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 자에게 임하는 시험과 시련에 관하여
2024. 7. 7 영동장로교회 최규만 목사
“믿는 자에게 임하는 시험과 시련에 관하여”
성품이 온화한 자라면 대개 마지막 순간, 자기의 품을 떠나는 자에 대해서는 자비를 베푼다. 자비란 남을 사랑하고 가엾게 여김이라 한다. 성품이 따뜻한 자이면 그 누구라도 밉든 곱든 자기 품에 품고 있던 자를 이제 영영 떠나보낼 때, 적어도 그를 위해 마지막으로 따뜻한 밥 한 끼 정도는 지어 먹여서 보낼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런 마음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사람의 고운 성품은 하나님에게서 유래한 것이다. 애초에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지음을 입지 않았던가!
하나님은 그 성품이 지극히 선하시다. 따라서 그 형상을 따라 지음을 입은 본래의 우리의 모습은 지극히 선하였다. 죄로 인해 우리의 형상이 파괴되기는 했으나 선택함을 입은 자는 그 형상이 회복되어 그 속에 선함이 생겨난 것이다.
(창 1: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엡 4: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엡 4:23)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엡 4: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분명히 하나님은 선하시며, 또한 그 성품도 완전하시고 거룩하시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은 본래는 선한 존재로 창조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죄로 인해 인간의 그 본래 모습이 파괴되었다. 이 사실에 대해 사도 바울은 그의 로마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확정하여 언급했다.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하지만 선택받은 자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회복될 수 있다.
(엡 4: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엡 4:23)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엡 4: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그래서 자기의 품을 떠나는 자에게 마지막으로 자비를 베푸는 그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분명하니 만일 하나님이시면 하나님도 분명히 그렇게 하실 것이라는 말이 된다. 과연 그러할까?
하나님께서는 선택하신 자뿐만 아니라 선택하지 않으신 자에게도 은혜를 베푸신다. 하나님께서 그리하시기에 선택하시지 않은 자에게도 비를 내리시고, 또 선택하신 자에게 하신 것과 동일하게 햇빛도 비춰주신다. 이를 ‘일반은혜’라 한다.
그런데 그런 일반은혜를 입은 자일지라도 유기된 자는 결국에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다. 마지막에는 지옥으로 가는 그런 자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그가 이 땅에 사는 날 동안에라도 많은 부를 얻게 하시고, 세상적인 영화도 누리게 허락하신다. 그것이 그런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마지막 자비이다.
(마 5: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시 145:9) 여호와께서는 만유를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유기될 그런 자도 사랑하신다는 것인가?
그렇다.
비록 구원에 이르지 못할 악인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악인의 회개를 원하시며, 그들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겔 33:11)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사람이면 누구나 예외 없이 모두 하나님께서 지으신 존재들이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에 의하지 않고 지음을 입은 자는 없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 누구라도 모두를 사랑하실 수밖에 없으시다. 다만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고, 자기 스스로 죽을 길을 선택했을 뿐이다.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하나님은 분명히 선악을 아는 그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죽으리라고 하셨다. 선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를 만드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을 먹고 죽으라고 만드신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징표로 사용하시려고 만드신 것이 선악과나무였다.
(창 2: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참으로 성경은 이 순종의 중요성을 여러 곳에서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삼상 15:22)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그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그것을 아담이 먹지 않아서 죽음에 이를 자가 되지 말기를 바라셨다. 그런데 사람은 하나님의 그 뜻과는 반대로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는 야망을 품었고, 결국은 그것을 먹음으로써 죽음을 선택하고야 말았다.
유기란 하나님께서 스스로 죽음을 향해가기를 원하는 그 사람의 뜻을 그대로 수용해주심일 뿐이었음을 의미한다. 반면에 선택은 죽음을 향해가는 자 중에서 하나님의 깊으신 섭리에 따라 그 얼마를 죽음에서 건져주시기로 정하심이다.
(롬 9: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롬 9: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롬 9: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을 예정하셨음을 증거하는 성경 구절은 에베소서 1장에서 발견할 수 있다.
(엡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엡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선택하여 살리시기로 한 그 예정에 대해서는 요한복음에서 찾을 수 있다.
(요 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이때 하나님께서는 전지하시니 그 선택할 자가 장차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구주를 믿음으로 영접할 그것을 내다보시고 그자를 선택하신 것이냐, 아니면 아직 믿음을 고백하지 않은 그 상태에서 먼저 선택해 주셨느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단언컨대 하나님께서는 아직 믿음을 고백하지 않은 그 상태에서 이미 영원에서 그를 구원할 자로 선택하셨다고 나는 믿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기 때문이다.
(엡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만약 그가 장차 믿음을 고백할 것을 내다보시고 그를 선택하셨다면 그의 구원에는 그가 믿음을 고백한 그것이 자신의 공로가 될 수 있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구원 얻음이라는 대전제에 위배가 된다.
따라서 그가 아직 믿음을 고백하지 않은 그때 죄인인 그를 영원에서 구원할 자로 선택해 주셨다. 그를 구원할 자로 선택하셨으니 그에게 성령의 은혜가 임하여져서 중생한 자가 되고, 중생한 자로서 자신이 죄인임을 자각하고 그 죄를 회개하니, 이 회개는 비록 자신이 했다고 할지라도 그 회개를 할 수 있도록 중생함을 입혀주신 것은 전적으로 온전한 하나님의 은혜였다.
(딛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딛 3:6)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
(딛 3:7)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래서 선택된 자는 하나님께 그 생명의 빚을 진 것이다. 유기된 자일지라도 그 역시 이 땅을 사는 날 동안 하나님의 은혜의 빚을 지기는 마찬가지이다. 그가 이 땅에서 넉넉히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얻는 것이 어찌 자기의 능력일 수 있겠는가!
