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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영동장로교회 2024. 4. 14. 08:14

 

2024. 4. 14 영동장로교회 최규만 목사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예수께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가르치셨다.

(마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말씀에서의 ‘구하다’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필요한 것을 찾다. 또는 그렇게 하여 얻다”와 “상대편이 어떻게 해 주기를 바라다”이다. 본문에서의 “의를 구하라”라고 한 이 경우에 사용된 ‘구하라’라는 말이 전자의 의미로 사용되었다면 ”구하면 얻을 것이다“의 경우에 사용된 것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경우의 ”의를 구하라”라는 말은 나서서 적극적으로 의를 구하는 능동적 태도를 보여야 하는 그 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런 경우라고 한다면 ‘그의 의’라는 것은 적극적인 자세로 행하면 얻어질 수 있는 것이 된다는 의미의 말이 될 수 있다.

 

만약에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었다면 ”용서를 구하다“와 같은 경우에 사용된 ’구하다‘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의미하게 된다. 이 경우라면 의를 구하는 그 일은 피동적인 입장에서 행해지는 일로서 행하는 자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의를 가진 자가 베풀어주어야 할 일이 된다. 그래서 이 경우의 의를 구한다는 것은 그 의를 지닌 자가 의를 베풀어주기만을 바라는 그 일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 ’구하다‘라는 말을 영어 성경에서 찾으면 ’seek’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seek"은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1. 찾다: 무언가를 찾기 위해 노력하거나 시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I seek the truth"는 "나는 진실을 찾고 있다"라는 뜻이다.

2. 구하다: 무형의 것을 얻기 위해 찾을 때 주로 사용된다. 예를 들어, "I am seeking legal advice"는 "나는 법률 조언을 얻으려고 찾고 있다"라는 뜻이다.

3. 요청하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요청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We seek advice from wise teachers"는 "우리는 지혜로운 선생님들에게 조언을 요청한다"라는 뜻이다.

 

참고로, "seek"은 "search"와 "find"와 비슷한 뜻이지만 약간의 차이가 있다. "search"는 무언가를 찾기 위해 샅샅이 뒤지는 것을, "find"는 찾아서 발견한 것을 의미한다. 이 세 단어는 모두 "찾다"로 번역될 수 있지만, 사용하는 상황에 따라 선택해야 하는데, seek은 눈으로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것들, 즉 개념적이거나 추상적인 무형의 것을 얻으려고 찾을 때 주로 쓴다.

 

그래서 우리말로 "구하다"라고 번역되는 경우가 많은데, 본문의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의라는 것도 무형의 것이니 이를 찾는다는 의미로 사용되기 위해서는 search나 find가 아닌 seek가 사용됨이 타당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 말의 ‘구하다’라는 말을 의미상으로 본다면 ‘구하다’라는 것은 사전적 의미에서의 전자의 의미인 “필요한 것을 찾다, 또는 그렇게 하여 얻다”로 사용되었음이 분명해졌다.

 

그래서 ”그의 의를 구하라“는 것은 ”내게 하나님의 의가 베풀어지게 하소서”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니다. 만약 이런 의미로 사용되었다면 이때의 의는 ‘칭의’를 가리키는 말이 될 것인데,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그 ‘칭의’를 구할 자격이 전혀 없다. 죄인이 된 자가 어떻게 의로운 자가 되게 해달라고 그렇게 뻔뻔하게 요구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의를 구하라”라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얻기 위해 찾는 일을 행하라”라는 의미로 보아야 하는데, 하나님의 의를 얻는 일도 우리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의’란 죄인을 구원하여 살리시려는 그 일을 행하신 것을 말한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의를 얻기 위해 찾는 일이란 하나님의 죄인을 구원하여 살리시려는 그 일이 이루어지도록 찾는 일을 말함이 될 것이니, 이는 곧 구원 얻을 자를 찾아 나서는 일, 즉 복음을 전하는 그 일을 행함일 것이다.

 

 

이제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살피면, 본문에서 말한 ‘그’란 누구를 가리킴일까?

