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원의 품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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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원의 품꾼들”
예수께서 포도원의 품꾼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마 20:1)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 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마 20:2) 저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 보내고
주님이 이 땅에 계실 그 당시에 만난 사람들은 유대인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일찍이 아브라함을 불러 당신의 백성으로 세우신 소위 선민이란 자들이다. 하나님이 그들을 불러 선민 삼으신 것은 그 땅의 많은 족속들 위에 군림하게 만들고자 한 것도 아니요, 저들 앞에서 자랑거리로 삼으시려고 한 것도 아니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사 그 많은 족속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위대하심을 보아 알게 하사 궁극적으로는 그들 모두가 하나님께 경배하게 하실 요량으로 그들을 선민 삼으신 것이었다. 그러했으므로 이스라엘 족속들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그 일에 헌신하는 삶을 살아내어야만 했다. 이 사실을 주님은 비유 속에서 이스라엘을 맨 처음 포도원으로 부른 품꾼으로 비유하셨다.
처음 포도원에 들어간 그 일꾼은 모범적인 일꾼의 모습을 보여야할 처지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태도는 뒤에 들어온 일꾼들의 모델인 것이다. 그가 최선을 다해 포도원을 가꾸었다면 뒤에 온 이들도 그렇게 따라 할 것이었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를 불러 포도원의 일꾼 삼아준 주인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었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가장 먼저 부름을 받은 자들이었다. 그들이 포도원에서 해야 할 일에 해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었다. 그런 그들은 그 일에 충성했는가. 선지자들을 죽이고 드디어는 오신 하나님조차 십자가에 매달았다. 그들은 참으로 악한 일꾼들이었다. 전혀 모범이 되지 않은 일꾼들이었던 것이다.
(요 6: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주인이 품꾼을 선택한 것은 오직 주인의 뜻이었다. 그 품꾼이 품꾼 될 마땅한 자격을 갖추었으므로 주인은 반드시 그를 품꾼으로 써야 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냥 주인의 선하신 뜻에 따라 선택되었을 뿐이다.
(마 20:3) 또 제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제 삼시에 주인을 만난 자들은 포도원 일로 바쁜 그런 자들이 아니었다. 포도원에서 일 하고 싶어도 그들을 불러주는 주인이 없었기에 그들은 마냥 장터에서 놀고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천국은 우리가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란 뜻이다. “내가 선한 공로를 많이 세웠으니 마땅히 내가 갈 곳이다.”라고 한다면 이는 엄청난 착각이다.
(마 20:4)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저희가 가고
(마 20:5) 제 육 시와 제 구 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마 20:6) 제 십일 시에도 나가 보니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십일 시는 지금으로 치면 오후 5시 정도다. 세상의 이치로 하면 이미 이들은 포도원의 일꾼으로는 적합지 않다. 시간이 이미 지나 일꾼으로서의 가치가 사라진 무익한 자들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도원의 주인은 그들을 똑같이 포도원의 일꾼으로 불러주었다.
우리 중에 누가 주님 앞에 유익한 종이었던가. 하나같이 죄인 된 자들로서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자들이 아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불러주사 함께 거할 수 있는 은혜를 베푸셨다. 우리에게는 그럴만한 공고가 있었으며, 그럴 만한 선함이 우리에게 있었던가!
이미 일할 자로서의 자격이 없어져버린 그들을 불러 포도원의 일꾼으로 부르신 것같이 이미 죄인이 되어버린 우리를 불러 당신의 일꾼으로 세우시며, 당신의 자녀 삼아주신 그 하나님의 한없는 은혜!
(마 20:7) 가로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 가로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가로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자신의 능력으로는 포도원의 일꾼으로 들어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의 능력으로는 결코 천국에 들어 갈 수 없다. 오직 주님의 부르심을 입는 것만이 유일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마 20:8)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품삯은 천국에 들어갈 구원을 의미한다. 주인의 포도원을 위해 일한 자만이 받는 대가이다. 그러나 이 대가란 그의 능력으로 마땅히 받을 것이었던가. 주인이 그를 불러주지 않았다면 결코 그에게 주어지지 못할 것이었다.
그는 주인의 부름을 입었으므로 감사함으로 그 포도원을 위해 일 했어야 한다. 부름을 입지 않았다면 어디에서 일을 할 수 있었으며, 가족들을 먹여 살릴 그 돈을 얻을 수 있었을까.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지 않았다면 어떻게 우리가 주의 일을 할 수 있었을까. 감사함으로 마땅히 이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도리일 것이다.
포도원의 주인은 그 수고한 자에게 반드시 품삯을 주리라고 마음먹고 있다. 마찬가지로 믿음의 사명을 감당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구원의 상급을 그 품삯으로 예비하고 계신다. 이스라엘에게는 이미 그들의 조상에게 약속한대로 그렇게 구원을 허락하셨다.
하루해가 다 가서야 부름을 받은 품꾼들은 한 데나리온의 품값을 기대할 수 없었다. 정시에 부름 받은 일꾼이 그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을 약속 받았으니 당연히 그들에게는 한 데나리온은 가당치 않은 품값인 것이다.
그러나 주인은 그들에게도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씩 지불했다. 아브라함의 혈통적인 후손이 아닌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허락된 그 구원이 온전히 주어진다는 것이 가당하기나 한 일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동일한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것이다. 늦게 부름 받은 그 일꾼들이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씩 받는 것이 그들이 그만큼 일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마땅히 받을 만큼을 받은 당연한 대가라고 할 수 있는가. 전적으로 주인이 그들에게 베푼 은혜의 선물일 뿐이다. 우리가 구원 얻는 것도 이 같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마 20:9) 제 십일 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늦게 부름 받은 그 일꾼들은 당연히 더 열심히 노력했어야 한다. 만약 그들이 맨 먼저 부름 받은 그 일꾼이 하는 빠르기로 일을 했다면 그들이 한 데나리온을 품삯으로 받는 순간 얼마나 부끄러웠을까.
부끄러운 구원을 받지 않도록 순간마다 최선을 다하는 믿음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
(마 20:10)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희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마 20:11)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
(마 20:12)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이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방인의 구원 얻은 것에 시기 나게 하려하심을 상징한다.
(롬 10:19, 개역)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뇨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
(롬 11:11, 개역)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마 20:13)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구원은 오직 주님의 권한 안에 속한다. 그 누구의 간섭이나 주장에 방해 받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절대권에 속한 것이 바로 우리의 구원이다. 선을 행함으로써 구원을 성취하려 했던 그 부자 청년의 어리석음이 오늘도 많은 믿는 자들에게서 보여지는 것은 참으로 불쌍한 일이다.
(마 20:14)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마 20:15)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마 20: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판단은 오직 하나님의 권한 안에 놓여 있다. 이것을 간섭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 앞에 복종함으로써 우리의 믿음을 완성해 나가야 한다. 순전한 순종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이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그 당시의 그 이스라엘 족속들의 믿음을 대표적으로 보여준 그 부자 청년으로 인해 이루어진 이 비유의 말씀을 통해 주님은 참된 구원의 원리를 가르치고 계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