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다스리라’라고 하심에 관하여(1)
2025. 5. 25. 영동장로교회 최규만 목사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다스리라’라고 하심에 관하여(1)”
성경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던 날에 그 창조하신 것들을 다스리게 하실 목적으로 사람을 지으셨다고 언급하고 있다. 인생의 존재 목적, 즉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신 후에, 가장 먼저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라는 사명을 분명하게 주셨다.
이는 그들에게 명하신 첫 번째 사명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땅을 정복하라”라고 명하셨다. 마지막으로 명하신 것은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라는 것이었다.
(창 1: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사람이라면 창조자의 이 세가지 명령을 기억하고, 평생에 이 명령을 따르며 살려는 노력을 해야할 의무 하에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지음을 받은 자는 지은 자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그것을 행하는 것이 도덕적으로도 옳은 일일 것이다.
요즘 휴머로이드가 핫이슈로 등장했다. 어쩌면 다가오는 미래는 이들이 인간을 대신하는 사회가 될 것이다. 그런데 이 휴머로이드가 인간의 뜻과는 다르게 자기들 마음대로 행동한다면 어떻게 될까?
휴머로이드를 만든 사람은 한 목적을 가지고 그것을 만든다. 따라서 그 휴머로이드는 만든 사람의 목적인 그 뜻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인간의 뜻과는 반대되는 행동을 한다면 그 휴머로이드는 오작동한 것이니 당연히 폐기 대상이 되고 만다.
마찬가지로 창조자의 뜻에 따라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당연한 도리요, 도덕적 의무가 될 것이다. 성경의 기록에서는 창조자의 인간에게 부여한 사명을 언급하기 전에 먼저 ‘복’이라는 말이 언급되고 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이 ‘복’이란 무엇이며, 왜 사명보다 먼저 언급이 되어 있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보통의 답변은 이 복이 단순한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에게 맡기신 창조적 사명 세 가지를 감당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권한이자, 능력으로서의 복이라고 말한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첫 번째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말씀에 따른 생명의 복으로서, 생명을 낳고 키울 수 있는 능력, 즉 가정을 이루고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는 축복을 말한다고 한다.
이 의미 속에는 인간만이 단순한 번식이 아니라 인격적 사랑과 돌봄을 통해 가정을 세우는 존재가 되는 그 복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 복은 정복하여야 하는 사명의 복인데, 여기서 ‘정복’은 파괴적 의미가 아니라, 자연 세계를 질서 있게 관리하고 돌보는 통치권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신 후, 인간에게 그 위탁 관리 책임을 주신 것인데, 이 입장에서는 인간은 ‘청지기(steward)’이다.
(딛 1:7)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득을 탐하지 아니하며
(벧전 4: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세 번째 복은 다스리라는 말씀에 따라 주어진 권위의 복이다. 이 복으로 인간은 생물과 자연 세계를 다스리는 책임 있는 리더십의 축복을 받음이다. 다스린다는 것은 폭군적 지배가 아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창조 질서를 보존하고 회복시키는 통치를 말한다.
그런고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복이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아,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생명을 누리고, 자연과 세계를 책임 있게 관리하며, 하나님의 뜻을 땅에서 구현해 나갈 수 있는 존귀한 사명과 권한을 부여받은 것을 말한다.
따라서 성경이 말한 ‘복’이란 단지 물질적 축복이 아니라, 존재 목적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이자 책임으로서의 그 ‘복’이라 할 것이다. 그래서 사명 그 자체가 ‘복’인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복이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이런 정도의 복으로만 한정하여 말씀하셨을까?
적어도 나는 이 ‘복’에 관해서 묵상할 때 반드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지으신 그 자체가 ‘복‘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으면 이러한 세 가지의 복이 그 의미를 가질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과연 우리가 죄인 된 상태에 머물던 그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그 생육을 이룰 수 있었을까?
또 죄인으로서의 우리는 참된 정복과 다스림을 이루어 낼 수 있었던가?
우리가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도록 창조해주신 그것이 우리에게 있었기 때문이며, 그래야 그것이 진정한 복이 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복에 대한 깨달음이 가장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죄인인 상태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더라면 이 복에 대한 참된 의미를 바르게 깨달을 수 있었을까?
죄인 된 상태란 영적으로 죽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이때는 하나님을 아는 그 지혜가 상실되어 있다. 그 상태에서는 영적으로 죽어 있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다.
