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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친 모세(2부)

영동장로교회 2024. 8. 25. 09:21

2024. 8. 25. 영동장로교회 최규만 목사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친 모세(2부)”

 

 

모세가 이적을 행할 때마다 그의 손에는 항상 지팡이가 들려있었다. 그런 이적들을 경험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연스럽게 모세의 그 지팡이에는 늘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임한다고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모세에게 그 지팡이가 없었다면 어떠했을까?

 

그랬더라면 그는 나일강을 핏빛으로 변화시키는 그 일에서도, 그리고 홍해를 가르는 그 일에서도 모두 말로만 했을 것이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로 이 모든 이적을 이루었을 것이니,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연 모세를 누구라 생각하게 되었을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능력을 베풀어주실 때, 그가 그 베푸심을 입은 능력만으로도 하나님처럼 보이게 될 것에 대해 이미 말씀하셨다. 애굽의 바로가 보기에도 그가 가진 능력은 능히 하나님처럼 보일 만한 그 능력이었다. 바로가 그렇게 볼 정도였으니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에는 모세가 하나님처럼 보일 것은 분명했다.

(출 7: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

 

정말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십계명을 전한 모세를 두려워했다. 모세를 하나님으로 여긴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대리자로서의 그 역할을 함을 보고 두려워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만약 모세가 하나님의 권위를 상징하는 그 지팡이도 없이 말로만 하였더라면 분명 이스라엘은 모세를 하나님이라고까지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출 20:18) 뭇 백성이 우뢰와 번개와 나팔소리와 산의 연기를 본지라 그들이 볼 때에 떨며 멀리 서서

(출 20:19) 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출 20:20)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강림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치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출 34:29)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자기 손에 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출 34:30)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꺼풀에 광채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따라서 그렇게 되었더라면 하나님이 원하셨던 참뜻이 드러날 수 있었을까?

 

어쩌면 이스라엘은 금송아지 우상 대신에 모세라는 그 우상을 만들어 절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엿보이는 한 사건이 있었다. 모세가 산에서 내려왔을 때, 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났다. 이때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이 모습을 보고 숭배할지도 모른다는 그 염려로 자기의 얼굴을 수건으로 가린 일이 있었다.

(출 34:29)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자기 손에 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출 34:30)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꺼풀에 광채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출 34:31) 모세가 그들을 부르니 아론과 회중의 모든 어른이 모세에게로 오고 모세가 그들과 말하니

(출 34:32) 그 후에야 온 이스라엘 자손이 가까이 오는지라 모세가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다 그들에게 명하고

(출 34:33) 그들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웠더라

(출 34:34) 그러나 모세가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함께 말씀할 때에는 나오기까지 수건을 벗고 있다가 나와서는 그 명하신 일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며

(출 34:35)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는 고로 모세가 여호와께 말씀하러 들어가기까지 다시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웠더라

 

그래서 초보 신앙인과 같은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수준에 맞추어 모세에게 지팡이를 들려주셔서 이를 방지 하셨던 것이리라.

그러했으므로 출애굽 한 그 해에 그들에게 생명을 구원하는 그 물을 주실 때에는 모세에게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드리라 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모세의 지팡이는 모세가 우상이 되는 것을 막아주는 동시에 초보 신앙인인 그들의 믿음의 눈높이 맞추어 하나님의 일하심을 드러내는 도구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면 그 반석에서 물이 나오게 하는 일쯤은 당신이 직접 하셔도 되실 일인데, 구태여 모세를 시켜 행하신 것은 또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하나님께서는 선택하신 자로 하여금 어떻게든 공을 세우게 하셔서 그것을 공로로 삼아 상을 주고 싶어 하시는 그런 하나님이시다. 부모 된 자가 자기의 어린아이에게 무언가 좋은 것을 주려고 할 때, 그 아이에게 구실을 만들어 주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그리하신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선택하셨으니 어찌하던지 그에게 놀라운 상급을 베푸시고 싶어 하셨을 것이다. 그래서 틈만 나면 모세에게 그런 기회를 주신 것이다. 반석에서 물이 나오게 하는 그 일도 모세로 하여금 감당하게 하심은 천국에서 모세에게 주실 그 상을 준비하려 하심이다. 모세를 위해 그 상을 준비하실 때, 하나님이 얻으실 그 기쁨을 하나님 외에 누가 알 수 있으리요!

