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이었다. 이 아이는 죄로 인해 죽음을 향해 다가가는 운명에 놓인 우리를 상징한다.

 

우리 조상 아담의 범죄함으로 인해 우리에게 전해진 그 죄는 우리를 서서히 죽음으로 이르게 하는 병이라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려함이다. 우리는 우리의 그 죽음이 우리를 서서히 죽음에 이르게 하는 그 병 때문이라는 것을 도무지 지각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세상의 과학을 통해 인체가 노화하고 그 결과로 죽음이라는 것을 맞이할 뿐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이 노화를 늦추게 할 수 있을까하는 것에만 온 정신을 쏟아 붙고 있는 형편이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여 생명이 연장된다하여도 결국은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다.

죽음은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이 나는 것이 아니다. 누구든지 죽음 이후에 맞이하는 것은 천국이 아니면 지옥이라는 사실이다.

 

주님께서는 서서히 죽어가는 이 아이를 통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라 하시는 것이다.

 

2. 병든 아이를 자식으로 둔 아비의 등장은 또 어떤 의미를 전해주는 것인가?

첫째로는 그가 그 아이의 아비라는 입장에서 주는 의미이다.

서서히 죽어가는 이 아이를 살리고자 하는 그 부성애는 어디서 온 것일까?

자신의 어떤 것도 다 내어놓는 그 모습에서 그는 진실로 그 아이를 사랑하는 아버지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그 땅의 왕의 신하이다. 그것은 그가 그 땅에서 권력을 가진 높은 자리에 선 자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 땅에서 아무런 직책도 없는 보잘 것 없는 목수의 아들, 예수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참된 믿음에 이르는 길은 우리의 모든 것을 주님 앞에 내려놓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왕의 이 신하가 주님을 만나려고 온 목적은 오직 죽어가는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온 것뿐이다. 주님이 메시야이기 때문에 자신의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주님을 만나려고 온 것이 아니다. 그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구원을 얻는 복을 얻게 된다.

 

그것은 그가 주님을 만나기 위해 왔을 때,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았던 것이다. 세상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었으니 사람을 시켜 주님을 불러오게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고, 자신의 지위와 체면과 그 모든 것을 내어놓고 주님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오늘 우리는 그러한가? 나의 명예와 체면과 세상적인 이목 때문에 주님을 여전히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니면 주님보다 나를 먼저 내세우지는 않는가? 주님을 자랑하기보다는 나를 먼저 자랑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자신의 아들을 살리기 위해 모든 것을 아끼지 아니한 이 아비는 바로 죄로 인해 서서히 죽음으로 향해가는 우리를 살려 내시려고 계획하신 성부 하나님과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속하신 성자 하나님의 그 모습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 우리의 소견에는 가장 소중할 것으로 생각되는 당신의 독생자까지 제물로 내어주신 그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드러내어 보인 것이 그 아이의 아비, 왕의 신하인 자의 그 모습이다.

 

둘째로는 아비의 아들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보여주는 의미이다.

성경의 기록으로는 신하의 아들이 외아들이라고 되어있다. 우리 성경은 그냥 그 아들이라고 되어있지만 원전에는 외아들로 나와 있다.

 

하나밖에 없다는 것은 자기 목숨보다도 더 소중한 존재라는 것이다. 이런 아들을 향한 그 사랑이란 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사랑인 것이다. 이런 사랑의 원형은 어디에 있을까?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그 사랑이 오늘 왕의 신하가 그 외아들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 위대한 사랑이 결국 위대한 결과를 이루어내고 있다. 도저히 살 수 없는, 세상의 모든 방법을 동원해도 해결 할 수 없는 그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낸 것이다.

(벧전 4:8, 개역)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허다한 죄를 덮는 다는 것은 결국 죽음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죄의 결국은 사망인데 죄를 덮는 다는 것은 곧 사망의 문제를 해결해준다는 것이다.

 

이 아이가 살아난 것에 그 아이가 한 것이 무엇이었던가? 아무 것도 없었고 오직 그 아이의 아비가 그 아이를 살리고자 한 그 사랑이 그를 살려낸 것이다. 우리가 사는 것은 오직 우리를 살리고자 하는 하나님의 그 사랑이라는 것이다.

 

셋째로는 왕의 신하의 믿음을 통해 오늘 우리의 믿음을 바로 세우시려고 하시는 것이다.

 

왕의 신하는 주님이 가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일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소문을 듣고 안 것이었을 것이다.

 

그는 돈과 권력이 있는 자였으니 그 아들을 위해 그 땅에서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사용해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효험이 없었다. 이제는 마지막 방법으로 매달릴 곳은 예수밖에 없다고 판단하여 찾아 온 것이다.

 

이는 죽음에 이르는 우리의 이 병을 치료하는 방법은 이 세상의 의술이 아니라 주님께 의탁하는 길밖에 없다는 것을 강력하게 암시하는 것이다.

(4:46)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4:47)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에 오심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저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왕의 신하는 소문을 듣고 찾아와 자신의 아이의 병을 낫게 하는 그 이적을 보고자 원해서 찾아온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 자기와 함께 가나에서 가버나움으로 내려 가줄 것을 간청하고 있다.

 

이는 표적을 바라는 우리의 믿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내게 표적을 보여 달라고, 그러면 내가 믿겠노라고. 이런 우리를 향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4:4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은 그 옛날 그 땅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그 당시의 그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바로 지금의 우리의 모습인 것이다.

 

그 때 신하는 이렇게 말했다. 내 아이가 죽기 전에 와서 그 이적을 보여 달라고.

(4:49) 신하가 가로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이 모습은 우리의 모습과 너무나 닮아 있음을 보게 된다. 내가 원하여 기도하는 대로 이루어 달라고. 그래서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보여 달라고.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들의 신앙생활의 일상이 아니던가.

 

도마도 그러했다. 주님이 부활하신 것을 자신이 보기 전에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그것은 믿을 수 있는 증거를 보여 달라는 것이었다.

(20:24) 열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0: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0: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0: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0:28)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0: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이렇게 표적을 원하는 그 신하를 향해 주님은 그와 함께 동행하는 대신 네 아들이 살았다고 선언해 주셨다. 믿음의 표적을 구하는 우리라면 주님의 그 말씀을 믿었을까? 함께 가서 그 자리에서 주님이 그 아이를 일으켜 세워주셔야 믿을 수 있는 우리가 아니던가. 그런데 그 신하는 그 말씀을 믿고 내려갔다.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바로 이 같은 믿음의 소유자가 되라 하시는 것이다.

(4:50)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신대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하신 주님의 그 말씀대로 그 신하는 복을 얻었다. 그처럼 살리기 원했던 그 아들이 살아나는 복을 받은 것이다. 이는 구원 얻은 그 복을 상징한다. 아들뿐만 아니라 자기와 온 집안사람들이 그 복을 함께 받았다. 그 집안이 모두 구원의 복을 얻은 것이다.

(4:51)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 하거늘

(4:52)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제칠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4:53) 아비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복된 자가 되기를 간절히 원하신다. 서서히 죽음에 이를 우리를 살리셔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구원의 그 복을 누리는 주인공이 되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것이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가 얻을 그 복이 영생을 누리는 이 복인 것이다.

우리 모두 이 복의 주인공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