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서신에서 사도 바울이 고백한 신앙고백에 관하여(3)
2025. 3. 16.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갈라디아서 서신에서 사도 바울이 고백한 신앙고백에 관하여(3)”
율법에서 그 핵심이 바로 하나님의 이 사랑이었다. 그래서 그 사랑을 이스라엘이 율법을 행함으로써 깨달으라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셨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어리석어 오직 율법의 외형만을 행하는 그 일에 매달릴 때,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이 땅에 오셔서 직접 가르침을 베푸셨으니, 그것이 바로 주님의 그 가르침이셨다.
(마 22: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 22: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마 22: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 22: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눅 6:32)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
(눅 6:33)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를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눅 6:34)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빌리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의수히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빌리느니라
(눅 6: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눅 6:36)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도 바울은 이 가르침에 대해 깊이 바르게 깨달았으니, 그의 로마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이에 대한 가르침을 베풀고 있었다. 믿음의 백성된 우리도 주님의 이 가르침에 대해 사도 바울처럼 그렇게 깊이 깨달아야 하지 않겠는가?
(롬 13: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롬 13: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롬 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깨닫지 못하는 그 이스라엘 백성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오늘의 우리가 그 이스라엘 백성과 같다면 그 또한 얼마나 답답한 일이 되겠는가!
(마 22: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 22: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마 22: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 22: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한 율법사가 주님께 물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그들이 율법을 얼마나 외형적으로만 지키려고 애를 썼는지를 알 수 있다. 왜 그들이 외형적으로 그렇게 율법을 지키려고 애를 쓴 것이었을까?
(마 22:34)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마 22:35)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마 22:36)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죄인의 신분으로 태어난 인간은 그 본성에서 자신의 의를 주장하고 싶어 한다. 진실로 의로운 자라면 굳이 자신이 의롭다고 내세울까?
의롭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감추려고 기를 쓰고 의로워 보이려는 것이다. 이는 죄를 범한 아담과 이브가 자신의 부끄러움을 숨겨 의로움을 드러내려 한 그것으로부터 유래한 위선이요 외식이다.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의 죄지은 그 부끄러움을 숨기려고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입었다. 이는 자기들의 그 부끄러움을 감추려고 함이었다.
(창 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이 욕심이 결국 모세가 전하여준 그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은혜에 감사하여 몸을 낮추는 자리에 서려고 노력하는 대신, 스스로 그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의로운 자라 여김을 받는 그 자리에 서려고 한 그들이었다.
그들의 그런 모습을 통렬히 지적하신 예수의 일화가 마태복음에 기록되었는데, 이스라엘의 그런 모습의 예를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는 자“라고 하심이었다.
(마 6:5)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마 6: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사도 바울은 주님을 만남으로써 그의 영안이 열렸다.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에 그가 주님의 음성을 들은 후에 눈이 멀게 되었다. 그리고 후일에 아나니아를 만나게 된다.
(행 9:3)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행 9: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행 9:5)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행 9:6)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행 9: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행 9: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행 9:9)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
아나니아를 만나 안수를 받으매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졌다고 한다. 행함으로써 의로움을 받으려는 율법에 매여 있었던 바울의 그 욕심이 벗겨져 사라짐이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졌다”로 표현되고 있었음이다. 이에 대해 성경에서는 분명히 “예수께서 너로 다시 보게 하셨고, 성령으로 충만케 하셨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행 9: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행 9: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이 사건을 통해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능력과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주시는 은혜라는 것을 깨닫게 하셨다. 우리가 진실로 사랑할 수 있는 자의 자리에 선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다.
(엡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나의 힘과 능력으로 행함에 뒤따르는 그 의를 욕심내는 그 자리에서 내려올 때, 우리에게는 진실한 사랑을 할 수 있는 자리에 서는 길이 열리는 그런 역사가 일어난다. 여전히 내가 의롭다고 고집할 때는 이런 역사는 결단코 일어날 수가 없다. 그때의 이스라엘로서는 이 사실에 대한 깨달음이 있을 수 없었다.
내가 죄인이라는 고백이 없는 한은 이 진리를 깨달을 수가 없다. 내가 의롭다고 하는 생각은 내 생각이 아니라 사탄의 생각이다. 내가 의롭고 내 생각이 여전히 옳다고 여기는 것은 내 속에 사탄이 지배하고 있음이다.
(롬 7:17)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롬 7: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롬 7: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롬 7:20)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롬 7: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롬 7: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롬 7: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롬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주님을 만난 바울은 이제는 더 이상 율법에 매인 자가 아니었다. 율법에 매였다는 것은 오직 자신이 주인이 되어 자기의 의와 노력으로 율법을 이루려는 그 욕심에 사로잡혀 있음을 의미한다. 이때는 그의 내면을 지배하는 자는 자신이 아니라 사탄이다. 그런고로 그는 사탄의 종이다.
바울이 그 진리를 깨달았기에 과감하게 자기의 의를 주장하는 그 자리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이 진리를 깨닫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한 청년이 예수를 찾아왔다. 이 청년은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다 지켰다고 주장했다.
이는 자신이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고, 자신은 마땅히 구원 얻을 자격이 있노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는 율법을 지킴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그 일을 위함인 줄은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 어리석은 그 유대인을 상징하고 있었다.
