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예수께서 부활하셔야만 했는가?
2023. 4. 9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왜 우리에게는 부활이 필요한가?
하나님이 아담과 행위언약을 맺으셨다. 이는 그에게 복을 주시려 함이었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은 그 아담을 통해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셨다. 영광 받으신다는 것이 하나님 편에서의 이기적인 행위로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그 일은 곧 아담의 행복을 위한 그 일이 됨이다.
(시 22:23)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지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지어다
(고전 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고전 6: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하나님이 영광 받으신다는 것은 아담이 하나님을 전능자로 찬양함으로 인함이며, 또 한편으로는 전능자라는 것은 모든 것에 대한 기원이 됨을 의미한다. 전능하시니 모든 것이 있게 하시는 원인자이시니, 이는 곧 창조자가 됨을 의미한다.
(대하 30:21) 예루살렘에 모인 이스라엘 자손이 크게 즐거워하며 칠 일 동안 무교절을 지켰고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은 날마다 여호와를 칭송하며 큰 소리나는 악기를 울려 여호와를 찬양하였으며
복이라는 것도 하나님이 지으신 것 중의 하나일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래서 아담을 복되게 하실 수 있는 유일하신 존재가 바로 하나님이실 것이다. 그런고로 하나님이 영광 받으심은 아담과 그로인한 후손된 우리에게 복을 주려 하시려는 그 처사이시다.
하나님의 이 의도가 담겨진 그 언약에는 아담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자신의 삶을 성화시켜가도록 하는 일이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 언약에 따른 아담의 삶은 반드시 변화를 수반할 수밖에 없었다. 어제보다는 신앙적으로 성숙한 변화를 이룬 오늘이 있어야만했고, 오늘과는 또 다른 성화된 내일이 있어야만했다.
그런 과정 속에 아담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택을 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그 삶이 되게 해야만 하는 신앙적 책임과 의무를 감당해야만 했다. 이 일의 결국은 한 점 흠 없이 하나님 앞에 완전한 순종을 이루는 그 경지에까지 나아감으로써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한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그 삶이 되게 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아담에게 자유의지를 주셔서 매 순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 선택을 스스로 할 수 있게 하셨다. 그런데 이 자유의지는 양날의 검과 같은 것이었다. 칼이 수술용으로 잘 사용되면 사람을 살리는 도구가 되고, 강도의 손에서 잘못 사용되면 사람을 죽이는 도구가 되듯이 자유의지도 그랬다. 자유의지가 이처럼 위험한 도구가 된다는 것을 하나님이 모르시고 아담에게 주셨을까!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전지하시니 아담이 이 자유의지를 어떻게 사용하게 될 것을 이미 내다보셨고, 그 결과도 어떻게 됨을 아시고도 그리하셨다. 왜 그리하셨을까?
하나님의 이 의도를 의문하는 자가 많을 것이다. 그 답을 알기란 용이하지 않을 것임에는 분명하다. 그래서 이 답을 하나님이 스스로 밝히셨으니 그것이 예수께서 두 아들의 예화를 통해 밝히심이었다.
(눅 15:11)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눅 15:12)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눅 15:13)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눅 15:14)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훙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눅 15: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눅 15:16)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을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눅 15: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눅 15: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눅 15: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눅 15: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 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눅 15:21)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눅 15: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눅 15: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눅 15: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눅 15: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웠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눅 15: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눅 15: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 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눅 15:28)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눅 15:29)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눅 15:30)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눅 15: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눅 15: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누구나 자신이 스스로 경험을 통해 어떤 사실에 대한 깨달음을 얻게 될 때, 그 깨달음이 가장 확실한 앎이 될 수 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떠나 잘못된 길을 걸었을 때 비로소 아버지의 소중함과 그 사랑을 깨닫게 되었고, 참된 아들이 자리에 설 수 있었다.
그때의 부자 관계가 진정한 부자 관계였다. 맏아들은 그런 경험이 없었기에 아버지의 소중함과 그 사랑을 깨닫지 못했고, 그래서 참된 효를 다하는 아들의 자리에 설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 아담이 잘못된 선택을 하고 하나님을 떠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서게 된 그것을 지켜보시는 그 심정이 어떠했을까!
가슴이 무너지는 아픔을 참아내시기까지 하시면서 아담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그 자리에 돌아올 수 있도록 길을 여시는 그 일을 하신 것이다. 아담을 위해 그리고 우리를 위해 그 모진 고통을 참아내신 아버지 하나님이 아니신가!
