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부활하신 그 이유와 목적에 관하여
2024. 3. 31 영동장로교회 최규만 목사
“예수께서 부활하신 그 이유와 목적에 관하여”
창에 옆구리가 찔려 온몸의 물과 피를 쏟아낸 사람이 죽은 지 사흘 만에 살아날 확률이 얼마나 될까?
우리가 아는 상식으로는 그 확률은 당연히 0%이다. 절대로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간혹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의 이야기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 경우는 외상이 없이 죽은 사람의 경우에 한정되었다. 신체가 완벽히 훼손되어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의학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이런 불가사의한 일이 참말로 있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그 주인공이 바로 예수라는 사람이다. 성경을 거부하는 사람이라면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그것이 단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꾸며낸 이야기일 뿐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과연 예수가 부활했다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며 진실이었을까?
인류의 역사에서 오직 유일한 이 사건, 창에 옆구리가 찔려 온몸의 피와 물이 다 빠져나와 죽은 예수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다는 이 기적 같은 사건이 조작된 것이 아니고, 엄연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저 유명한 로마의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 때문이다.
요세푸스는 기독교 교인이 아니었다. 그는 유대인으로서 바리새인이었으며, 로마로 옮긴 후에는 로마 시민권을 얻어 로마인으로 살았기에 비기독교적인 역사가임에는 분명했다. 따라서 그가 기록한 예수에 관한 이야기는 객관적이며, 역사적인 사실에 대한 증거로 삼기에는 충분하다 할 것이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사제의 아들로 태어났고, 자신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사제가 되었다. 그의 혈통은 하스몬 왕조와 닿아있다고 추정되는데, 이런 덕분인지 그는 하스몬 왕조의 역사적 상황을 잘 알 수 있었고 ‘유대 전쟁사’에 이를 기록할 수 있었다.
요세푸스는 또한 유대교의 여러 종파들을 두루 거치기도 했는데, 사제 출신에 하스몬 왕조의 혈통과 닿아있었던 터라 사두개파에서 시작해 에세네파 등을 거쳤고, 최종적으로는 바리새파로서 자신의 입장을 정했다. 그러나 여러 종파들을 거친 그의 이력으로 1세기 유대교의 각 종파들에 대한 기록을 남길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는 64년 네로 황제 시절로 이때 반로마 폭동을 주동하였다는 이유로 로마로 압송되어 사형 판결받은 유대인들의 구명 탄원을 위한 사절단의 일원으로 로마에 이르렀다. 네로를 움직이기 위해 유대인 배우의 도움으로 네로의 부인 포파이아 사비나를 만났고, 포파이아는 젊은 요세푸스를 맘에 들어 해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로마를 다녀온 경험은 바리새파임에도 불구하고, 요세푸스에게 국제 정세의 냉혹함을 알게 된 계기로 보인다. 유대인들이 로마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자(제1차 유대-로마 전쟁) 요세푸스는 로마에 맞서는 것이 유대인들에게 파멸을 가져올 것임을 알았다.
하지만 강경파들의 득세에 어쩔 수 없이 갈릴리의 요타파타 마을을 방어하는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요세푸스는 최대한 베스파시아누스군의 진로를 막는 전략을 써서 몇십 일 동안 베스파시아누스군을 붙들어 두었지만 결국 전력의 한계로 패배하고 말았다.
이때 요세푸스와 동료 지휘관들은 자살을 결정하고 제비를 뽑아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방식으로 마지막에 요세푸스와 한 병사가 남았는데, 요세푸스는 그 병사를 설득해 로마군에 투항하게 되었다.
그리고 훗날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도움으로 로마에 살면서 유대 전쟁사(75년경), 유대 고대사(95년경), 아피온 반박문(97년경) 및 요세푸스 자서전(99년경)을 남겼다. 예수에 관한 이야기는 유대고대사에 기록되어 있다.