 

이 말은 예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시니 자신을 가리켜 ’그’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그의 나라와 그의 의“라는 것은 분명히 ”예수의 나라와 예수의 의“라는 말은 아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기 바로 직전에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하셨고, 이어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으니 ’그‘는 분명히 성부 하나님을 지칭하는 말임이 분명하다.

 

그러면 ’그의 나라‘는 무엇일까?

 

세상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즉 사단이 다스리는 나라이다. 이는 아담이 범죄함으로써 사단이 이 세상을 지배하는 자의 자리에 섰다. 그래서 아담이 범죄한 이후로부터는 이 세상은 사단의 나라가 되었다. 사단이 이 세상의 왕인 것이다.

(요 12:3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

(요 12:31)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엡 2: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엡 2: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분명한 것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자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인이신 이 땅에 사단이 들어와 왕 노릇을 하는 이것은 불법이다. 하나님이 힘이 없어 이렇게 되도록 지켜보고만 계셨을까?

 

믿음의 백성으로 선택된 자들이 사단의 지배를 당하는 그 일이 얼마나 괴롭고 불행한 일이던가! 믿음의 백성 된 자들로 이 일을 경험토록 하게 하신 것은 이후에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그 나라가 얼마나 은혜로운지를 참되게 깨닫도록 해주려 하심이고, 또 이후에 하나님과 함께하는 그 날에는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그 경지에까지 이를 수 있도록 해주시려는 하나님의 깊은 섭리였다.

(요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그러하니 하나님께서는 사단이 이 땅을 영원히 지배하는 그 일만은 버려두실 수가 없으시다. 하나님께서는 영원에서 이 일에 대한 모든 계획을 작정하셨고, 구원하여 살리실 믿음의 백성을 예정하셨다.

 

그의 이 작정과 예정은 참되게 성스러운 일이 되었다. 거룩하신 성품에서 이루어진 이 일은 그래서 의로운 일이 되었다. 따라서 믿음의 백성을 죄에서 건져내어 살리시려는 그의 구원의 사역은 그래서 의로운 일이 되었다.

(엡 1: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엡 1:12)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의‘라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과 행위에서 나타나는 그의 의로움과 공의로움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그의 거룩하고 완전하신 기준에 따라 판단하시니 이것이 ‘하나님의 의’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도덕적 속성에 따른 그 결과로 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심판하셔야만 하니, 이것을 하나님의 공의라 칭한다.

(롬 2:5)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도다

(롬 3:5)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그의 은혜의 속성에 따른 그의 사랑이 죄인 된 우리에게 행하여지니 이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의이다. 하나님의 이 의로우심은 전적으로 그의 영광과 권능으로 드러나신다.

(롬 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행하신 그 의는 죄인 된 우리를 죄에서 건져내어 살리시는 그 일을 결과했다. 하나님의 의가 죄인된 우리를 구원하여 살리시는 그 일에서 분명하고 극적으로 드러났으니, 우리를 구원하여 살리시는 그 일은 ”하나님의 의“가 되었다.

(딤후 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그러니 하나님의 이 ‘의’는 분명히 우리에게 베푸신 가장 큰 은혜의 선물이었고, 이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의인 것이다.

(롬 8: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고후 4: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엡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예수께서도 분명하고 명백하게 하나님은 의로우시다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이 의로우심은 그의 기도 속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분명히 의로우신 자이시다. 하나님이 의로우신고로 그의 보내심을 입은 예수 역시 의로우신 자임에는 분명하다.

(요 17:25)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

(롬 2:5)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요한도 그의 기록에서 고백하기를 예수 그리스도는 의로우신 자라고 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히 하나님의 의가 되신다.

(요일 2: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일 2:29) 너희가 그가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요일 3:7)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하나님께서는 사단의 지배를 받고 있는 죄인 중에서 당신의 전적인 의로우신 뜻에 따라 구원하실 자를 예정하여 선택하시고, 그들을 그 죄에서 건지시는 그 일이 성자 하나님을 통해 이루어지도록 영원에서 작정하셨다.

 

그래서 성부 하나님은 성자 하나님을 영원에서 출생시키시고, 때가 이르매 그를 이 땅에 보내셨다. 이것이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인 메시야의 탄생이었다. 그런고로 메시야의 탄생은 성부 하나님의 의가 성자 하나님을 통해 드러나신 바가 되었으니 예수는 바로 그 의가 되신다.

