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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영동장로교회 2023. 6. 4. 08:44

2023. 6. 4. 영동장로교회 최규만 목사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온 천하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할 것을 명하실 때 믿는 자들에게 나타날 표적에 대해 말씀하셨다.

 

믿는 자들이 주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새 방언을 말하고,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자에게 안수하면 나을 것이라고 하셨다.

(막 16: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막 16:18)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과연 제자들은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복음을 선포할 때 방언을 했다. 천하 각국에서 온 유대인들이 모였을 때 제자들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각기 다른 방언으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했다. 그 듣는 자들이 말하기를 “제자들이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듣는다.”고 고백했다.

(행 2:1)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행 2: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행 2:3)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행 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 2:5)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행 2: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행 2:7)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행 2: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행 2: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행 2: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행 2: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행 2:12)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행 2:13)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

(행 2:14)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이 일이 있기 전에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제자들의 믿음 없는 것에 대해 꾸짖으셨다. 주님이 부활하신 소식을 듣고도 그 말을 믿지 않았음 때문이었다. 그 당시의 그런 제자들 입에서는 방언이 나올 수가 없었다.

(16:13)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고하였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16:14)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그러나 제자들이 방언으로 복음을 전하던 그때에는 그 제자들은 진심으로 믿는 자들이 되어있었다. 그러했기에 주님의 그 말씀대로 제자들은 방언을 할 수 있게 되었고, 그 방언함으로써 복음도 전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믿는 우리들 중에서도 능히 방언을 하는 자들이 있고, 귀신을 쫓아내는 일과 안수하여 병을 고치는 일도 가능한 자들이 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믿는 자들에게 따르는 표적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방언을 하며, 안수함으로써 병 고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 우리 모두는 수긍할 수 있다.

 

그런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쉽게 수긍이 가지 않는다. 맹독을 품고 있는 독사에 물리면 그 누구라도 안전을 보장할 수가 없다. 또 사약과 같은 독을 먹었는데 어찌 멀쩡할 수 있겠는가?

전해지는 기록에 의하면 간혹 체질적으로 그 사약의 약효가 발현되지 않는 자가 있다고는 한다. 그러나 보통 사람이 단지 믿음이 좋다는 것으로 그 사약에 안전할 수 있을까?

 

주님께서 말씀하신 믿는 자에게 따르는 그 표적이라는 것은 아무 때나 아무 장소에서 무작정 드러나는 그 일을 말함이 아니다. 오락거리로 불 쇼를 하듯이 보여주기 위한 볼거리로 그렇게 드러낼 수 있는 그런 현상으로서의 표적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주의 일을 이루기 위해 허락된 순간에 나타나는 능력이다. 표적은 사람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행하는 그 일이다.

 

만약 우리가 자신을 과시하려고 방언을 하려거나, 귀신을 쫓아내려거나, 뱀을 집으며 독을 마시려거나, 안수하여 병을 고치려고 든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는 일이 되고 말 것이다. 결국 이런 행위는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음을 결과하게 된다. 이 표적들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그 일을 행할 때만 드러나는 그 일이 되어야 한다.

(신 5:11)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는 줄로 인정치 아니하리라

 

제자들이 온 천하에서 모인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그 일은 분명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그 일이었다. 그곳에 모인 자들이 경건한 유대인들과 유대교에 입교한 자들이라고 성경은 언급하였으니 분명히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구원 얻기로 예비된 자들이었을 것이다. 그 소중한 자들에게는 그 순간이 대단히 긴급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 순간에 그들이 복음을 듣지 못한다면 영영 기회를 얻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이 역사하여 제자들로 하여금 각 지역의 방언으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는 그 일을 이루신 것이다. 우리가 방언을 하는 것도 그 순간에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그 기도를 들어주시려고 은혜를 허락하시는 그 순간일 것이다.

 

이런 표적들은 은사에 해당한다. 이 은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을 행함에 필요한 도구일 것이다. 따라서 믿는 자의 그 역할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그 필요를 채우도록 은사를 선물로 주신다. 사도바울은 이것에 대한 우리의 마음 자세에 대해 교훈했다. 세상적인 욕심으로 이 은사를 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주어진 역할에 충성하는 자세를 가질 것을 가르치셨다.

(고전 12: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고전 12:29)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고전 12:30)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고전 12: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간혹 우리라도 어떤 때는 이런저런 은사에 대한 욕심을 품을 때가 있다. 병 고치는 은사를 행하는 것을 보면 나도 저런 표적을 행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기도 한다. 또 제자들처럼 그렇게 외국말을 배우지도 않았는데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하와가 선악과나무를 보고 그것이 자신으로 하여금 지혜롭게 해줄 만큼 탐스럽다고 여긴 그 유혹과 같은 것이다. 그 유혹을 이겨내는 것은 참된 믿음의 사람으로서의 본분이다.

(창 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제 다시 돌아가서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라는 말씀에 대해 고찰해보자.

과연 믿음의 사람이라면 뱀을 집어도 탈이 없을까?