요세푸스는 유대고대사 18권에서 본디오 빌라도의 유대 총독 재임 시절(AD 26~37)에 있었던 사건들과 연관해서 예수를 언급하였다. 요세푸스의 기록에는 예수뿐 아니라 예수의 동생 야고보, 세례요한까지 신약성경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요세푸스의 이 기록이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는 측면에서 신뢰성이 대단히 높은 평가를 받는다는 점에서 예수에 대해 증거한 그 기록 자체로 인해 예수는 역사적인 인물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의 유대고대사 18권(32년간) 2장에는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 총독으로 부임한 겻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 헤롯과 필립이 케사르(가이사 또는 옥타비아누스)를 기념하기 위해 여러 도시들을 건설한 경위, (가이사는 로마 황제의 칭호이다)
1. 케사르가 악티움 전투(BC 31)에서 안토니를 무찌르고 승리한 지 제37년째가 되던 해(AD 6)에 키레니우스는 아켈라오의 재산을 처분하고 세금부과의 건을 매듭짓고 난 후, 백성들이 선택해 세웠던 대제사장 요아사르(Joazar)를 대제사장직에서 해임시키고, 셋(Seth)의 아들 아나누스(Ananus)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였다.
헤롯과 필립은 각기 그들의 분봉국(tetrarchy)를 차지하고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였다. 헤롯은 전 갈릴리 지역의 요충지인 세포리스 시를 성벽을 쌓아 요새화하여 분봉국의 중심도시로 만들었다.
헤롯은 또한 베타람프타 시도 성벽을 쌓아 요새화한 후 황제의 아내인 이름을 본떠 율리아스(Julias)라고 이름 지웠다. 필립도 요단강 근원지에 도시를 건설하고 가이사랴로 불렀다. 그는 또한 게네사렛 호숫가에 위치한 벳새다 마을을 주민의 수로나 그 밖의 점에서 시로서의 면목을 갖추도록 만든 후에 케사르의 딸의 이름을 본떠서 율리아스라고 명명했다.
2. 코포니우스는 키레니우스와 함께 케사르의 명을 받고 유대 총독으로 보냄을 받았다.
코포니우스가 총독으로 유대를 통치하고 있을 때 아래와 같은 사건이 발생했다. 유대인들이 유월절이라고 부르는 무교절에 제사장들은 밤 12시가 지나면 바로 성전 문을 여는 것이 일종의 관습이었다.
그런데 성전 문이 열리자마자 몇몇 사마리아인들이 몰래 예루살렘에 잠입하여 죽은 사람들의 시체들을 성전 회랑에 던져 놓고 도망을 쳤다. 이로 인해 유대인들은 그 후로 사마리아인들이 성전에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이런 일이 일어난 후 코포니우스는 로마로 돌아가고 마르쿠스 암비비우스가 후임 총독으로 부임하였다. 그가 총독으로 있을 때에 헤롯 왕의 여동생인 살로메가 세상을 떠났다. 살로메는 유언으로 얌니아와 그 인근 전 지역과 파사엘리스 평지를 케사르의 아내 율리아에게 주었으며 아르겔라우스에게는 종려나무 대농장-최고급 열매가 맺히는-을 남겨 주었다.
그 후 마르쿠스 암비비우스의 후임으로 안니우스 루푸스가 총독으로 부임하였다. 그가 유대 총독으로 재임하는 동안에 케사르, 즉 로마의 두 번째 황제가 세상을 떠났다. 케사르의 재위기간은 모두 57년 6개월 2일간이었다.
(이 기간 중 안토니우스와의 공동 통치 기간은 14년이었으며,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가 죽자 율리아의 소생인 티베리우스 네로가 뒤를 이었다. 티베리우스 네로는 제3대 황제가 되었다. 그는 안니우스 루푸스 후임으로 발레리우스 그라투스를 유대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발레리우스 그라투스는 아나누스를 대제사장직에서 해임하고, 파비의 아들 이스마엘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이스마엘을 대제사장직에서 해임하고 아나누스의 아들 엘루아살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엘루아살도 1년 만에 대제사장직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그 후 그라투스는 카미투스의 아들 시몬에게 대제사장직을 주었다.
그러나 시몬도 1년이 채 못 되어 대제사장직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요셉 가야바가 후임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기록은 마태 26:57과 일치되어 그의 기록이 성경과 일치함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의 기록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라투스는 11년 동안 유대를 통치하다가 로마로 돌아갔다.
이에 본디오 빌라도가 후임 총독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그의 유대고대사 18권(32년간) 3장에는 유대인의 반역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기록된 3장은 모두 5개 파트로 나누어져 있다.