사람은 하나님과는 다르게 유한한 존재로 지음을 입었다. 창조자가 아니라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피조물은 그 능력에서 전능하지도, 전지하지도 못하다는 것이다.
왜 하나님은 우리를 이처럼 유한한 존재로 창조하셨을까?
하나님이 그 피조물을 창조하신 의도는 피조물인 그에게 복을 주어 복된 자로서 하나님과 사랑의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그 자리에 세우시려 하심이었다. 이로써 하나님은 사랑의 본체로서의 그 모양을 스스로 드러내시고, 그 사람의 복된 삶을 지켜보심으로써 기쁨을 얻으시려고 하셨다.
창조자는 항상 피조물에게 자신의 것을 줌으로써 만족함과 행복감을 느낀다. 반면에 피조물은 창조자로부터 받음으로써 자신의 부족을 채워 행복을 누릴 수 있기에 받음에 대한 감사를 드림으로써 창조자를 기쁘게 하는 일을 이룬다.
이러한 관계가 창조자와 피조물과의 관계에서의 사랑일 것이다. 만약 그 피조물이 창조자와 같이 전능하고 전지하다면 그 피조물은 창조자로부터 받을 것이 전혀 없을 것이니, 이 둘 사이에 사랑의 관계란 이루어 질 수 없다.
어쩌면 창조된 그 순간부터 이 피조물은 창조자로부터 분리된 그 삶을 살 것이니, 이는 남남과 같은 관계로서 어떠한 사랑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경우라면 둘 중에 어느 한편도 복되다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피조물인 우리를 하나님보다 못한 유한한 존재로 지으신 것은 오직 우리를 사랑하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의 그 의도에 따름이었다. 또 다른 입장에서 우리를 유한하게 창조하신 것을 살핀다면 천사의 창조에서 그 이유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천사는 우리와는 다르게 능력면에서 월등한 존재로 지으셨다. 천사는 하나님께서 부리실 종으로 지으셨으니, 만약 그 종이 유능하지 못하다면 주인의 뜻을 제대로 분별치 못하고 그릇되게 일을 처리할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을 주인의 입장에서 기뻐할 수 있을까!
(계 19: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계 19:10)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더러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거를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 하더라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전능에 가까울 정도의 능력자로 지으셨다. 그런데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바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될 줄을 모르시고 그리 하셨을까?
자신의 능력으로 능히 하나님을 대적하여 그 자리를 탐할 수 있다고 판단한 천사가 바로 사단이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인식보다는 그 욕심이 앞서서 자신의 자리를 벗어나는 행동을 취하였고, 하나님과 대적하여 싸움을 시작한 것이다. 이 일은 결국 사단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당신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실 대상, 즉 자신의 자녀로 삼으시려고 창조하신 그 사람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켜놓는 그 일에 대한 유혹자가 되게 하였다.
(계 12:7)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계 12:8)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계 12:9)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창 3:1)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창 3: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창 3: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창 3: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창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우리가 만약 사단처럼 그렇게 전능자에 가까울 정도의 능력자로 창조되었더라면 우리도 능히 하나님을 대적하여 겨루는 그 자리에 섰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천사보다 못하게 창조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천사보다 귀하게 여기지 않으심이 아니라, 천사와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려 함이었다. 천사는 단지 부리는 종으로 쓰려하심이었고, 우리는 당신의 자녀 되는 자리에 세워 사랑하시려함이었다.
(시 8:4)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시 8:5)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사랑받기 위해서는 부족함의 여백이 있어야 한다. 부모가 어린 자식을 돌보는 것은 사랑을 줌이다. 만약 그 아이가 완전한 성년으로써 그 사회가 인정하는 그런 능력자의 자리에 서게 된다면 그때는 그 사랑 줌이 어린아이의 시절과는 확연히 다를 것이다.
만약 우리가 처음부터 능력자로 창조되었더라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것이 무엇이 있을 수 있었을까?
그런 관계에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지극히 사랑한다 할 수 있을까?
있다면 그것은 마음뿐일 것이다.
그런 사랑이 우리를 감동시킬 만큼 아름답고, 그래서 하나님을 크게 찬양하는 그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사단을 능력자로 지으실 때 하나님께서는 그가 우리를 유혹할 그 자리에 설 것을 모르셨을까?
