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그리고 순종
2023. 8. 13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구원 그리고 순종”
성경은 참으로 많은 것들을 교훈한다. 그래서 평론가들은 성경을 책 중의 책이라 말하곤 한다. 또 많은 사람들이 교양을 위해서라도 성경은 반드시 읽어야할 책으로 생각하기에 성경은 세상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책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믿음의 백성인 우리의 입장에서는 이 성경책이 많은 교훈을 준다거나 교양인으로서 반드시 읽어야만 하는 책이기 때문에 보는 것이 아니다. 성경을 보는 우리의 관점은 세상 사람들과는 전혀 다르다. 그러면 우리는 왜 이 성경을 보아야하는가?
우리는 이미 우리의 시조 아담이 하나님과 맺은 행위언약을 위반함으로써 죄인의 자리에 섰다는 것과 우리는 그의 후손으로서 그의 죄를 유전 받아 죄 중에서 태어난 자라는 사실에 대해서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이 원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 전에는 영적으로 죽어 있는 존재라는 사실도 인정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죄인들 중에서 특별히 우리를 이미 창세전에 지명하여 부르셔서 살리실 자로 정하셨다.
그런고로 성령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영적으로 산 자가 된 우리는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듣고 그 길을 가듯이 우리 역시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삶을 살아야만 한다. 하나님의 그 음성이 바로 성경이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성경을 읽는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다. 그래서 그들은 성경을 단지 교양을 위한 목적으로 읽을 뿐인 것이다.
이처럼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게 성경을 대하여야 하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과연 성경이 의도하는 그 목적이 무엇인가?”하는 것에 대해 바르게 깨달아야 한다.
성경의 대 주제는 구원이다. 이는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인데,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여 살리기를 원하신다는 그것이다. 그래서 이미 아담의 죄를 유전 받은 나를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그 계획이 선명하게 그려진 것이 바로 이 성경이다.
이는 오직 하나님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본 성경의 핵심 주제이다. 그러면 사람의 입장인 우리의 편에서의 성경의 핵심 주제는 무엇이 될까?
바로 순종이다.
순종은 자원하여 스스로 따르는 일을 말한다. 자원하기에 이는 그 본바탕에 기쁨이 깔려있을 것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순종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기쁜 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순종한다는 것은 무엇에 대한 순종이며, 또 그것이 왜 기쁜 일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
우리가 순종해야할 그 대상은 하나님이며, 구체적으로는 하나님의 그 뜻에 순종함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를 구원하여 살리시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겠다는 것은 우리를 구원하여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그 모든 처사에 기쁜 마음으로 따라감이다. 우리를 살리시려는 그 일에 어찌 기쁜 마음으로 따라가지 않을 수 있으랴!
하지만 이 일을 방해하는 존재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사단이다. 애초에 하나님이 아담을 에덴동산에 두실 때 그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그 삶을 살면 영원히 영생할 자가 되게 하실 뜻을 세우셨다. 그 뜻은 그곳 에덴동산에 생명나무를 두심으로 드러났다.
(창 2: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창 2: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그러나 하나님의 그 계획을 사단은 처음부터 방해할 의도를 가졌으니, 그 기회를 포착한 것이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근처로 다가온 그때였다. 이 사건이 생겨나기 전에는 아담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그곳에서 살았다.
하나님과 이야기를 나룰 수 있는 그 삶은 참으로 기쁘고 복된 삶이었을 것이다. 그때까지는 아담에게는 하나님의 그 뜻을 따르는 그 삶이 참으로 기쁜 삶이었음이 창세기 1장에서 간접적으로 잘 드러나 있다.
여섯째 날에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을 따라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남자와 여자가 바로 아담과 하와가 아닌가?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지으신 모든 생물들을 다스리는 사명을 감당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 지으신 것을 보시고 심히 좋아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음에서 아담은 그 땅의 모든 생물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잘 다스리는 그 일을 기쁜 마음으로 잘 감당하고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사람을 제외하고 모든 것을 다 만드신 후에 소감을 피력하실 때 “보시기에 좋았더라”고만 기록되어 있는데, 마지막으로 사람을 만드신 후의 그 소감은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다. 이는 아담이 그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그것까지 보시고 밝히신 소감이었을 것이니 아담이 기쁜 마음으로 그 일을 감당하지 않았더라면 하나님께서 그렇게까지 좋아하셨을까!
(창 1: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 1:29)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창 1:30)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 1:31)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그러나 어쩌면 아담의 그 기쁨은 깨달음을 통해 얻어진 완전한 기쁨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쏟아 부어주신 그 은혜로 인한 기쁨이었을 것이다. 누구나 이와 같이 받음에서 생겨나는 그 기쁨을 누릴 줄 안다.