1파트 : 케사르의 우상 사건
2파트 : 유대인의 반역과 살해(누가 13:1~2)
3파트 :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4파트 : 로마 이시스 신전에서 일어난 추잡한 사건
5파트 : 유대인들이 로마에서 추방된 사건
성경의 기록과 관계되는 부분은 2파트와 3파트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2파트 : 유대인의 반역과 살해(누가 13:1~2)
빌라도는 거룩한 돈(Sacred money)을 사용해서 200퍼얼롱 떨어진 곳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물을 끌어들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일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이 모여서 빌라도가 그 일을 즉시 중단해야 한다고 떠들어 대기 시작하였다. 이에 일부 사람들은 군중들이 모이면 흔히 하는 것처럼 빌라도에게 욕설을 퍼붓고 비난하기도 하였다.
이에 빌라도는 많은 병사들을 유대인 복장으로 변장시키고 단검을 옷 속에 숨기게 한 후에 유대인들이 모이는 곳에 잠입시켰다. 그리고 빌라도는 몸소 나서 유대인들에게 해산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빌라도에게 비난을 퍼붓자 빌라도가 약속한 신호를 병사들에게 보냈다.
병사들은 빌라도가 명령한 것보다 더 가혹하게 행동하여 거기에 있던 사람들을 한 사람도 살려두려고 하지 않았다.
무방비 상태였던 수많은 유대인이 살해당했고 일부는 부상을 당한 채로 도망쳤다.
이렇게 해서 반역이 진압되었다.
(성경에서 이 사건은 누가복음 13장 1~2절에 기록되어 있어서 성경의 기록이 역사적 사실과 일치함을 보이고 있다.)
(눅 13:1)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눅 13:2)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눅 13:3)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 3파트 :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한편 바로 이때 예수라는 지혜로운 사람 – 너무나 신기한 일들을 많이 행했기 때문에 인간이라고 볼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인간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면 –이 있었다.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기쁜 마음으로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드는 선생이었다. 그는 수많은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까지도 그의 곁으로 끌어들였다.
그가 바로 그리스도였다.
빌라도가 유대인의 유력 인사들의 청에 의해 그를 십자가에 달려 죽게 했으나 그를 처음부터 사랑하던 자들은 그를 버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그에 관해 예언한 대로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서 그들에게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이뿐 아니라 그에 관해서 수많은 놀라운 일들을 예언했었다.
그의 이름을 본떠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다.
이상과 같은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요세푸스의 기록에서 예수가 부활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따라서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과 삼 일 만에 부활하신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러면 예수께서 부활하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그의 비하의 완결이었다. 그는 우리의 죄짐을 대신 지시려고 이 땅에 오신 성자 하나님이시다. 성자 하나님이 우리의 죄짐을 대신 지시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우리와 같은 몸을 지니신 존재, 즉 인성을 지니신 성자 하나님이 되셔야만 했다.
사람의 몸을 지니신 성자 하나님으로 이 땅에 오신 순간이 바로 베들레헴 말구유에 누우신 그 순간이었다. 귀하신 하나님이 말 먹이통에 누우신 것은 그의 지극한 비하의 신분을 입으심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그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라해도 모자람이 없었다. 회당에서 쫓겨나고 고향에서 사람들에게 쫓겨나는 그 삶이 어찌 고난이 아닐 수 있었겠는가!
(눅 4:24)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눅 4: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눅 4:26)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눅 4:27)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니라
(눅 4:28)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눅 4:29)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하되
(눅 4:30) 예수께서 저희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고난 끝에 드디어 매달리신 십자가의 그 형벌은 인간으로서는 최하의 신분에 놓여짐이었으니 그의 비하의 신분의 절정이었다. 그 모두는 오직 우리의 죄짐을 대신 져야만 하는 그 이유 때문이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짐을 대신 지셔야만 하셨기에 비하의 신분에 스스로 놓이셨지만,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는 구속 사역을 위해서는 구속주가 되셔야만 했다. 그러하기 위해서는 그의 신분이 비하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무덤에 머무르시는 것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과 함께하시며 그의 우편에 앉으셔야만 한다.
따라서 그의 부활은 필연적이다. 이를 승귀 (Exaltation)라고 한다. 그런고로 승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하늘로 올라가신 상태를 말한다. 이 승귀는 비천한 신분에서 고귀한 신분으로의 변화로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께서 성육신으로서 땅에서 살아가시며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하나님의 영광과 권세를 되찾으신 것을 나타낸다. 그런고로 승귀는 예수의 높아지심으로써 성자 하나님으로서의 영광과 권세를 드러내심이다.