 

거듭 언급하지만 믿음의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표적이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그 일을 행함에서 드러나는 그 표적을 말한다. 주님께서 믿는 자에게서 나타나는 표적을 말씀하실 때 그 전제로 언급하신 것이 “너희는 온 천하를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이 표적은 복음을 전하는 그 일을 행할 때에 필요로 하는 그 표적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온 천하에서 모인 선택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방언을 성령의 은혜로 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때 그곳에 모였던 사람들이 모두 놀랐고, 그들은 그 방언의 덕분에 복음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사도바울이 로마로 압송되어 갈 때 그 배가 파산되어 멜리데 섬에 도착했다. 그때 그 섬의 원주민들은 바울을 통해 복음을 전해들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이미 권념하셨기에 바울을 그리로 보내셨을 것이다.

 

그 원주민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특별한 표적이 필요했을 것이고, 그 표적은 바울이 독사에 물렸지만 엎드려져 죽는 일이 발생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을 신이라고 고백함으로써 바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우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 후에는 바울이 병자들을 기도하여 낫게 하는 표적을 보였다. 이런 표적들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그 일에 매우 유용하고, 효율적인 수단이 되었을 것이다. 그 결과로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였을 것이라고 짐작하게 해주는 사건이 후한 예로 대접하고, 바울이 그 섬을 떠날 때 바울 일행이 쓸 것까지 배에 실어 올리는 일을 행한 그 사건이었다.

(행 28:1) 우리가 구원을 얻은 후에 안즉 그 섬은 멜리데라 하더라

(행 28:2) 토인들이 우리에게 특별한 동정을 하여 비가 오고 날이 차매 불을 피워 우리를 다 영접하더라

(행 28:3) 바울이 한 뭇 나무를 거두어 불에 넣으니 뜨거움을 인하여 독사가 나와 그 손을 물고 있는지라

(행 28:4) 토인들이 이 짐승이 그 손에 달림을 보고 서로 말하되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원을 얻었으나 공의가 살지 못하게 하심이로다 하더니

(행 28:5) 바울이 그 짐승을 불에 떨어버리매 조금도 상함이 없더라

(행 28:6) 그가 붓든지 혹 갑자기 엎드러져 죽을 줄로 저희가 기다렸더니 오래 기다려도 그에게 아무 이상이 없음을 보고 돌려 생각하여 말하되 신이라 하더라

(행 28:7) 이 섬에 제일 높은 사람 보블리오라 하는 이가 그 근처에 토지가 있는지라 그가 우리를 영접하여 사흘이나 친절히 유숙하게 하더니

(행 28:8)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웠거늘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 하매

(행 28:9) 이러므로 섬 가운데 다른 병든 사람들이 와서 고침을 받고

(행 28:10) 후한 예로 우리를 대접하고 떠날 때에 우리 쓸 것을 배에 올리더라

 

세상 사람들이 대개 가지는 그 관심사는 물질세계에 관한 것이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이 아니라면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라는 말씀을 접하게 되면 세상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든다. 그러면 “어떻게 사람이 맹독을 가진 독사에게 물렸는데 아무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말에는 모순이 있다.”라고 판단하게 된다. 배가 파선이 되어 바울이 도착한 멜리데 섬의 원주민들도 그와 같이 생각했다.

 

“믿는 자가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는다“라는 그 말씀 그대로 뱀을 집어도 해를 받지 않을 수 있음이 바울을 통해 입증되었지만 이 말씀에는 그보다는 영적인 의미가 더 내포되어 있다. 믿음의 백성된 우리가 행하는 일들의 대부분은 세상적인 물질세계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영적세계에 초점이 맞추어져있다. 따라서 이 말씀도 영적세계에 관한 말씀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영적세계에서의 뱀이 상징하는 바는 바로 사단이다. 우리의 시조 아담을 범죄 하도록 유혹한 자인 사단이 뱀의 모양을 하고 하와에게 다가왔다. 아담은 죄를 범했고, 그 죄는 결국 그의 삶을 고난과 고통으로 점철되게 하더니 끝내는 사망에까지 이르게 하였다.

(창 3:1)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창 3: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창 3: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창 3: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창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뱀의 그 독은 죄라는 모양으로 나타났고, 그 독으로 인해 사람은 고난과 고통의 나날을 보내다가 결국은 죽음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렇다고 그 사람 아담이 죄를 지은 그 책임이 뱀에게 있다고 할 것은 아니다. 그 뱀이 물도록 허락한 것은 그 사람이었으니, 당연히 그 사람이 죄를 지음은 전적으로 그의 책임이었다.

(창 3: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창 3: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 3: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창 3: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그런데 믿음의 사람이 되면 더 이상 사단은 그 믿음의 사람을 유혹할 수 없다. 믿음의 사람이란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남을 입은 중생한 자이다. 중생한 자는 그의 영혼이 살아났기에 능히 사단을 분별할 수 있게 되었고, 또한 하나님의 음성도 들을 수 있는 자가 되었으니 말씀의 검으로 무장한 자를 어찌 사단이 유혹할 수 있겠는가!