(고전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그러니 죄인 된 우리로서는 스스로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우리를 지으신 그 복에 대한 인식을 전혀 갖지 못한다. 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그때의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자의 자리에 서 있음이다. 이 불행을 어이할꼬!
(엡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엡 2: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한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그런 사랑을 베푸시는 자가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자의 자리에서 건져내셨다. 그것이 ’구속‘이다. 가장 불행한 자의 자리는 바로 죄인인 그 자리였다. 구주께서 죄인된 자리에 서 있던 우리를 건져내신 것이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엡 2: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엡 2: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엡 2: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엡 2:4)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엡 2: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하나님의 이 구속 사역은 성자 하나님을 통해 이루게 하시고, 성부 하나님은 이미 영원에서 우리를 구해내실 그 일을 예정하셨다. 이 위대한 사랑이 결국 성령 하나님을 통해 죄로 인해 죽어 있던 영혼을 살리시는 재창조 사역을 행하셨다.
(엡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엡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엡 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딛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새생명을 입었으니, 이제는 능히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을 입은 그 복이 우리에게 다시 임했음을 자각할 수 있는 자리에 섰다. 이 놀라운 복이 다시 우리에게 임한 것이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골 3: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이 복을 자각할 수 있는 새롭게 된 눈을 가졌으니, 우리의 눈에는 드디어 그 세 가지 복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거듭남의 은혜를 입은 자라면 반드시 이러한 세 가지 복을 다시 볼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러면 이제 새롭게 된 눈으로 이러한 세 가지 복을 다시 바라보자.
첫 번째 복이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신 그 복이었다. 이는 많이 낳고 땅에 가득해짐이다. 거듭난 자의 눈으로 바라보면 이 말씀이 이 땅에 단지 사람이 차고 넘치는 그런 것으로만 보일까?
이 땅에 존재하는 인간은 선택된 믿음의 백성과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것으로 드러나는 유기된 믿지 아니하는 자로 구분된다. 그러면 유기된 자의 숫자가 이 땅에 충만해지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실까?
믿음의 백성들이 충만해지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일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생육하고 땅에 번성하게 하는 그 복은 바로 복음을 전파하는 그것으로 이루어질 것이기에,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그것이 곧 우리에게 진정한 복이 되며, 이는 이 시대에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큰 영광이 된다.
(마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애초에 하나님께서 이 땅에 사람이 번성하는 그 복을 허락하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무한하심을 드러내심이었다. 만약 하나님이 그 사랑에서 제한적이며 옹졸하신 하나님이셨다면, 이 땅에 사람이 번성하는 그 복보다는 제한적인 숫자의 사람만 이 땅에 거하게 하셨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크고 헤아릴 수 없기에 그 땅에 차고 넘칠 정도로 ’충만하라‘라고 하신 것이다. 지금까지 이 세상에는 많은 사람이 살다가 갔지만 그 어느 때에도 이 땅이 충만했던 적은 없다.
(시 145:9) 여호와께서는 만유를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
예수께서 우리를 구속하시는 그 사명을 감당하셨으므로 비로소 우리가 새생명을 얻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그 시대가 도래된 이래로 아직도 이 땅은 구원받은 믿음의 백성으로 완전하게 채워진 적이 없다. 충만하라 하신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이다.하나님의 뜻이 아직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다.
현상적으로 바라본다면 불완전하고 불행하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믿음의 눈으로 보면 이 상황은 믿는 자에게 복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비상한 섭리로 볼 수 있다. 이 땅이 아직도 충만하게 채워져 있지 않으니, 우리가 복음을 전함으로써 채울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니 그 일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복이라 할 것이 아닌가!
(롬 11:25)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마 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하나님께서 두 번째의 사명을 발하셨다. 땅을 정복하라는 그 명령은 지으신 사람에게 주어진 사명이 되었다. 사람이 이 사명을 감당하게 될 그때,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그 복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정복한다는 것은 곧 주인의 자리에 섬을 의미한다. 과연 이 땅의 역사에서는 많은 전쟁이 이어졌다. 하나같이 정복하려는 자는 정복하려는 그 땅의 주인 되는 자리를 탐함이었다. 죄로 오염된 세상에서의 정복은 오직 그 한 사람의 탐심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그래서 그 정복은 하나님께서 처음 의도 하신 그것과는 전혀 다른 정복이 되었다.