그러나 이 기쁨은 영속성을 지니지 못한다. 시간이 경과하면 타성에 젖어 그 기쁨은 사라진다. 아담 역시 진정한 깨달음에서 얻어진 그 기쁨을 누리지 못했기에 사단의 그 유혹을 이겨내지 못한 것이다.
성경의 처음 시작은 이렇게 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 약속은 한 사람 아브라함의 선택으로 이어졌다. 아브라함의 선택은 나를 살리시겠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었다. 이를 성경에서는 아브라함을 처음 부르실 때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고 함으로써 잘 드러나고 있었다.
(창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창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행 3:25)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으로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
그런데 아브라함의 삶은 초반에는 전적으로 완전한 순종을 이루는 삶이 되지 못했다. 이는 죄인된 자의 전형적인 모습으로서 우리의 모습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지만 그의 삶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삶이 되지 못했다. 하나님을 완전히 신뢰하지 않았기에 그는 자가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 애굽에서 자신의 목숨을 자신의 수단으로 보전하려고 했다.
하나님을 완전히 신뢰하는 믿음이었더라면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자기의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죄인된 자에게는 이처럼 죽음이란 가장 두려운 일이 되기에 그때까지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 것까지도 모두 이해해주신다는 하나님의 그 마음이 잘 드러난 것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의 연고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 그 일이었다.
(창 12:11)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를 때에 그 아내 사래더러 말하되 나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창 12:12)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고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창 12:13) 원컨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 하니라
(창 12:14)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의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창 12:15) 바로의 대신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취하여 들인지라
(창 12:16) 이에 바로가 그를 인하여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약대를 얻었더라
(창 12:17)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연고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창 12:18)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대접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느냐
(창 12:19)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나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창 12:20)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 아내와 그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
그런 아브라함이 또 다시 그와 같은 믿음에서의 실수를 범하였으니 그것이 아비멜렉에게 다시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일이다.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이해해 주셨다. 그래서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 경고하심으로 아브라함은 그 위기를 피해갔다. 우리를 이같이 이해해주시고 감싸주실 것을 아브라함을 통해 보여주심이었다.
아브라함을 구원하여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이 사랑이 바로 나를 향한 하나님의 그 사랑이라는 것을 성경의 이 말씀으로 우리에게 들려주시니 이것이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창 20:1) 아브라함이 거기서 남방으로 이사하여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우거하며
(창 20:2) 그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보내어 사라를 취하였더니
(창 20:3)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취한 이 여인을 인하여 네가 죽으리니 그가 남의 아내임이니라
(창 20:4) 아비멜렉이 그 여인을 가까이 아니한 고로 그가 대답하되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창 20:5) 그가 나더러 이는 내 누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 여인도 그는 내 오라비라 하였사오니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
(창 20:6) 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않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못하게 함이 이 까닭이니라
(창 20:7)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 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 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정녕 죽을 줄 알지니라
이런 아브라함이 드디어 자원하여 하나님을 따르는 그 일을 행하였으니 그것은 완전한 순종이었다. 그 일이 바로 자신의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떠나는 그 일이었다. 자신의 생명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귀한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는 그 일이 어찌 기쁜 일일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 순간의 아브라함은 이미 참된 기쁨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자였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그 삶이야말로 그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기쁜 삶이라는 것을 온전히 깨달은 그였다. 그래서 그 아들 이삭을 자신의 손으로 죽여서 번제물로 제단 위에서 태우는 그 일을 행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아들을 다시 살리셔서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하게 하실 것이라는 그 사실을 온전한 믿음으로 받아들인 그였다. 그러하기에 그 일을 행하는 것을 기쁜 마음으로 할 수 있었으니 이것이야말로 온전한 순종이었다.
(롬 4:17)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롬 4: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히 11: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히 11:18)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히 11:19)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이로 보건데 사람 편에서의 하나님을 향한 덕목 중에서 가장 귀한 덕목이 바로 순종이다. 이는 하나님의 뜻에 기쁜 마음으로 따라 가는 일이니 아브라함의 믿음이 경지에 이르렀을 때의 그 모습이 참된 순종 위에서 드러난 그 믿음이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려고 선택하신 우리의 입장에서는 하나님 앞에 가장 귀한 드림이 바로 참된 순종에 기반한 그 믿음을 드러내어 보이는 일이다. 아브라함이 그 일을 이루었고, 구약에 언급된 많은 선지자들의 삶이 그러했다.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의 그 사랑을 깊이 깨달았기에 음란한 여인 고멜을 아내로 삼으라는 하나님의 그 명령에 순종한 것이다.
