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진실로 주님의 참 신부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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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진실로 주님의 참 신부입니까?”
하나님이 아담에게 그의 신부로 하와를 지어주셨다.
(창 2:18)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 2:23)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한 것은 하와가 온전히 그를 돕는 배필이라는 고백이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 아담에게 베푸신 가장 큰 선물이 하와였다. 그 큰 선물인 하와는 온전히 아담을 돕는 존재였다. 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요 하나님과 늘 함께 하는 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남편을 유혹해 범죄한 자의 자리에 이르게 하는 그 때의 하와는 아담에게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인 존재가 되는 자리에서 떠나 있었던 것이다. 참된 신부의 자리에서 떠난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편한 곳이 집이다. 집이란 아내가 있는 곳이요, 남편이 있는 곳을 말한다. 힘든 몸이 쉴 곳은 바로 아내가 있는 곳이란 의미이다. 가정이 마음의 평화를 누리며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곳이 되는 것은 부부가 하나님 안에서 한 마음을 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한 마음으로 하나님 안에 거한 때는 그 가정이 에덴에 있었다.
그러나 하와가 하나님이 허락하신 돕는 배필의 자리, 즉 신부의 자리에서 떠나 있었을 때, 그 가정은 더 이상 에덴에 머물지 못했다.
신랑과 신부가 하나님을 떠나 서로 다른 마음을 품으면 그 가정은 에덴에서 지옥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세례요한은 직접 주님을 신랑으로, 부름 받은 우리를 신부로 표현하고 있다.
(요 3:29, 개역)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신랑과 신부는 결혼을 통해 한 몸이 되도록 하나님이 정하셨다.
(창 2:24, 개역)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이는 하나님이 하신 일이요 사람이 정한 일이 아니다. 따라서 이 법칙은 영원하며, 변함이 없을 것이다.
택하심을 입은 자가 주님의 신부라는 것은 주님과 한 몸을 이루야 한다는 것을 함의 한다. 주님과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은 주님과의 신비적 연합을 이룸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계에 들어간 자는 그 생각과 뜻이 온전히 주님의 그것과 일치해야 한다.
택함을 입은 자에게 있어서 이 신비적 연합은 그가 임의적으로 분리하는 것이 불가하다.
(마 19:6, 개역)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오직 택함을 입은 자가 할 도리는 한 몸을 이룸으로써 행해야 할 그 일을 하는 것이다. 그의 생각 속에는 이 관계를 청산할 마음이 티끌만큼이라도 없어야 한다. 그의 생각 속에는 신랑 된 주님이 원하시며 기뻐할 일만을 생각하고 그것을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이 신부된 자의 마땅히 할 바, 그 도리인 것이다.
주님이 택하신 제자들,
그들은 대표적으로 주님의 신부로 택함을 입은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각기 그 생각이 달랐다. 신랑이신 주님이 구속사역을 감당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으므로 신부된 그들은 마땅히 그 일을 돕는 배필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했어야만 했다.
그러나 이 사역을 돕는 신부 되게 하시려고 부르심을 받은 그들은 오직 세상의 욕심으로만 주님을 따랐다. 신랑 되시는 주님과 신부되는 제자들은 이처럼 생각이 달랐다. 이때의 심정을 주님은 인자가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표현하셨다. 마음을 두고 쉴 곳이 없었던 주님의 그 외로움을 누가 이해했을까.
(마 8:20,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눅 9:58,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일찍이 하나님은 이것에 대해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미리 언급하셨다. 호세아의 아내 고멜이 신랑인 자신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의 사이에서 음란한 자식을 낳도록 하심으로 주님의 그 심정을 알게 하셨다.
신랑인 자신을 배반하고 딴 사내와의 사이에서 음란한 자식을 낳은 그 일을 당한 호세아의 그 심정이 어떠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세아는 그의 아내를 버리지 아니하고 끝까지 자신의 아내로 삼은 것은 세상과 합하여 음란해진 그 제자들을 버리지 아니하고 끝까지 자신의 신부 자리에 두신 그 주님을 상징한다.
(호 1:2) 여호와께서 비로소 호세아로 말씀하시니라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행음함이니라
(호 1:3) 이에 저가 가서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취하였더니 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매
(호 1:4)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하라 조금 후에 내가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으며 이스라엘 족속의 나라를 폐할 것임이니라
주님의 제자들처럼 세상과 합하여 음란한 일을 행한 우리도 또한 버리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신부의 자리에 세우시는 주님의 그 완전하신 사랑을 우리는 아는가.
오늘 우리의 생각도 그 제자들과 같다면 여전히 외로우실 주님이신 것이다. 우리의 생각을 주님의 그 생각에 초점을 맞출 때 비로소 주님은 내 마음에 좌정하실 수 있게 될 것이다. 주님을 내 마음의 주인으로 모신다함이 바로 이것이다. 내가 내 마음의 주인의 자리에서 내려오고 그 자리에 주님을 모시는 것이 믿는 자의 마땅한 도리라고 하는 것은 이 같이 주님의 뜻에 따라 그 사역을 감당해 낼 때 비로소 가능해지는 일이다.