(고전 4:7)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
대부분 사람은 자신이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구하는데, 자기가 돈을 지불하였으니 얻은 그것이 당연히 자기의 소유라 여긴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만약 이 땅에 곡식이 전혀 없다면 어찌 그 돈으로 곡식을 살 수가 있겠는가!
온통 사막뿐인 곳에 있다고 상상하면 그 사막에서 아무리 많은 돈을 주더라도 곡식을 얻을 수 있겠는가?
(신 8:18)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약 1:17)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우리가 돈을 주고 곡식을 사는 것도 하나님께서 그 곡식이 이 땅에 생산되도록 하셨으니 우리가 얻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 땅에서 유기된 자가 곡식을 구하고, 입을 것을 구할 수 있게 하신 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심이다.
(시 145:9) 여호와께서는 만유를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
그들이 이 사실에 대해 알지 못하고, 감사하지도 못하는 것은 그들이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그 사실에 대한 직접적이며, 결정적인 증거가 된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구원을 얻지 못하는 것은 그들 스스로가 원한 결과이다.
(롬 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요 3: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따라서 그들이 “누구는 구원을 얻어 영생하는 복을 누리는데 어찌해서 우리는 유기하시는가!”하고 따질 수가 없다. 죄인들 중에서 구원하여 살리실 자로 선택하시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관한 일이다.
(롬 9:20)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롬 9: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롬 9:22)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롬 9: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요 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데 어찌하여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여 살리실, 선택된 자에게 이 세상에서 그토록 고난을 당하게 하시는 것인가?
두 아들이 있다고 하자.
한 아들은 곧 먼 타국으로 떠나고 다른 한 아들은 남게 된다고 하자. 그러면 그 아비는 멀리 떠날 아들에게는 최선을 다해 좋은 것으로 챙겨줄 것이다. 떠나게 되면 아비로서 그에게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아비는 그 남은 아들에게는 더 많은 것을 요구할 것이다. 예를 들면 공부도 더 많이 시키고, 운동도 더 많이 시킬 것이다. 그런 일들은 그 아들을 위해서 아비로서 마땅히 할 일들이기에 그리한다. 유기된 자는 전자의 아들과 같은 예이다. 아비가 그 아들에게 베푼 그것들은 통상적으로 말하는 ‘일반은혜’에 해당한다. 구원받지 못할 자가 이 땅에서 얻어 누리는 복이 그것이다.
반면에 후자에 해당하는 아들의 경우는 선택받은 자에 해당한다. 그는 아비와 함께하는 삶을 살기에 그 아들을 위해 필요한 것을 그에게 더 많이 훈련시킴이다. 선택받은 자는 이 땅의 삶이 전부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함께할 천국에서의 삶이 더 중요하다.
천국에서의 삶이란 하나님과 함께하는 그 삶이다. 늘상 하나님을 대면하는 그 삶이다. 구약 시대에 누구라도 하나님을 대면하면 곧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하나님은 지극한 선이신 반면에 인간은 모두가 죄인이기에 선과 악은 결코 상종할 수가 없다.
그래서 죄인인 자가 하나님을 대면하면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늘상 하나님을 대면하여야 하는데, 그때도 여전히 죄인인 상태에 있다면 어찌 되겠는가!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서 의로워지는 그 훈련을 받음이 대개 우리에게 시련으로 드러난다. 죄인이 그 죄를 벗어버리는 그 일이 어디 쉽고 간단하겠는가!
벗기 힘든 죄의 형태일수록 그 죄를 벗어버리는 그 훈련은 혹독할 것이다. 이 훈련과정을 이름하여 ‘성화’라고 한다.
(히 12:10)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히 12: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히 12:12)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히 12:13)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벧전 1: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벧전 1:16)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선택된 자에게 다가오는 시험과 시련은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요, 복이다. 그러하기에 야고보 사도는 시험을 당할 때 기뻐하라고 가르쳤다.
(약 1: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약 1: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이 구절은 시험과 시련이 우리의 믿음을 강하게 하고, 인내를 키우는 성화 과정임을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시험과 시련이라는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 베푸심인 줄로 알면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의 편지글에서 이 사실을 가르치고 있다.
(빌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렇지만 이 시험과 시련 당함이 쉬울쏜가!
말로 할 수 없는 고통과 역겨움도 따를 것인데, 이 사실을 잘 아는 야고보 사도는 우리를 향해 이렇게 위로의 말을 전하고 있다.
(약 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이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약 1: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시험이란 통상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시기로 정한 자를 다시 죄에 빠지게 하실 수는 없다. 따라서 선택된 자에게 다가오는 그 시험은 넘어지게 하는 그 시험이 아니라 믿음을 더욱 견고케 할 그 훈련일 뿐이다.
그러므로 선택된 자에게 허락된 그 시험은 그의 믿음을 더욱 견고케 해줄 하나님의 은혜로 주시는 그 훈련이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분명히 밝히기를, 그 시험의 훈련은 능히 감당할 수 있다고 공언했다. 하나님께서는 감당할 수 없는 그런 정도의 시험은 하시지는 않는다고 했다.
(고전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그러므로 그 시험이나 고난이 오더라도 우리는 겁먹을 이유가 없다. 그것은 우리가 능히 감당할 정도의 것이니, 만약 그것을 이기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게으른 탓이다. 부지런히 그 시험을 이겨내어 보려고 힘을 써야 한다. 그때는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실 것이다.
(약 1: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약 1: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약 1: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약 5:11)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시 42: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