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링크 클릭하면 재생됩니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다고 하신 그 뜻은?

영동장로교회 2024. 5. 12. 09:46

2024. 5. 12 영동장로교회 최규만 목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다고 하신 그 뜻은?”

 

 

 

이방 여인인 가나안 여인과의 대면에서 예수께서는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대로라면 예수는 오직 이스라엘만을 구원하시려고 오신 메시야라는 말이 아닌가!

(마 15:21)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마 15: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마 15: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마 15:2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우리가 아는 예수는 이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오신 메시야가 분명한데, 어찌 당사자이신 예수는 그렇게 말씀하신 것일까?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눅 19: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눅 19: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분명히 여기에는 어떤 심오한 뜻이 담겨있는 것임에는 분명하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예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고서는 그 이방 여인의 간구에 뒤늦게 응답하신 이 장면은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을 바르게 훈련 시키려는 그 의도에서 시작된 일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모두 유대인들이었다. 유대인들이라면 반드시 메시야가 자기들을 구원하러 오실 것이라고 믿었다. 그 믿음이 그들의 후손에게 그대로 대물림 되었으니 그때의 유대인들도 그렇게 믿었다.

 

그들에게 그 믿음이 생겨난 것은 구약에서 오실 메시야를 예언하고 있음에 따른 결과일 것이라 여겨진다. 특히 미가서 5장 2절에서의 메시야에 관한 예언은 그 메시야가 자신들만을 위해서 오실 것이라는 그 믿음을 공고히 해주기에는 부족함이 없었을 듯했다.

(미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의 오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에서는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끝까지 이르게 하리라”고 하심으로써 이방인에게도 구원을 허락하실 자로 오실 것이 분명히 교훈 되어 있었다.

(사 49:1) 섬들아 나를 들으라 원방 백성들아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내가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가 어미 복중에서 나옴으로부터 내 이름을 말씀하셨으며

(사 49:2) 내 입을 날카로운 칼 같이 만드시고 나를 그 손 그늘에 숨기시며 나로 마광한 살을 만드사 그 전통에 감추시고

(사 49:3)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나의 종이요 내 영광을 나타낼 이스라엘이라 하셨느니라

(사 49:4) 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히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 하였도다 정녕히 나의 신원이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응이 나의 하나님께 있느니라

(사 49:5) 나는 여호와의 보시기에 존귀한 자라 나의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셨도다 다시 야곱을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하시며 이스라엘을 자기에게로 모이게 하시려고 나를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자기 종을 삼으신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사 49:6) 그가 가라사대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오히려 경한 일이라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메시야가 이방인도 구원하실 것은 오직 하나님의 그 성품에 따른 결과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사랑하심에 대해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라고 밝히심으로써 드러내셨다.

 

그런 사랑의 하나님이 오직 이스라엘만 사랑하신다면 그 사랑은 편애이니 완전한 사랑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완전하시니 그 사랑 또한 완전하실 것이다. 그러하기에 편애함이 없이 이방인을 또한 사랑하셔서 구원하실 것은 분명한 사실이 된다.

(사 49:14)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사 49:15)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사 49:16)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사 49:17) 네 자녀들은 속히 돌아오고 너를 헐며 너를 황폐케 하던 자들은 너를 떠나가리라

(사 49:18) 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그들이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 네가 반드시 그 모든 무리로 장식을 삼아 몸에 차며 띠기를 신부처럼 할 것이라

 

그러나 이사야의 그 가르침에 대해 이스라엘은 게을렀다. 말씀을 깊이 묵상하여 바른 깨달음을 얻는 대신에 말씀을 흘려듣고 자신들의 귀에 달콤한 그 말씀만 들으려고 했다. 그래서 그 당시 유대인들의 생각에는 메시야란 자신들만을 구원하려고 오셔야 하는 구원자가 되고 말았다.

 

예수의 제자들 역시 모두 유대인들이었으니 그들도 당연히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런 그들은 자기들의 선생이신 예수를 단지 그들이 기다린 메시야라고만 믿고 따랐던 것이다.