 

말씀으로 무장되었다함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의미한다. 애초에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온전히 무장하지 못하였기에 사단의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는 사단이 유혹해왔을 때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하여 응대한 그것에서 알 수 있다.

(창 2: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 3: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창 3: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따라서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는 하나님이 함께 하는 자는 마귀의 미혹의 해를 받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며, 복음을 전파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보호와 권능이 주어질 것에 대한 약속이기도 한 것이다.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라는 말씀이 영적세계에서의 사단에 관한 말씀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그 단서를 제공하는 성경구절이 존재한다. 그것은 누가복음 10장에서 주님이 직접 하신 말씀이라고 기록된 바로 그 부분이다.

 

예수께서 복음을 전하라고 명하셔서 파송된 칠십 인의 전도자들이 돌아왔을 때 그들은 기뻐하며 자랑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을 항복시켰다”는 것이다. 이때 예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뱀을 밟는다는 것은 또 다른 면에서 뱀을 집는다는 것과 같은 의미일 것이다. 또한 누가복음의 이 구절에서 주님이 언급하신 뱀은 분명히 사단을 지칭하는 영적의미에서의 그 뱀이었다.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에서 각각 그런 말씀을 하신 이는 분명히 동일인이신 주님이셨다.

 

따라서 마가복음에서 말씀하신 그 뱀도 역시 사단을 상징하는 그 의미에서의 뱀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또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고 하신 그 말씀도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라는 그것과 같은 의미로 이해함이 타당하다.

 

그러므로 그 독이라는 것은 사단의 흉계로 인한 그 죄 지음에서 발생하는 고난과 고통 그리고 그 결국에 따른 영원한 죽음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참된 믿음에 이른 자는 바로 이런 독으로부터 자유로운 자가 된다.

(눅 10:17)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눅 10:18)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눅 10:19)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눅 10:2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참된 믿음의 소유자가 사단의 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그가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따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믿음의 사람에게는 자신의 모든 문제를 주님께 내어맡길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진다. 이는 하나님께서 믿는 자에게만 허락하시는 특별한 혜택이다.

 

그런 은혜를 입은 믿음의 사람에게 주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모두 내게로 와서 그 짐을 모두 맡기라”고 하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란 사단의 그 독으로부터 생겨난 그것들이다.

 

주 예수는 성자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이 이 땅에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은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려고 오셨으니, 우리가 주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그 무거운 죄의 짐을 주님께 모두 내어맡김이다. 우리의 그 무거운 모든 짐을 대신 지시는 이것이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그 지극하신 사랑인 것이다.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 11: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그 칠십 인의 전도자들에게 사단을 이긴 그 능력의 근원이 바로 자신에게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능력을 그들에게 주었기 때문에 그들이 사단을 물리치는 그 일을 할 수 있었다고 하셨다.

 

그렇다. 우리의 능력으로는 결단코 그 사단을 이겨 물리칠 수 없다. 사단을 이길 수 있는 존재는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그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기도하는 믿음의 생활이다.

 

이 사실을 깨닫는 것은 바른 믿음의 생활을 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이 된다. 그래서 주님은 그 칠십 인의 전도자들을 보내심으로써 그 일을 통해 이런 가르침을 베푸셨고, 그들로 하여금 깨달을 수 있도록 하셨던 것이다.

 

만약 이런 사실들에 대한 깨달음이 없이 우리가 무엇인가를 행하는 바가 있다면 그 일들은 모두 허사가 되고 말 것이다. 이 깨달음이 없다면 어쩌면 우리가 행하는 그 일들 모두가 우리의 능력이라 하고, 또 우리 자신의 공로라고 주장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이 되어 질까?

 

이처럼 우리의 구원 얻음에 있어서 이 사실에 대한 깨달음이 중요하기에 주님은 칠십 인의 전도자를 선택하시고, 그들에게 복음 전하는 그 일을 행하게 하시는 그것을 처음부터 작정하셨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전도자들은 사단을 굴복시킨 그 일로 기뻐했다. 그러나 그들이 진심으로 기뻐해야할 그것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깨닫는 것은 구원 얻을 그들의 바람직한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절대 필요한 일이 되었다. 이것은 참된 믿음의 사람들 모두에게 적용되는 일이기에 주님은 이 사건을 처음부터 작정하셨을 것이다.

 

그 전도자들은 자신들로서는 이전에는 감히 할 수 없었던, 사단을 항복시키는 그 놀라운 능력을 경험함으로써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참 믿음의 사람들이 된 자신들이 천국의 소유자로 등록되었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하신 이 말씀은 그들의 구원에 대한 완성을 선포하신 말씀인 동시에 구원 얻는 그 일에 대한 보증의 말씀이었으니 이 말씀보다 기쁜 말씀이 있을 수 있겠는가!

우리가 구원을 얻는 그 일이 가장 복된 일이 되며, 이 일보다 기쁜 일은 있을 수 없다. 이 구원의 완성은 하나님께서 참된 믿음의 사람에게 주시는 가장 큰 선물이다.

 

이 기쁨에 대한 깨달음을 주시려고 주님은 그 칠십 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그 일을 시키셨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그 일은 우리의 구원과 그렇게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