신부의 자리에 끝까지 붙들어 세워주신 그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신부로서의 그 본분을 다하는 삶을 살아내려고 노력하는 자에게 은혜 베푸시는 하나님이심을 하나님은 룻을 통해 보여주셨다.
한 남자의 신부가 되었으나 그 신랑이 먼저 죽어 신부의 자리에서 자유하게 된 룻이었지만 그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신부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고자 했다. 신랑 없는 상황에서 그 일이 쉬웠을까. 시모를 부양하기 위해 과부의 몸으로 늦게까지 먹을 것을 구하는 그 삶이 행복하다고 보여 졌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성심성의껏 시모를 모셨다. 그런 룻이 이상적인 신랑, 보아스를 다시 만나고 결국은 주님의 조상이 되는 그 큰 은혜를 받았다.
(룻 1:4)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아내를 취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거기 거한지 십 년 즈음에
(룻 1:5)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룻 1:16)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룻 1: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룻 1:18) 나오미가 룻의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룻 2:17) 룻이 밭에서 저녁까지 줍고 그 주운 것을 떠니 보리가 한 에바쯤 되는지라
(룻 2:18) 그것을 가지고 성읍에 들어가서 시모에게 그 주운 것을 보이고 그 배불리 먹고 남긴 것을 내어 시모에게 드리매
(룻 4:13) 이에 보아스가 룻을 취하여 아내를 삼고 그와 동침하였더니 여호와께서 그로 잉태케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룻 4:16) 나오미가 아기를 취하여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룻 4:17) 그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주되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 하여 그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비인 이새의 아비였더라
주님의 신부로 부름 받았던 그 제자들이 변화되어 진실로 주님의 신부로서의 사명을 감당했던 그 사도들의 시대에 놀라운 역사가 시작되었다. 사도들이 말씀을 전하니 믿는 자가 남자만 오천이나 되는 놀라운 전도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행 4:4)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이제는 그 사도들의 시대가 지나고 우리가 주인공이 되는 교회 시대가 되었다. 성경은 분명히 교회를 주님의 신부로 묘사하고 있다.
(계 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계 21: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계 21:9)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계 21:10)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계 21:11)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계 21:22) 성 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계 21: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계 21:24)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
(계 21:25) 성문들을 낮에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는 밤이 없음이라
(계 21:26)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겠고
(계 21: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
이는 교회가 주님의 그 사역을 온전히 실천할 때만 교회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교회의 가장 최소단위가 바로 ‘나’이다. 따라서 나라는 존재는 온전히 주님의 그 사역을 감당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것이 주님의 신부로서의 내가 감당해야할 사명인 것이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죄인을 부르시기 위해서였다.
(마 9:13, 개역)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막 2:17, 개역)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눅 5:32, 개역)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이제 그 사역이 내게로 넘겨졌다. 구원받을 자를 부르는 그 일을 내가 온전히 감당할 때 나는 비로소 주님의 신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여 주님의 온전한 신부의 자리에 서는 것은 나의 의지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전혀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는 늘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기도를 하여야 한다.
하나님이 아담의 배필로 허락하신 하와는 그의 자리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하나님의 도우심을 늘 구하는 삶을 살아야만 했다. 그러나 하와는 이 일을 경히 여겼다. 성경의 기록에는 그녀가 선악과를 따 먹는 그 순간 그 자리에 하나님이 아니 계셨다. 이는 그녀가 하나님께 늘 함께 해달라는 기도를 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은 하와는 결국 아담을 돕는 배필의 자리에서 이탈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오늘 우리도 주님의 신부자리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기도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주님이 내 마음에 들어와 좌정하시고 기뻐하실 수 있도록 우리가 신부된 자로서의 그 역할, 그 사명을 온전히 감당해 내는 우리가 되자.
(요약)
“당신은 진실로 주님의 참 신부입니까?”
하나님이 아담에게 그의 신부로 하와를 지어주셨다.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한 것은 하와가 온전히 그를 돕는 배필이라는 고백이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 아담에게 베푸신 가장 큰 선물이 하와였다. 그 큰 선물인 하와는 온전히 아담을 돕는 존재였다. 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요 하나님과 늘 함께 하는 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남편을 유혹해 범죄한 자의 자리에 이르게 하는 그 때의 하와는 아담에게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인 존재가 되는 자리에서 떠나 있었던 것이다. 참된 신부의 자리에서 떠난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편한 곳이 집이다.