 

죄인들을 그 죄에서부터 건져내시는 구속의 이 일은 그래서 하나님의 의의 실행이었다. 따라서 예수께서 행하신 이 일은 가장 모범적인 의를 구하는 그 일이 되었다. 그의 의를 구하는 그 일은 그가 십자가에 달리시는 그 일로 절정을 이루었다.

 

그 일은 죄인을 그 죄에서부터 건져 살리시기 위함이었다. 예수의 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 일이 죄인된 나를 살리시기 위한 그 일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 사실에 대해 찬동과 확신을 가지면 이것이 나의 신앙이 된다. 이 신앙은 신앙의 고백으로 이어져 하나님으로부터 의로운 자라 칭함을 받는 자리에 서게 한다.

 

신앙을 고백한 자의 심중에서는 더 이상 사단이 지배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영이 머무르는 공간이 된다.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전까지는 사단이 지배한 공간이었기에 그 생각하는 것이 비방하며 수군거리며 이 땅의 온갖 것을 탐하는 욕심으로 가득했던 그 더러움이 모두 청산되고, 사랑과 희락과 기쁨으로 채워지게 된다. 내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 천국이 실현되는 것이다.

(딤후 3:2)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딤후 3: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딤후 3:4)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딤후 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롬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그의 의를 구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는 것이다. 이 표현을 얼핏 보면 하나님의 의라는 것이 힘써 구하면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하는 말처럼 보인다. 과연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의를 구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의를 얻을 수가 없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에게 그의 의를 주시기로 영원에서 작정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를 받을 수 있게 되었으니, 이것이 ‘칭의’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이 칭의는 우리가 받고 싶다거나, 받을 수 있다고 여기고 힘써 구한다고 한들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선물일 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는 예수의 그 말뜻은 무엇이었을까?

 

하나님의 의가 분명히 드러난 것은 오직 구원과 관계된 그 일에서였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를 구한다는 것은 ”구하다“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의미 중에서 ”찾으라“는 그 의미에 집중하여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라는 이 말은 “하나님의 의를 찾으라”라는 말로 해석하여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는 구원과 관계되는 그 ‘의’이니, 구원받을 자를 찾는 그 일, 즉 복음을 전하는 그 일을 하라는 명령으로 해석하여 받아들여야만 한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복음의 본질인 예수 그리스도의 우리를 살리기 위한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을 온전히 이해해야만 한다. 이 일을 온전히 이루지 못하면 복음 전하는 이 일을 충실히 행할 수가 없다. 그래서 예수를 깊이 아는 그 일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그 일에서 가장 우선 되는 일이 된다.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일이 복음 전하는 일이라고 해석을 해야 하는 그 근거는 예수께서 이미 하신 말씀 중에 있었다.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는 이 말씀은 산상수훈 중에 있는 말씀이었는데, 산상수훈의 이 말씀은 그 유명한 팔복의 말씀으로 그 서문을 열고 있었다.

 

팔복의 말씀 중에서 마지막 그 말씀 속에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는 이 말씀에 대한 해석의 힌트가 숨겨져 있었다. 팔복의 마지막 말씀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였다.

(마 5: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여기서 언급된 의는 하나님의 의로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인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복음을 전하는 그 일을 행함으로써 받는 그 핍박을 말함이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는 것은 복음 전하여 구원받을 자의 생명을 살리는 그 일을 행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 앞에 ‘먼저’라는 말이 달려 있다. 이 먼저라는 말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일인 복음을 전하는 그 일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다. 그러면 ‘먼저’라는 말이 담고 있는 그 중요성은 무엇일까?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먼저 먹고 마시며 입을 것에 대한 사람들의 걱정에 대해 말씀하셨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의식주에 관계되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먹고사는 문제보다 목숨이 더 중요하다고 하셨다.

(마 6: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마 6: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예수의 이 말씀은 일견 모순처럼 보일 수 있다. 먹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어찌 살 수 있겠는가!

목숨이 중요하다면 그 선결문제가 바로 먹는 문제가 아닌가!