(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 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빌 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빌 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예수께서 부활하사 승귀하심으로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자리에 앉으셨다. 그렇게 예수께서 승귀하시기 위해 부활하셨다면 그 부활의 목적은 또 무엇이었을까?
그의 부활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였다.
이는 우리의 죄를 청산하려는 그 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였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하셨다. 만약에 아담이 이 명령을 어기게 되면 그것은 곧 죄를 범하는 일이 되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 죄이다. 하나님은 그 속성상 지극히 선하시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그 뜻과는 반대로 가는 그것이 곧 죄가 된다. 그 죄는 결단코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죄를 없애야만 하시니 아담을 죽이는 그 일을 하셔야만 한다. 이는 그 죄가 아담에게 있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을 사랑으로 창조하셨고, 그 아담을 사랑하시는 것을 멈추실 수가 없으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변개하시는 자가 아니시기 때문이다. 아담을 사랑한다고 하신 그 약속은 아담이 죄를 범했다고 해서 변개하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아담을 사랑하지 않으신다면 변개하지 않으시는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그 속성에 위배되신다. 그러니 그 아담을 죽음에 버려두실 수가 없으시다. 이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와서 대신 죽는 그 일은 필연이 되었다. 그것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이었다.
만약 예수가 죽음으로써만 그 일이 끝난다면 성자 하나님은 구속주가 되실 수가 없으시다. 또한 하나님의 아담을 살리시는 그 일을 누가 참된 사실로 믿을 것인가!
그러하기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반드시 살리셔야만 하니 그것이 예수의 부활이다. 그래서 믿는 자들은 모두 그것을 보고 믿음으로써 자신의 부활에 대한 소망을 얻을 수가 있게 되었다.
예수의 죽으심은 그의 비하의 최종 단계였고, 부활은 그의 승귀의 시작 단계였다. 그는 존귀하신 성자 하나님이시기에 무덤에 머물러 계실 수는 없다. 그는 구속주로서 또한 심판주로서의 그 일을 행하셔야 한다. 그러한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그는 부활하셔야 했고, 그리고 성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셔야만 한다.
성자 하나님은 우리를 죄에서 건져주시는 구속주로서 메시야가 되신다. 메시야는 그리스도란 말이다. 예수는 그리스도가 되셔야만 한다. 죄에 빠져 있다는 것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고로 죄에서 건져내는 일이란 곧 죽음을 이겨내는 일이 된다. 이 일을 행하는 것이 구속이니, 이 일을 행할 자가 구속주이다. 구속주를 구약에서는 메시야라고 호칭하고, 신약에서는 그리스도라고 칭한다.
예수가 그리스도가 되기 위해서는 죽음을 물리치고 정복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만약 그가 무덤에만 머물러 있다면 그는 그리스도가 될 수 없다. 우리를 죄에서 건져주시기 위해 그는 죽음을 정복하신 자가 되셔야 하기에 스스로 부활하셔서 이를 입증하셔야만 했다. 이미 구약에서 많은 선지자들이 예언했고, 예수 자신도 자신의 부활에 대해 예언하셨다.
구약의 시편에 다윗이 기록한 시편 16장10절은 주님의 부활을 가리킨 예언이라고 사도들이 분명히 밝혔다.
(시 16:10)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시 16:11)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행 2:25) 다윗이 저를 가리켜 가로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행 2:26)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입술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는 희망에 거하리니
(행 2:27)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행 2:28)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니
(행 2:29)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행 2:30)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행 2:31)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행 2: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이사야 선지자가 한 예언의 말씀,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는 주님의 부활하실 것에 대한 것이었다. 이는 다윗이 하나님께 받은 약속의 말씀이었다.
(사 55:3)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
이 예언이 주님의 부활에 대한 것임은 바울이 안디옥에서 행한 설교 중에 증거되고 있다.
(행 13:34)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가라사대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사도바울은 훗날 주님의 부활하심에 대해서도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고전 15: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고전 15:4)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고전 15: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고전 15: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고전 15: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고전 15: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구약의 모든 예언은 성취되었다. 따라서 이 예언 또한 성취된 것은 분명하다고 보아야 한다.
주님께서도 자신의 부활하실 것에 대해 스스로 예언하신 바가 있다.
(마 16: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마 20:17)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려 하실 때에 열 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마 20:18)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마 20:19)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박게 하리니 제 삼 일에 살아나리라
(요 10:17)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요 10: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