(호 1:2) 여호와께서 비로소 호세아로 말씀하시니라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행음함이니라
음란한 아내를 얻는 것이 어떻게 기쁜 일이 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그 사랑을 깊이 깨달았기에 그 명령에 순종한 것이다. 하나님의 참된 그 사랑을 깨닫고, 또 그 뜻을 분명하게 알면 호세아처럼 그렇게 순종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 순간의 호세아는 결코 염세적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그 뜻을 알았으니 그 결과가 반드시 선하고 아름다울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을 것이고, 그런 그라면 그는 분명히 낙천적인 자가 되었을 것이다. 염세적인 자는 슬플 것이지만 낙천적인 자는 기쁠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구원하실 백성으로 삼으신 족속들이지만 역사서에 드러난 그들은 늘 사단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항상 순종하지 못하는 삶이 되고 말았다. 사단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 땅의 왕을 구한 이스라엘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청을 들어주셔서 사울을 그들의 왕으로 세워주셨다. 초반에는 사울도 하나님의 신, 즉 성령이 함께하시는 은혜를 받은 자였다.
(삼상 10:1) 이에 사무엘이 기름병을 취하여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맞추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네게 기름을 부으사 그 기업의 지도자를 삼지 아니하셨느냐
(삼상 10:2) 네가 오늘 나를 떠나가다가 베냐민 경계 셀사에 있는 라헬의 묘실 곁에서 두 사람을 만나리니 그들이 네게 이르기를 네가 찾으러 갔던 암나귀들을 찾은지라 네 아비가 암나귀들의 염려는 놓았으나 너희를 인하여 걱정하여 가로되 내 아들을 위하여 어찌하리요 하더라 할 것이요
(삼상 10:3) 네가 거기서 더 나아가서 다볼 상수리나무에 이르면 거기서 하나님께 뵈려고 벧엘로 올라가는 세 사람이 너와 만나리니 하나는 염소 새끼 셋을 이끌었고 하나는 떡 세덩이를 가졌고 하나는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진 자라
(삼상 10:4) 그들이 네게 문안하고 떡 두 덩이를 주겠고 너는 그 손에서 받으리라
(삼상 10:5) 그 후에 네가 하나님의 산에 이르리니 그곳에는 블레셋 사람의 영문이 있느니라 네가 그리로 가서 그 성읍으로 들어갈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산당에서부터 비파와 소고와 저와 수금을 앞세우고 예언하며 내려오는 것을 만날 것이요
(삼상 10:6) 네게는 여호와의 신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
(삼상 10:7) 이 징조가 네게 임하거든 너는 기회를 따라 행하라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
(삼상 10:8) 너는 나보다 앞서 길갈로 내려가라 내가 네게로 내려가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리니 내가 네게 가서 너의 행할 것을 가르칠 때까지 칠 일을 기다리라
(삼상 10:9) 그가 사무엘에게서 떠나려고 몸을 돌이킬 때에 하나님이 새 마음을 주셨고 그 날 그 징조도 다 응하니라
(삼상 10:10) 그들이 산에 이를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그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신이 사울에게 크게 임하므로 그가 그들 중에서 예언을 하니
(삼상 10:11) 전에 사울을 알던 모든 사람이 사울의 선지자들과 함께 예언함을 보고 서로 이르되 기스의 아들의 당한 일이 무엇이뇨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 하고
(삼상 10:12) 그곳의 어떤 사람은 말하여 이르되 그들의 아비가 누구냐 한지라 그러므로 속담이 되어 가로되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 하더라
그러나 사단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였을 때는 그도 결국 세상을 탐하는 자가 되고 말았다. 하나님께서 그 땅의 왕이었던 사울을 그 왕 된 자리에서 내려오게 하신 것은 순종하지 않는 자를 이 같이 대우하신다는 것에 대한 분명한 경고가 되었다.
사울은 아말렉으로부터 전리품으로 좋은 양들을 챙겼다. 사무엘이 그것을 지적하자 사울은 하나님께 제사지내는 일에 그 좋은 양들을 쓰려고 그랬다고 변명했다. 그때 사무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고 말함으로써 참되고 완전한 순종이 구원을 얻어야 할 자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이 된다는 것을 강조했다.
왕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구원할 자라는 것에 대한 상징이었다. 구원얻을 우리는 그 날에 왕 같은 제사장이 될 것이라고 성경은 약속하고 있지 않는가!
그렇게 구원 얻을 자를 상징하는 왕으로서의 사울이 순종하지 않음으로써 그 왕된 자리에서 왕이 되지 못하게 하심은 순종의 덕목이 갖는 그 중요성이 얼마나 큰가를 보여주려 하심이 되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한 그 말씀을 오해하거나 잘못 이해하여 제사의 중요성을 폄하해서는 안된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서 그의 아들 가인과 아벨에게 교육한 가장 중요한 일이 바로 제사였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주는 오직 유일한 수단이 바로 제사인 것이다. 이렇게 중요한 제사보다 순종이 더 낫다고 하였으니 이 순종이야말로 얼마나 중요한 덕목이 되겠는가!