그런데 어찌 먹는 문제를 염려하지 말라 하는 것인가!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 목숨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 세상에서의 삶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는 그 목숨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영생과 관계된 그 목숨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의 삶이 끝나는 죽음으로 인해 그 목숨은 끝이 난다고 생각한다. 그러하기에 이 세상에서 조금이라도 목숨이 더 연장되기를 원하여서 그 목숨을 연장시켜줄 수 있는 그 먹을 것에 대해 염려한다.

 

그러나 누구에게서든지 그 삶은 죽음으로 끝이 나지 않는다. 죽음 이후에는 또 다른 영원한 세상이 필연적으로 전개될 것이다. 지옥에서의 영원한 삶이냐, 천국에서의 영원한 삶이냐의 문제가 음식에 대한 문제보다 더 큰 일임에는 분명하다.

 

이 영원한 삶의 중요성을 깨닫는다면 어느 일을 먼저 하게 될까?

 

내게 이웃한 자가 영원한 지옥에서 헤매는 그 삶을 살 것이라면 그대로 버려둘 수가 있겠는가! 만일 버려둔다면 “네 이웃을 사랑하라”라고 가르치신 주님의 그 명령을 거부한 셈이니 그런 자에게 구원이 주어질까?

 

구원에 이를 자로 선택된 자라면 열 일을 제쳐두고서라도 그에게 천국에서의 그 삶에 동참하라고 권유하지 않겠는가! 권유하는 이 일이 복음을 전하는 그 일이요, 또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그 일이기도 하다.

 

영혼을 살리는 복음을 전하는 이 일을 한다면 하나님은 분명히 기뻐하실 것이다. 그런데 그 기뻐하시는 자가 굶는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냥 두고 보실 것인가?

만약에 그냥 두고 보시는 자이시라면 그는 사랑이 없는 무자비한 자가 되신다. 그런 자는 사랑이신 하나님의 속성에 위배 되므로 결코 하나님이 되실 수가 없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시기 복음 전하는 그를 반드시 사랑하시니 그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신다. 이 사실이 참되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증명해 보이셨으니 그것이 엘리야 선지자에게 보이신 그 이적이었다.

 

아무도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려고 하지 않았던 그때에 오직 엘리야만이 하나님의 이름을 선포했다. 갈멜산에서의 그 영적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많은 자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였다. 많은 자들의 영혼을 살린 그 일은 그래서 일종의 복음을 전하는 그 일이 되었다.

(왕상 19:9) 엘리야가 그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유하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왕상 19:10)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왕상 18:36)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왕상 18:37)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왕상 18:38)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왕상 18:39)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왕상 18:40) 엘리야가 저희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저희를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

 

그런 그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먹을 것을 예비하셨으니, 그 하찮은 까마귀조차도 귀한 도구로 사용하셔서 그를 먹이시는 그 일을 하셨고, 불쌍한 사르밧 과부의 그 마지막 남은 가루 한 줌으로도 그를 먹이신 하나님이 되셨다.

(왕상 17:2)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왕상 17:3) 너는 여기서 떠나 동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왕상 17:4)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을 명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왕상 17:5) 저가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하여 곧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머물매

(왕상 17:6)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저가 시내를 마셨더니

(왕상 17:7) 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얼마 후에 그 시내가 마르니라

(왕상 17:8)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왕상 17:9)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 내가 그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궤하게 하였느니라

(왕상 17:10) 저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를 때에 한 과부가 그곳에서 나무가지를 줍는지라 이에 불러 가로되 청컨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나로 마시게 하라

(왕상 17:11) 저가 가지러 갈 때에 엘리야가 저를 불러 가로되 청컨대 네 손에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왕상 17:12) 저가 가로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뿐이라 내가 나무가지 두엇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왕상 17:13)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왕상 17:14)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왕상 17:15) 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저와 엘리야와 식구가 여러날 먹었으나

(왕상 17:16) 여호와께서 엘리야로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그러니 주님의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하신 그 말씀을 어찌 거짓되다 하고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의를 받은 우리인데 어찌 하나님의 이 명령,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그 일”을 나의 삶에서 가장 먼저 우선순위로 두고 행하는 그 삶을 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예수의 이 명령에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과 그 뜻에 순종함이고,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전파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그 삶을 살아갈 수 있음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여 살리신 이유이며, 하나님의 선택함을 입은 믿음의 백성으로서의 삶의 목적이기도 하다.

