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장로교회 2017. 6. 11.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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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비유

1) 누룩의 비유

(13:33)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왜 천국을 비유로 말씀하실 때 가루 서 말 속을 부풀게 한 누룩이라 하셨을까.

 

혹자는 가루 서 말은 여인이 하루에 구울 수 있는 빵의 분량에 해당하는 양이거나 또는 그 때 당시 10명 정도의 한 가족이 하루를 먹을 분량이기에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보기보다는 가루란 그 알갱이가 수 없이 많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말로 이해해야 한다. 3이란 하나님을 상징하는 숫자로 보아 그런 가루가 서 말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란 의미로 보아야 한다. 가루 한 말도 셀 수 없을 만큼이나 많음을 상징하는데, 서 말이니 오죽 많을까. 이런 정도를 하나님이 구원받을 백성으로 선택하셨다는 의미이다.

 

누룩이 처음 들어가는 순간에는 그 가루의 얼마가 발효되었을까. 아마 거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일 것이다.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실 당시에 이 말씀을 알아듣고 천국을 사모한 자가 얼마나 되었을까. 그러나 그 많은 가루의 알갱이가 끝내는 모두 발효가 된다. 주님은 그 서 말의 가루가 전부 부푼다고 하셨다. 택함을 입은 자는 한 사람도 낙오 없이 모두 믿음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변화를 입어 구원에 이를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이다. 이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우리를 구원받을 자로 선택해 주시고, 그 택함을 입은 은혜로 우리 모두가 온전히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그 하나님의 은혜에 우리도 온전한 감사를 드리자.


2) 선택된 자의 믿음의 자세

(13:36) 이에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사 집에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밭의 가라지의 비유룰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

지금 주님 앞에서 이 비유의 말씀을 듣고 있는 자들은 처음부터 예수를 만나러 온 많은 무리들의 그 사람들이 아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비유의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를 간절히 알기를 원해 주님께로 나아온 소수의 그 무리들이다. 세상적인 욕심으로 주님께 온 자들을 모두 돌려보내시고 진정으로 주님의 그 말씀을 알기를 갈구하는 자들만을 데리고 그 집으로 다시 돌아오셔서 그들에게 비유의 말씀을 풀어 가르치셨다.

 

주님이 말씀을 사모하는 자들을 데리고 그 집으로 돌아오신 것은 택함을 입은 자들과 주님이 천국에서 함께 하실 것을 암시한다. 택함을 입은 그들은 말씀을 사모하는 열정, 천국에 대한 소망을 드러내보였다. 이는 택함을 입은 자들이 마땅히 취할 바, 그 도리이다. 주님께서는 그 소수의 택함을 입은 자들에게 말씀의 은혜를 온전히 베푸셨다. 주님의 이 온전한 은혜 베푸심은 그들의 말씀을 사모하는 그 열정에 대한 선물이었다.

 

내게는 그 소수의 무리들과 같은 말씀에 대한 사모하는 열정이 있는가? 진정으로 천국을 소망하는가?

소수의 그 무리들의 믿음 행위는 택함을 입은 자가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해 반드시 협력적 순종을 하여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택함을 입었다고 그냥 가만히 있으면 성령이 역사할 수 없다.

 

과연 우리도 성령이 역사하시도록 협력적 순종을 하고 있는가?

우리가 말씀을 들어도 감동이 없고 우리의 신앙생활의 태도에 변화가 없다면 우리는 성령의 역사에 협력적 순종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불순종하는 요나가 귀하게 여겨졌던가!

그 순간 하나님이 그를 기뻐하셨을까. 내가 이 요나와 같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가슴 아파하실까. 우리의 사는 목적이 주를 영화롭게 하는 것에 있다고 했으니 적어도 말씀을 사모하고, 그 말씀으로 우리의 믿음의 생활에 전진이 있도록 하여야 한다.