(삼상 15:14) 사무엘이 가로되 그러면 내 귀에 들어오는 이 양의 소리와 내게 들리는 소의 소리는 어찜이니이까
(삼상 15:15) 사울이 가로되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 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
(삼상 15:16)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가만히 계시옵소서 간 밤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신 것을 왕에게 말하리이다 가로되 말씀하소서
(삼상 15:17) 사무엘이 가로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
(삼상 15:18) 또 왕을 길로 보내시며 이르시기를 가서 죄인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 하셨거늘
(삼상 15:19)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의 악하게 여기시는 것을 행하였나이까
(삼상 15:20)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왔고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였으나
(삼상 15:21)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취하였나이다
(삼상 15:22)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삼상 15:23)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순종은 기쁜 마음으로 따름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 순종이 상대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가능할까?
상대에 대한 사랑이 없이 따른다는 것은 복종일 뿐이다. 상대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그 따름은 또한 기쁨이 동반될 수 없다. 그래서 반복적인 복종의 강요는 내적 스트레스를 축적시키다가 끝내는 폭발하여 일을 내고 만다. 군대 내에서의 사고는 대개 그렇게 해서 발생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과연 우리에게 복종을 강요하실까?
하나님께서는 요나가 니느웨로 갈 것을 명하셨다. 그는 선지자였으니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야만 하는 자였다. 가라면 무조건 가야할 처지에 있었던 요나였다. 하나님은 능히 그에게 복종할 것을 명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강압하시지 않으셨다. 매 순간마다 요나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여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하셨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우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심이었다. 전능하시고 위대하신 하나님이 죄인인 우리임에도 인격적으로 대우하신다는 것은 진실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가 된다.
(욘 1:1)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욘 1:2)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 순종해야하는 우리 역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순종을 이루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예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하신 것은 하나님의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게 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하나님의 그 큰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사단을 쫓았으니 분명히 우리는 하나님에게 원수된 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마음을 온전히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그 입장에 서는 일일 것이다. 그것이 바로 원수를 사랑하는 그 일이다. 하나님의 그 입장을 이해한다면 우리가 어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리요!
그리고 또 어찌 그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이 순종에 대한 본을 구약에서는 많은 선지자들을 통해 보이셨으니, 그 기록이 선지서들에서 분명히 드러났다. 역사서에서는 많은 왕들의 순종과 불순종을 통해 믿음의 백성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게 하셨다.
그리고 이 순종은 드디어 신약에서 예수를 통해 극치에 도달했다. 성경의 시작이 아담의 불순종에서 시작하여 드디어 예수의 완전한 순종에 이름으로써 극명한 대비를 이루어 믿음의 백성으로서, 또 구원에 이를 자로서의 자세를 어떻게 취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이 일은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기도 한 것이다.
순종의 이 모범은 드디어 제자들을 움직이게 하였고, 그들은 복음 전하는 그 사명을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감당했다. 그것은 예수를 본받은 참된 순종이었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해 영광 받으실 수 있었다.
사도바울도 그렇게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는 그 일에 순종했다. 그 순종은 참된 순종이었던 것은 그가 그 일을 기쁜 마음으로 감당했다는 것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죄인의 신분으로 로마로 압송되어가는 바울이 풍랑에 두려워 떠는 사람들에게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고 말한 것은 그가 하나님으로 인한 그 기쁨이 있었음에 대한 증거가 된다. 하나님으로 인한 그 기쁨이 없었더라면 그가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
(행 27:18)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행 27:19)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저희 손으로 내어 버리니라
(행 27:20)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
(행 27:21)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행 27:22)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행 27:23)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행 27:24)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행 27:25)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사도바울이 그의 사명에 기쁨으로 순종한 것은 그가 참된 본향에 대한 분명한 소망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그 본향은 하나님과 영원히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그 삶이 주어지는 곳이다. 이 삶보다 더 기쁠 수 있는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빌 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빌 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빌 1:22)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빌 1:23)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빌 1:24)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빌 1:25)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주님께서도 이 일을 이루시려고 승천하신다고 말씀하셨고, 이 사실을 바울이 분명히 깨달았기 때문에 그는 참된 소망과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요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 14: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요 14: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요 14:4)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사도바울은 그렇게 기쁨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는 그 일에 순종했다.
이제 우리도 기쁜 마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자. 이 순종은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가 감당해야할 책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