 

이제 세월이 많이 흐르고 그들의 2세가 주축이 된 광야 생활 40년이 다 되어간 그때, 하나님께서는 또다시 그들로 하여금 목마름에 시달리게 하셨다. 이때쯤이면 그들의 믿음도 구원 얻을만한 그 믿음에 도달해있어야만 했다. 구원 얻는 믿음이란 자신의 죄를 구세주 앞에 내어놓고 회개하여 신앙함으로써 칭의에 이르는 그 단계로 나아간 상태일 것이다.

 

여기서 그 구세주란 예수일 것은 분명하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천지를 지으셨다고 했고, 천지를 지은 그 일을 ‘말씀’이 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그런고로 이 ‘말씀’이란 곧 성자 하나님이신 구세주 예수를 가리킴이 된다.

 

다시 말해 천지의 지음은 이 ‘말씀’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이 ‘말씀’은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를 가리킴이니, 결국 예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성부 하나님은 천지의 창조를 계획하시고, 그 실행은 당신의 독생자이신 성자 하나님이 되시는 예수를 통해 이루신 것이다.

 

따라서 요한은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선언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만이 구원의 주체가 되실 수 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반석에서 물이 나오게 하라‘고 말하라 하신 그 말씀은, 그렇게 함으로써 구세주가 되시는 성자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에 이르도록 인도하라는 그 명령이셨다.

 

그러나 모세는 말씀으로 물이 나오게 하라는 이 말씀 대신에 자기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침으로써 물이 나오게 했다. 그가 그리한 것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그 일을 성자 하나님이신 주님의 보혈에 의한 그 공로에 의지하도록 하는 그런 인도함이 되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끝내는 자기의 공로, 즉 사람의 노력만으로 구원을 이루어주리라는 그 오만함이 되고 말았다.

 

주의 보혈 외에는 그 어떤 도구나 방법으로도 구원에 이르게 할 수가 없다. 결국 모세의 그 행동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으로 인도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는 일이 되는 것이니, 하나님 앞에 이보다 큰 죄를 지음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믿음이 없노라고 징계하시는 그 말씀을 하셨다. 그 말씀에 따라 믿음 없는 자는 결코 구원에 이르지 못할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 즉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가나안이 바라보이는 땅, 느보산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사건을 보여주셨다.

 

영적 지도자가 하나님 은혜로 어떤 능력을 계속 체험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그 일을 마치 자기가 자기 능력으로 한다고 하는 그런 착각에 빠지게 된다. 우리의 시조 아담도 그랬다. 그 땅을 다스리다 보니 자기 혼자의 능력으로도 다 할 수 있겠다는 착각에 빠졌다.

 

그래서 하나님과 같이 되어보려는 망상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선악을 아는 그 나무 열매를 먹는 일에 도달하게 되었고, 그 열매를 먹음으로써 하나님과 동등되는 그 자리에까지 나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처럼 되기는 고사하고 죄인의 자리에 떨어지는 일만을 결과하고 말았다.

(창 3: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창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창 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창 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같은 자들이 저지른 그런 잘못에도 불구하고 그 실수나 잘못을 더 큰 은혜로 바꾸심으로써 그들에게 맡겨진 믿음의 백성들에게는 복을 내리신다. 이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그 하나님의 속성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영적 지도자의 잘못에 대해서는 반드시 책임을 물으신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에 따른 그 처사이시다. 영적 지도자라면 이 엄중한 책임 물으심에 대한 두려움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요즘 이 시대에는 겁이 없어도 너무나도 겁이 없는 영적 지도자들이 너무나도 많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을 가리켜 영적 지도자라 주장한다.)

 

어쩌면 모세가 두 번이나 반석을 친 것은 그의 누이 미리암이 죽은 그 충격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너무나도 깊은 슬픔을 당하였는데, 그 백성들은 그런 모세의 심정도 모른 채 자신들의 이기심에 따라 모세를 원망하고 있으니 그로서도 부아가 치밀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화를 참지 못하고 반석을 두 번이나 쳤으리라.