 

복음을 전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이 일은 오직 은혜받은 자로서의 마땅한 본분일 뿐이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이 일은 우리에게서의 선택 사항이 아니라 필수 사항이다. 복음을 전하는 이 일을 행함으로써 ‘성화’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행위가 반드시 따르게 되니, 이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그 은혜이다.

 

 

그런데 공동 번역에서는 ”의를 구하라“는 이것을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라고 풀어 써놓고 있다.

(마태복음 6:33 공동번역)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이렇게 표현을 바꾸면 오해의 소지가 생겨난다. 어떤 자는 이 부분을 이렇게 설명해 놓았다.

 

* <그의 의 =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라는 말이야. <그의 의 =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이 무엇인지 다음 구절을 보면서 확인해 보자.

 

(마태복음 7장 7~12)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가 원하는 것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잖아. 하나님을 통해 뭔가를 받기를 원하면서 말이야. 너희가 뭔가를 받기를 원하면, 너희가 받기를 원하는 것들을 다른 사람한테 먼저 해주라는 거야. 쉽게 두 사람이 대화하는 형식으로 이야기 해 볼게.

 

(A의 기도) 하나님 저 이러한 것을 받고 싶어요.

 

(하나님의 대답) 얘야, 너가 필요한 것들은 이미 다 알고 있어. 너가 이러한 것들을 받고 싶다고 했지? 그렇다면, 너는 하나님께 바라는대로 다른 사람에게 해주어라. 너가 하나님에게 받고 싶어 하는 것들을 다른 사람한테 먼저 해줘봐. 그게 올바른거야. 네가 기도할 때, 하나님이 들어 주시는데, 너는 다른 사람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고 있니?

 

*<그의 의 = 하나님께서 올바르다고 여기시는 것 =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 하나님께 기도를 통해 원하는 것을 받고 싶으면, 너희도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해 주어라>

 

* 쉽게 예를 들어서 말하면, 너희가 하나님께 죄사함을 받고 싶니? 그러면 너희도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라는 말이야. 너희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 안 하신다는 뜻이야. <그의 의 = 하나님께서 올바르게 여기신 것>은 이런 식으로 구체적으로 적용된다.

 

* 마태복음 7장 12절을 공동번역 성경으로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어.

 

(마태복음 7:12 공동번역)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 너희가 남에게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는 것이 율법과 선지자의 가르침이듯이, 너희가 하나님께 바라는 것이 있다면, 너희도 남에게 그렇게 해주어라라는 뜻이야. 구체적인 예를 적용하면, 만약 네가 하나님께 죄사함을 받고 싶니? 그렇다면, 너도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어라 라는 뜻이야.

 

* 요약 하면, <그의 나라 = 하나님의 나라에서처럼 정의로움과 사랑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기도 함>, <그의 의 = 하나님께서 올바르게 여기시는 것 = 하나님께 기도를 통해 원하는 것을 받고 싶으면, 너희도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해 줄 것>“

 

 

위의 글에서 “그의 의”는 “하나님께서 올바르게 여기시는 것”이며, 이는 “하나님께 기도를 통해 원하는 것을 받고 싶으면, 너희도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해 줄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므로, 그의 의를 구하라는 이 말씀은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라는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공동 번역과 같은 이런 표현에 따른 해석은 복음을 전함으로써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 ‘하나님의 의’를 전파하라는 그 뜻과는 너무나도 멀어진 해석이 되고 말았다. 말씀의 오역은 우리의 영적 성장에 너무나도 심각한 영향을 준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성경은 세상의 윤리를 가르치는 책, 즉 “남에게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라고 가르치는 것과 같은 윤리적인 것에 대한 가르침을 주는 것을 최종 목표로 한 책이 아니라, 오직 죄인을 구원하여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그 의를 최고 목적으로 하여 가르치는 책이라는 점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