 

따라서 자신들이 메시야라고 믿고 따르는 자신들의 선생이신 예수는 오직 유대인들만을 위해서 일하시는 자라고 생각했다. 만약 그들의 생각대로 예수가 유대인들만 구원하는 그 일을 하신다면 예수는 우리가 믿는 구원자 예수가 될 수 있겠는가?

 

메시야가 오실 것을 예언한 이사야 선지자의 그 글에서 메시야는 이방인을 위해서도 오시리라고 분명히 언급했는데도 그들은 그 말씀을 도무지 기억하지 못했다.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그들이었으니 이사야의 그 말씀이 눈에 들어올 리가 있었겠는가!

 

그들이 말씀을 바르게 인식하지 못한 이것은 겸손한 자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받을 수 있는 은혜가 주어진다는 것을 분명하게 암시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로 서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자격이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 언제나 자신을 돌아보고 항상 하나님 앞에 더욱 겸비해야 한다.

(약 4: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약 4: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약 4:10)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벧전 5:6)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미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예수께서는 온 세상을 구원하려고 오신 메시야이심을 이 사건을 통해 그들의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각인시켜주려 하심이었다. 그렇게 하심으로 그의 제자들이 온 세상으로 두루 퍼져나가 복음을 전하는 그 일을 하도록 만드시려고 하신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이요 그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진정으로 바라신 그 뜻이다.

 

그러하셨기에 제자들의 머릿속에 유대인들이라면 지니고 있을 전통적으로 내려온 그 생각을 읽으시고, 재촉하는 그들에게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그렇게 대답하신 것이다. 결국 이렇게 말씀하심은 “너희들의 그 생각이 하나님 앞에 옳은 것이냐?”라는 지적의 물음이 되었다.

 

제자들의 입장으로는 구원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그 이방인인 가나안 여인이 감히 메시야이신 예수께 구원을 간청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그들은 예수께서 그녀를 야단쳐서 쫓아버리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생각과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졌다. 예수께서는 그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그 소원을 들어주셨다.

(마 15: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하셨으니 그 순간, 제자들은 모두 놀랐을 것이다. “우리 조상들이 그 옛날부터 고대했던 메시야는 우리 민족 유대인들만을 위한 메시야인줄 알았는데, 이방인에게도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는 메시야였구나!”라는 그 깨달음은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은혜로 제자들이 변화되는 그 계기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행 2:1)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행 2: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행 2:3)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행 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그의 스승이신 예수께서는 말로만 가르침을 베푸신 것이 아니라, 이렇게 몸소 행동으로 실천하심으로써 귀한 가르침을 베푸셨다. 이것이 예수의 교육방식이었다. 믿음의 일꾼된 자라면 주님의 이 교육방식에 따라 제자를 양육해야 한다. 스스로 행함이 없이 말로서만 가르치려는 지금의 그 교육방식은 주님의 그 교육방식에 대한 반면교사가 되고 있다.

 

예수께서 이런 가르침을 베푸신 그때 그 말씀의 이면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적 오만함에 대한 질책도 담겨있음이었다. 그들은 선민으로써 오직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이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에 이를 자들이라고 생각했다. 그 옛날부터 선지자들이 메시야가 오셔서 구원할 것이라고 가르친 그것은 오직 유대인인 자신들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는 그 착각을 하고 산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그 구원의 뜻을 알리는 일을 한 것은 전무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장자의 나라로 세우신 그 뜻과는 전혀 배치되는 일이었으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되지 못했다.

 

따라서 그것을 바로 잡는 일은 하나님의 편에서는 그 어떤 일보다도 우선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땅에 오신 메시야이신 예수께서는 부지런히 그 일을 하셨고, 그 일 중의 하나가 바로 가나안 여인과의 이 일화였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마음을 완악한 대로 두신 것은 보다 분명하게 이스라엘을 장자로서의 그 직분을 감당하는 그 자리에 바르게 세우시는 그 일을 이루려 하심인지도 모른다.