능력자가 된다는 것은 그 만큼의 책임이 또한 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린아이 때에는 잘못을 범하여도 크게 처벌받지 않는다. 아직 그런 것을 감당할만한 능력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 일에 대한 책임을 질만한 능력이 그에게 있다함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물으실 그 책임은 실로 엄청나다 할 것이다. 하나님을 배반하기는 사단이나 사람이나 매일반이다. 그런데 사단에게 그 큰 책임을 물으시는 것을 보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사 그리하셨구나 하는 것을 느끼고, 깨닫게 될 것이다.
어쩌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당신을 그런 하나님으로 깨달을 수 있도록 하시려고 그리하셨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함께 하게 될 그때에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하시려고 이미 창조의 그 시작에서부터 그렇게 하셨던 모양이다.
우리와 사랑을 나누시기 위하여 우리를 창조하셨던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아담이 하나님을 배반함으로써 이 관계는 깨어져버리고 말았다. 하나님은 아담으로부터 실연을 당하신 것이다. 우리가 사랑에 눈을 뜨고, 드디어 첫사랑을 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우리를 향한 그 사랑의 어떠함을 우리로 하여금 느껴 깨달을 수 있게 하시려함은 아니었을까?
첫사랑의 그 달콤함을 깊이 느낄수록 실연의 그 아픔은 더욱 강렬하게 다가온다. 이 아픔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다.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운 이 아픈 고통을 우리가 당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그 실연의 아픔이 너무나도 컸음을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하려하심이 아니었을까?
떠나버린 그 사람을 잊지 못해 몇 날을 앓아 누웠던 그 고통의 순간을 경험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 하나님께서 그렇게 자신의 목숨처럼 아껴 사랑한 그 사람을 죽일 수 있겠는가!
선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그 약속은 결코 무효로 할 수 없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에 아담에게 사형을 선고해야만 하는 재판장의 입장에 서신 하나님이셨다. 과연 누가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그 재판장의 자리에 설 자신이 있을까!
하나님을 그런 자리에 세운 자가 바로 아담이니, 이는 우리의 시조였다. 그래서 나 또한 하나님을 그런 자리에 서게 만들었으니 이 일을 어이할꼬!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일들을 이미 영원에서 아셨기에 능히 그 대책도 세우셨다. 그것이 스스로 삼위로 되심이었다. 하나님의 본체 안에 세 인격이 존재하도록 하는 이 신비의 존재 양식이 바로 우리를 살리시려는 하나님 자신으로서의 사랑 표현 방식이셨다.
하나님의 속성에 위배되지 않는 방법으로 죄인된 우리를 살리실 그 계획과 실천 양식이 이 삼위일체 속에 담겨져 있음이었다. 삼위일체로 드러나심으로써 이룬, 우리를 사랑하여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이 놀라운 사랑의 표현 방식에 우리가 어찌 입을 다물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그 약속에 따라 아담에게 죽음의 선고를 내리셨으나, 그 시행을 즉각적으로 하는 대신에 그 집행을 그가 그 땅에 사는 기간 동안 연기하셨다. 그에게 기회를 주심이었다.
(창 3: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창 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그가 에덴동산을 떠나 세상을 향해 가던 그 날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혀 주시면서 그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셨다. 아담은 무화과나무의 잎으로 옷을 지어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려보려고 하였다. 그 부끄러움은 자신이 죄를 지음으로부터 나온 그 부끄러움이었다.
(창 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창 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그러나 그 옷은 영원히 자신의 그 부끄러움을 가리지 못했다. 이는 우리가 우리의 노력으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단적으로 드러내어 보인 일이다. 구원은 결코 우리의 노력이나 우리의 공로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지어 입히진 그 가죽 옷이 자신의 부끄러움을 영원히 가릴 수 있었던 것처럼 부끄러운 우리의 죄를 가리고 구원 얻는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만 얻어지는 것이 우리의 구원이다. 그래서 구원은 오직 하나님 은혜의 선물인 것이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그 사랑의 은혜만이 우리를 구원하여 살릴 수 있을 뿐이다.
(롬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딛 2:11)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사랑하시려는 하나님의 이 지독한 사랑의 열망은 결국 제 2위이신 성자하나님이 우리의 시간과 공간 속으로 들어오심으로 드러났다. 이 일은 이미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되던 그때에 하나님이 그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사건 속에 감추어져 있었다. 당신의 독생자를 희생의 제물로 삼으시고, 그 피로 우리의 죄를 덮으실 것을 그 가죽옷에 담아 표현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강압적으로 하시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니 그 능력으로 우리를 강압하여 능히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하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다면 그 사랑을 사랑이라 할 수 있었겠는가!