하나님은 사랑을 그 속성으로 지니신 자이시다. 따라서 하나님 안에서의 그 정복은 분명히 그 땅의 주인 되는 자리에 서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주인 되는 일이 복이 아니라면 무엇이라는 말일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주인 되는 그 자리에 서서 일하라고 명하실 때 “정복하라“라고 명하신 것이다. 만일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을 지닌 자가 그 땅의 주인이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요일 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을 지닌 그가 세상을 정복하는 그 일을 행할 때, 그 일에 사용할 도구로 무력을 동원하는 전쟁이라는 것을 사용할까?
‘정복하다’(כָּבַשׁ, kavash)라는 말은 ‘억압하다’는 의미보다는 ‘다스리다, 질서 있게 하다’라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사랑이신 하나님이 사명자에게 발하신 이 명령에서는 ‘억압하다’라는 그 의미로 해석하기보다는 이어서 명하신 ‘다스리라’라는 말씀과 연계하여 ‘다스리다, 질서 있게 하다’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혼돈 없는 창조 질서를 유지하시듯, 인간이 그 질서를 따라 세상을 다스리는 대리통치자(viceregent)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받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분명히 이 땅을 정복하려고 오신 자이셨다. 그러나 그의 행적에서 우리는 도무지 ”무력을 사용한 전쟁“이라는 것을 찾아볼 수가 없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도구만을 들고 그 일을 해나가셨다. 그리고 끝내는 이 땅을 정복하시고, 왕의 자리에 서셨다.
(요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이는 애초에 하나님께서 이 땅을 정복하라고 사람에게 명하신 그것이 첫 사람 아담에게서는 실패하였기로,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모범을 보이셨던 것이다. 이제는 구원을 얻어 새생명을 입은 믿음의 백성 된 자는 마땅히 이 땅을 정복하는 그 일을 행함으로써 복된 자의 자리에 서야 한다. 이미 예수께서 가장 완벽한 모범답안을 보여주시지 않았는가!
(롬 5: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롬 5: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롬 5:16)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롬 5:17)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롬 5: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요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에게 허락하신 세 번째 복은 ‘다스리라’하신 복이다. 여기서 다스린다는 것은 군림한다는 그것이 아니다. 사람이 죄의 노예로 전락한 시대에서는 사람들은 이 ‘다스리는 일’을 군림하는 것으로 변개시켜 이해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다스렸다.
이 땅의 많은 왕들은 그 백성들 위에 군림했다.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그 뜻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기에 벌어진 비극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다스림의 가장 모범적인 예 역시 예수를 통해 드러내어 보이셨다. 그는 자기의 백성들 위에 군림하지 않으셨다. 지극한 사랑으로 가장 순수한 섬김으로 그 백성들을 다스리셨다.
섬김으로써 다스리신 가장 대표적인 예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사건이다. 제자들 역시 예수를 대신해서 다스리는 자의 자리에 설 자들이었기에 이 다스림의 참된 의미를 몸소 행하심으로 가르쳐 보여주신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종의 형체를 입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가장 낮은 자리에 서셨다. 이런 행위는 당시에 종들 중에서도 가장 천한 자리에 있던 자가 맡던 일이었다. 주인이라면 절대 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참된 주인이신 예수는 그리하셨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었고, 그는 그 사랑으로 그들을 다스리신 것이다.
예수는 이를 통해 “너희가 나를 주라, 선생이라 하니 옳도다. 내가 너희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라며 섬김이 곧 주의 방식임을 가르치심으로써 참된 다스림이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주셨다.
(요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 13: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요 13:3)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요 13: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요 13:5)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요 13:6)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가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요 13: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요 13:8)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요 13:9)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요 13: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요 13:11)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요 13:12)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요 13: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요 13: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요 13: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요 13: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요 13: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두 번째 예는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쭙기를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고 했을 때, 예수께서 섬김에 대해 말씀하신 것에서다.
(막 10:42)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막 10: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막 10: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막 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사도바울은 많은 믿음의 백성들에게 권고하기를 오직 예수의 마음을 품고 믿음의 생활 속에서 다스림을 실천하라고 권면했다. 이는 믿음의 백성들을 바른 믿음으로 인도하고픈 바울의 간절한 소망이 담긴 글이다.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런 글이 나올 수 있었겠는가! 자신이 사랑하는 참으로 귀한 사람들이 그 복된 자의 자리에 서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썼을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마음이 바로 이 마음이다. 진실로 이 마음을 품은 자는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복된 자이다.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 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빌 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빌 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다음 주에 2부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