 

3)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

천국은 이와 같이 말씀을 사모하는 자들이 가는 곳이다. 말씀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자들에게는 결코 천국이 허락되지 않는다. 택함을 입지 못한 자들의 공통된 모습이 말씀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말씀이 귀찮은 것, 성가신 것, 무기치한 것 정도로 여겨진다. 주님은 이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아셨기에 주님을 찾아 모여든 그 큰 무리의 사람들을 돌려보내고, 소수의 주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자들만 데리고 집으로 오셔서 더 많은 천국에 대한 비유의 말씀을 베푸셨다. 그리고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 같다고 하셨다.

 

(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이스라엘은 랍비 율법에 따라 밭에서 보화가 나오면 그 보화는 그 밭의 주인의 소유가 되게 한다. 팔레스틴 지역은 약탈이 빈번해 보화를 밭에 묻어두는 경우가 흔하다고 한다. 그러나 한 사람이 밭에서 보화를 발견하기가 쉬울까. 그가 보화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 보화가 발견될까.

 

천국도 사람이 가려고 노력해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인 것이다. 사람이 밭에서 보화를 발견하는 것은 행운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가능한 일인 것이다. 천국도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가능한 일이다.

 

그런 천국을 보화로 비유한 것은 천국이 그처럼 고귀한 곳이란 뜻이다.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값진 곳, 그곳이 천국이다. 그러기에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산 것이다. 이는 그가 그 땅에서 가진 것 중에서 천국보다 귀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 보화를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그 밭을 사는 일을 기뻐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이 천국을 그처럼 귀하게 생각하고 있는가. 자신의 모든 것을 아끼지 않고 팔아서 살만큼 귀하게 생각하는가. 사업하는 것을 더 중히 여기기에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포기하고, 가족과의 여행을 더 소중히 여기기에 또한 주일예배를 포기하는 우리들이 아닌가. 이런 우리는 결코 보화가 숨겨져 있는 그 밭을 사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파는 일을 기뻐한 그 사람이 될 수 없다. 복음의 말씀이 이 보화와 같은 것이다.

 

4)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의 비유

(13:45)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13:46)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여기서의 상인은 일반적인 물건을 취급하는 자가 아닌 진주만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전문가이다. 이는 천국에 대한 지식을 갖춘 자를 의미한다.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어 그 천국에 대해 많은 지식을 소유하고 있는 자이니, 이는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갖고 사는 우리와 같은 믿는 자를 상징한다.

 

진주에 대해 너무 잘 아는 그 상인이 오직 하나뿐인 극히 값진 진주를 만났다. 천국이 이런 곳이다. 또 다른 데가 있는 천국이 아니다. 오직 하나뿐인 천국이요, 그 소중함은 비교될 것이 없다. 상인에게는 자신의 소유 중에서 이보다 소중할 것이 없었다. 그래서 소유한 것을 모두 다 팔았다. 하나도 남김없이. 그런데 왜 우리에게는 이 천국보다 소중한 것이 여전히 있는가?

 

5) 그물의 비유

(13:47)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13:48)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

(13:49)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13:50)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주님께서 가라지의 비유에 이어서 그물의 비유로 최후의 심판 날에 대해 말씀하셨다. 마지막 날에 대해 두 번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이 심판의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확정적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사람들은 이 날에 대해 너무나도 안일하게 생각한다. 그 날을 거의 모두가 막연하게 생각한다. 아무도 그날에 대한 경험이 없으므로 사람들의 사고 속에 그 심판의 날은 자리 잡고 있지 못한 것이다.

 

가라지에 대한 비유의 말씀은 그곳에 모인 무리들 모두에게 베푸신 말씀이지만 그물의 비유는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만 베푸신 말씀이다. 이렇게 거듭 말씀하심은 택함을 입은 우리들조차 마지막 날에 대해 막연히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주님은 아시기에 택한 자들에게는 두 번이나 말씀하심으로 강조하신 것이다. 분명히 기억하여 그날을 준비하라는 것이다.

주님의 이 경고의 말씀을 새겨듣고 그 날을 준비하는 우리가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