(민 20:1) 정월에 이스라엘 자손 곧 온 회중이 신 광야에 이르러서 백성이 가데스에 거하더니 미리암이 거기서 죽으매 거기 장사하니라

(민 20:2) 회중이 물이 없으므로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공박하니라

 

그러할지라도 영적 지도자라면 개인적인 입장에 따라 사무를 처리하는 것은 하나님의 용납을 받을 수가 없다. 더 엄중한 책임을 하나님께서는 요구하시니, 이것이 영적 지도자의 고독함이다. 모세에게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심의 그 판결이 영적 지도자에게 요구하시는 그것이었으니, 이 일은 영적 지도자의 책임이 그만큼 엄중하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영적 지도자라면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 깊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타성에 젖은 자기의 생각과 방식에 따르려고 하는 그 관성을 철저히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이 순간의 모세는 그러하지 못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으로만 반석에 명하여 물을 내라 하셨다. 그러나 모세는 지난번에 지팡이로 반석을 쳐서 물을 낸 그 방식 그대로 물을 내려고 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못함이었고, 오직 자기의 생각과 습관에 따른 그 행동이었다. 이는 신앙의 타성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똑똑히 보여준 사건이 되었다. 우리가 경계하여야 할 것이 바로 이 신앙의 타성이다.

 

그러면 왜 이 순간에는 하나님께서 지팡이로 반석을 쳐서 물을 내라고 하신 이전의 그 방식이 아닌 말씀만으로 물을 내라 하셨을까?

 

모세가 지팡이를 사용한 것은 그때 초보 신앙인이었던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배려였으나, 40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는 성숙한 신앙인이어야 하는 이스라엘에게는 지팡이를 대신하는 새로운 방식이 필요했다. 그것은 그 무엇에 의존하지 말고 오직 말씀만 신뢰해야 한다는 그것이었다.

’말씀‘이 그리스도 예수가 아니던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외에 의지할 것이 무엇이던가!

 

광야 40년을 보낸 지금의 이스라엘은 그 옛날 자신들의 부모와 같은 그런 믿음의 수준이어서는 안된다. 가나안에 들어간다는 것은 구원에 이름을 상징한다. 구원에 이르러야 할 자가 여전히 어린아이와 같은 초보 신앙 상태에 머물러 있다면 그 믿음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 믿음이라 할 수 있을까! 이런 신앙 상태에 머물러 있는 자들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그 심정은 또 어떠하실까!

 

우리의 신앙이 이 순간의 이스라엘과 같은 그 수준이라면 하나님의 그 심정은 또 어떠하실까!

 

보이는 형상에 따르는 그 믿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그것을 바라보는 그 믿음이 되어야 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믿음에 대해 말하기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때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런 믿음을 가르치려고 모세에게 지팡이를 사용함이 없이 오직 말씀으로만 반석에 명하여 물이 나오게 하라 하셨던 것이었다.

(히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히 11: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만약에 우리 중에서도 여전히 모세의 지팡이가 반석에서 물이 나오게 한 그 일이 믿음의 근거가 된다고 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아직 초보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 이제는 모두 장성한 신앙인이 되어서 말씀으로만 반석에서 물이 나오게 하는 그것이 우리의 믿음이 되어야 한다.

(신 8: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마 4: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그러나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믿음의 백성이라 하는 자들 가운데에서도 아직도 모세의 지팡이 같은 외형적인 것에 마음을 두고 있는 자들이 많다는 것이다. 하나같이 대형교회의 그 외형을 보고 교회를 찾고, 외형적으로 그럴듯한 모양을 갖춘 외국 박사학위를 가진 목회자가 훌륭한 목회자라 여기고 따른다.

 

설교 중에 세상의 유명한 자들의 그 말을 인용하면 설교의 품격이 높아지는 듯이 여겨 자주 인용하는 그 일도 과연 주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신 그 말씀에 부합하기나 할까!

우리의 이 모습에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과연 있을 수 있을까!

참되고 진실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는 그 모습을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모세의 지팡이를 의지하지 않고, 오직 말씀만으로 반석에서 능히 물이 나오리라는 이런 믿음의 소유자가 되지 않고서는 가나안 땅에 들어설 자격이 없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목전에 말씀으로만 물이 나오게 하심은 이제 곧 가나안 땅에 들어가야 하는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마지막 믿음의 훈련을 시키심이었다.

 

지금 천국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에게는 과연 이런 믿음이 주어져 있기나 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