집이란 아내가 있는 곳이요, 남편이 있는 곳을 말한다. 힘든 몸이 쉴 곳은 바로 아내가 있는 곳이란 의미이다. 가정이 마음의 평화를 누리며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곳이 되는 것은 부부가 하나님 안에서 한 마음을 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한 마음으로 하나님 안에 거한 때는 그 가정이 에덴에 있었다. 그러나 하와가 하나님이 허락하신 돕는 배필의 자리, 즉 신부의 자리에서 떠나 있었을 때, 그 가정은 더 이상 에덴에 머물지 못했다. 신랑과 신부가 하나님을 떠나 서로 다른 마음을 품으면 그 가정은 에덴에서 지옥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세례요한은 직접 주님을 신랑으로, 부름 받은 우리를 신부로 표현하고 있다.
(요 3:29, 개역)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신랑과 신부는 결혼을 통해 한 몸이 되도록 하나님이 정하셨다. 이는 하나님이 하신 일이요 사람이 정한 일이 아니다. 따라서 이 법칙은 영원하며, 변함이 없을 것이다. 택하심을 입은 자가 주님의 신부라는 것은 주님과 한 몸을 이루야 한다는 것을 함의 한다. 주님과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은 주님과의 신비적 연합을 이룸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계에 들어간 자는 그 생각과 뜻이 온전히 주님의 그것과 일치해야 한다. 택함을 입은 자에게 있어서 이 신비적 연합은 그가 임의적으로 분리하는 것이 불가하다.
오직 택함을 입은 자가 할 도리는 한 몸을 이룸으로써 행해야 할 그 일을 하는 것이다. 그의 생각 속에는 이 관계를 청산할 마음이 티끌만큼이라도 없어야 한다. 그의 생각 속에는 신랑 된 주님이 원하시며 기뻐할 일만을 생각하고 그것을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이 신부된 자의 마땅히 할 바, 그 도리인 것이다.
주님이 택하신 제자들, 그들은 대표적으로 주님의 신부로 택함을 입은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각기 그 생각이 달랐다. 신랑이신 주님이 구속사역을 감당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으므로 신부된 그들은 마땅히 그 일을 돕는 배필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했어야만 했다. 그러나 이 사역을 돕는 신부 되게 하시려고 부르심을 받은 그들은 오직 세상의 욕심으로만 주님을 따랐다. 신랑 되시는 주님과 신부되는 제자들은 이처럼 생각이 달랐다. 이때의 심정을 주님은 인자가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표현하셨다. 마음을 두고 쉴 곳이 없었던 주님의 그 외로움을 누가 이해했을까. 주님의 제자들처럼 세상과 합하여 음란한 일을 행한 우리도 또한 버리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신부의 자리에 세우시는 주님의 그 완전하신 사랑을 우리는 아는가.
오늘 우리의 생각도 그 제자들과 같다면 여전히 외로우실 주님이신 것이다. 우리의 생각을 주님의 그 생각에 초점을 맞출 때 비로소 주님은 내 마음에 좌정하실 수 있게 될 것이다. 주님을 내 마음의 주인으로 모신다함이 바로 이것이다. 내가 내 마음의 주인의 자리에서 내려오고 그 자리에 주님을 모시는 것이 믿는 자의 마땅한 도리라고 하는 것은 이 같이 주님의 뜻에 따라 그 사역을 감당해 낼 때 비로소 가능해지는 일이다.
신부의 자리에 끝까지 붙들어 세워주신 그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신부로서의 그 본분을 다하는 삶을 살아내려고 노력하는 자에게 은혜 베푸시는 하나님이심을 하나님은 룻을 통해 보여주셨다. 시모를 부양하기 위해 과부의 몸으로 늦게까지 먹을 것을 구하는 그 삶이 행복하다고 보여 졌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성심성의껏 시모를 모셨다. 그런 룻이 이상적인 신랑, 보아스를 다시 만나고 결국은 주님의 조상이 되는 그 큰 은혜를 받았다.
주님의 신부로 부름 받았던 그 제자들이 변화되어 진실로 주님의 신부로서의 사명을 감당했던 그 사도들의 시대에 놀라운 역사가 시작되었다. 사도들이 말씀을 전하니 믿는 자가 남자만 오천이나 되는 놀라운 전도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제는 그 사도들의 시대가 지나고 우리가 주인공이 되는 교회 시대가 되었다. 성경은 분명히 교회를 주님의 신부로 묘사하고 있다. 이는 교회가 주님의 그 사역을 온전히 실천할 때만 교회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교회의 가장 최소단위가 바로 ‘나’이다. 따라서 나라는 존재는 온전히 주님의 그 사역을 감당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것이 주님의 신부로서의 내가 감당해야할 사명인 것이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죄인을 부르시기 위해서였다. 이제 그 사역이 내게로 넘겨졌다. 구원받을 자를 부르는 그 일을 내가 온전히 감당할 때 나는 비로소 주님의 신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여 주님의 온전한 신부의 자리에 서는 것은 나의 의지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전혀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는 늘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기도를 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