(롬 11: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롬 11:12)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니 이스라엘의 그 마음을 변화시켜 곧바로 주님을 받아들이게도 하실 수가 있으시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리 아니하신 것은 이방인인 우리를 생각하심이었다. 그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그 지극하신 사랑이었다.

 

이스라엘이 주님의 그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핍박했으니 유대인인 그 제자들은 부득불 이방지역으로 나아갔고, 이 사실은 분명히 역사적인 사실이 되었다. 이때 그 제자들이 망설이지 않고 이방지역으로 나아가 복음을 전하여 구원하는 그 일을 행한 것은, 바로 이 순간에 예수께서 이방 여인인 가나안 여인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그 모습을 보고 깨달은 결과였을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이시면서 메시야이시다. 그렇다면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하신 그 말씀 속에는 단지 그런 정도의 의미만 담겨있었을까? 아니면 또 어떤 다른 의미가 담겨있는 것일까?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장자로 세운 족속들이다. 장자는 하나님께서 축복의 통로로 삼으시려고 정하신 자이다. 장자를 통해 하나님의 복이 전해지게 하는 이 방식을 선택하신 것은 이 방식이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잘 알게 하는 방식이기 때문이었다.

(출 4:22)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출 4:23)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려는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더불어 사랑의 교제를 나누시기를 원하는 그 최종적 목표를 이루려 하심이다.

(요일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요일 4: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고후 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고후 5: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이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이 바르게 장자의 자리에 서야만 한다. 이스라엘을 바르게 장자의 자리에 세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그 일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하신 것이었다.

(마 10:5)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어 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마 10:6)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이는 장자를 세워 하나님의 복이 장자를 통해 전달되도록 하려 하심이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이 뜻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주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입고 현재도 주님을 따라다니고 있는 그 제자들도 이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했기에 주님께서 그리 말씀하심으로 “아직도 너희들이 장자로서의 그 사명을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구나”하는 질책을 하심이었다. 이 일을 통해 제자들은 비로소 그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었다. 훗날 베드로는 로마 군대 백부장 고넬료와 그의 가정이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성령을 받는 것을 목격함으로써 그 깨달음이 참임에 대한 확정적 증거를 발견한다.

(행 10:44)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 오시니

(행 10:45)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행 10:46)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행 10:47)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하고

(행 10:48)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하니라 저희가 베드로에게 수일 더 유하기를 청하니라

 

과연 주님의 그 뜻대로 장자가 되는 예루살렘교회가 유대인인 제자들에 의해 세워졌다. 그리고 이 예루살렘교회는 전 세계로 복음을 전하는 중심이 되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 예루살렘교회를 통해 전 세계에 전하여지니 그것이 복음의 전파였다. 드디어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 시작했으니 그것은 장자인 예루살렘교회가 구원의 복을 전하는 그 통로가 됨이었다.

 

오늘 우리도 유대인들처럼 신앙적 우월감에 사로잡혀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는 그 생각은 유대인들의 메시야가 자기들만을 구원하실 메시야라고 믿은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런 우리에게 과연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실까?

 

이제는 우리에게만이 아니라 우리 이웃에게도 구원의 은혜가 미치도록 구원의 손길을 내밀자. 그것이 사랑이요, 복음을 전하는 그 일이다. 복음을 먼저 전하는 그자가 하나님의 장자이다. 하나님께서 장자에게는 두 몫의 복을 허락하셨다.

(신 21:17) 반드시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을 장자로 인정하여 자기의 소유에서 그에게는 두 몫을 줄 것이니 그는 자기의 기력의 시작이라 장자의 권리가 그에게 있음이니라

 

굳이 이 두 몫의 복을 탐내어서가 아니라 오직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로서의 마땅한 도리로서 복음을 전함이다. 그러했음에도 두 배의 은혜의 복을 주시려고 애를 쓰심이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그 사랑이라는 사실을 참되게 이해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