(마 19: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마 19:17)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마 19:18)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말라, 간음하지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말라,
(마 19: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마 19:20)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마 19: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마 19: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이때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율법을 지키라 명한 것이 사랑을 깨닫게 하려 함이었다는 것을 밝히신 말씀이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였다.
자기가 가진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는 것은 오직 사랑을 깨달은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이 진리를 깨달았기에 그들 중에 부유한 자들은 자기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그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참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달았기에 욕심 없이 자기의 소유를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준 것이었다.
(행 2: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행 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행 2: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그리고 그 청년에게 나를 따르라고 명하셨다. 예수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따를 수 있을까? 예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누구를 사랑한다는 말인가?
주님의 제자들은 예수를 따른 자들이었다. 그러나 주님이 붙잡히시던 그 날에는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여 따른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유익을 쫓아 따름이었다. 그러나 성령의 함께 하심이 임했을 때, 그들은 그제야 비로소 예수를 진실로 사랑하고 따랐으니 순교의 길도 마다하지 않았다.
(막 14:46) 저희가 예수께 손을 대어 잡거늘
(막 14:47) 곁에 섰는 자 중에 한 사람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라
(막 14:48)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막 14:49)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어서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막 14:50)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행 5:40)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행 5:41)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행 5:42)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예수는 하나님이시니 제자들은 그제야 하나님을 사랑한 자리에 선 대표적인 인물이 될 수 있었다. 그처럼 주님께서는 부자 청년에게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율법에 매여 있었기에 근심하고 돌아갔다.
이스라엘은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다. 율법을 지킴은 스스로 자기의 의를 이룸이라고 여긴 것이다. 의를 이룸으로써 의인이 되었기에 그런 의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믿은 것이 율법 아래에 있던 이스라엘의 믿음이었다.
(잠 11:6) 정직한 자는 그 의로 인하여 구원을 얻으려니와 사특한 자는 자기의 악에 잡히리라
(잠 11:7) 악인은 죽을 때에 그 소망이 끊어지나니 불의의 소망이 없어지느니라
(잠 11:8) 의인은 환난에서 구원을 얻고 악인은 와서 그를 대신하느니라
(시 34:17) 의인이 외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저희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
그런데 그런 유대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사도 바울이 주님을 만남으로써 율법의 참된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이전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아끼지 않고 내던져버렸다. 이는 세상을 사랑하던 자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의 변신의 순간이었다.
그때까지 자신이 누렸던 유대교 안에서의 지위와 권세, 그리고 세상적인 부와 명예까지 모두 벗어버렸다. 마치 자기의 몸에서 배설물을 내어다 버림같이 그렇게 미련 없이 벗어버렸다. 하나님을 사랑함이 이 세상의 그 어떤 보화나 세상 복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그에게서 그런 용기가 생겨날 수 있었다.
(빌 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빌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빌 3: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사도 바울의 이 ‘버림’은 갈라디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표현되고 있었다. 율법을 지켜 행함에서 얻는 자기의 의는 이제 배설물 같이 버려졌으니 이를 사도 바울은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라고 고백하고 있었다.
이제 사탄의 세력이 지배하던 그의 내면은 성령 하나님의 함께하심으로 변화되었다.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 되었다. 그러니 그때부터는 바울이 사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사시니 그의 삶은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히 드러나는 삶이 되었다. 그 사랑이 없었다면 소아시아 지역의 그 먼 길을 어찌 세 번이나 선교하는 일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바로 이런 사랑을 위해서였다는 것을 어찌 그리도 이스라엘은 모를 수가 있었는가!
(갈 2: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갈 2: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율법을 행함으로써 의를 이루어 구원에 이르고자 한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었는지를 철저히 깨달은 사도 바울은 이렇게 믿음을 고백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갈 2: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복된 일은 사랑하는 일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의 사랑도 이러하거든 하물며 하나님과의 사이에서의 사랑이란 얼마나 복된 일이 될까!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했고, 우리도 그래서 구원을 사모한 것이 아닌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장 복된 자의 자리에 세우시려고 우리에게 구원하시는 은혜를 베푸신 것이다. 단지 영원히 사는 그 삶만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구원하시려고 한 것은 아니다. 여러분들은 이 말이 참되게 옳다고 생각하시는가?
구원에 대한 이해는 구원이란 단순히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과 사랑에 그 초점을 맞추는 것이라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 성경에서도 구원의 핵심은 하나님과의 사랑과 연합에 있으며, 그 사랑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복된 삶을 누리게 된다고 가르친다.
하나님은 본래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과의 깊은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라는 것을 요한일서 4장을 통해 알 수 있다. 성경은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우리의 죄를 속죄하게 하신 것이라."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요일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와의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구원의 길을 여셨다. 그 사랑이 구원의 근본적인 이유이며, 그 사랑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하여 살아가는 것이 가장 큰 복된 일이자 의미일 것이다.
구원의 목적은 단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온전하게 회복하는 것이다. 우리가 구원을 사모하는 이유도, 하나님과의 진정한 사랑의 관계를 이루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마 22: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 22: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그래서 구속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를 구원하는 한 과정이다.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회복되면, 그 사랑이 우리를 변화시키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만들 것이다. 그렇게 되는 것이 이 땅에 천국을 실현하는 일이다.
(마 6: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 12: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 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