우리가 스스로 원하여 선택한 그 사랑을 하나님께서는 원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지극히 인격적으로 대우하시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그 사랑을 이해하여 진정한 사랑을 깨닫고 난 후에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그 사랑을 원하셨다. 아담을 그 땅에서 생명을 연장시켜주신 것도 아담이 그 사실을 깨닫는 동안 기다려주신 시간이었다.
이 땅에서 그 깨달음을 얻으면 육신의 죽음 이후에 펼쳐질 그 세계 속에서는 우리가 참으로 진실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사랑의 교제가 실현될 것이다. 그때에는 하나님께서도 진정 원하셨던 그 기쁨을 얻으실 것이다. 이렇게 되도록 하라고 하나님은 참으로 많은 암시를 보내주셨다.
그 암시는 당신이 선택하신 많은 선지자들에게 주어졌다. 선지자들에게 성령을 주심으로써 깨닫게 하셨고, 선지자들은 받아 깨닫게 된 그 말씀을 전했다. 참으로 오랜 시간동안 이 일은 행하여졌으나 사람들은 여전히 죄로 인해 영안이 어두웠기에 잘 보지 못하고, 잘 듣지 못하여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반드시 살리시고, 당신과 더불어 사랑을 나누는 그 삶을 사시겠다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은 그 약속을 결단코 이루시는 자이시다. 선지자를 통해 당신의 뜻을 이 땅에 선포하신 그 일이 족하다고 여기신 그때에 드디어 당신의 독생자를 보내셨다. 그래서 성자하나님이신 예수로 하여금 인성을 입게 하셔서 이 땅에서 희생의 제물이 되는 그 일을 감당하게 하셨다.
그것이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나심이었다. 이는 오직 우리를 살리시려고 당신의 독생자를 모진 십자가에 다실 그 일을 위한 준비였다. 사람의 몸을 입으심으로 인성을 취하신 성자하나님이신 예수는 성부하나님의 그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여 십자가에 매달리심으로 우리의 시조 아담이 하나님의 그 약속에서 이루지 못한 그 순종을 이루어내셨고, 그래서 그는 둘째 아담으로서 마지막 아담의 자리에 서셨다.
(고전 15: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셨고, 드디어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를 할 수 있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피는 우리의 죄를 대신한 그 피였다. 이 피로써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해주셨고, 주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피의 공로로 우리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닌 의인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
(고전 15: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의인이기에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는 자의 신분을 얻은 것이다. 이는 곧 하나님의 자녀로 ‘수양’됨이었다. 하나님의 자녀라 칭함을 받는 이 놀라운 역사가 바로 하나님의 삼위 되어주심과 제 2위로서 하나님의 독생자로 출생하신 성자하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제물로 죽어주심으로 인한 결과였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고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였다. 그런데 왜 우리는 아직도 이 사랑에 온전한 감사를 표하지 못하는 것일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시려고 이 땅에 오셔서 스스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엄연한 역사이다. 다만 선택된 자들이 보는 이 역사적인 사건과 선택되지 못한 자들이 보는 이 사건은 전혀 다르다. 선택되지 못한 자들은 단지 역사적인 한 시점에서 한 사람 예수라는 사람이 빌라도에 의해 십자가형을 당한 일일 뿐이라고 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는 어떠한 감동이나 의미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선택된 자들에게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죄송함과 하나님의 그 사랑에 대한 깊은 감동을 느끼는 대사건이 되었다. 내 죄로 인해 존귀하신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그 수치스럽고 모진 고통을 당하셨으니 그 죄스러움이야 무엇으로 비겨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만약 주님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으심으로만 이 사건이 종결되었다면 어찌될까?
만약 그렇게 되었더라면 그는 메시야가 되시지 못하였을 것이다. 메시야는 죄인을 그 죄로부터 구속하는 일을 감당하실 자이다. 예수는 자신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그 일을 감당하셨으니 그는 분명 메시야임에 틀림이 없다. 자신의 백성을 그 죄에서 건져내는 일만 감당한다면 그는 무책임한 메시야일 것이다.
사람이 죄에서 건짐을 받는 것으로만 끝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때로는 그 죄의 구덩이 속으로 다시 빠질 수도 있을 것이고, 그래서 영원히 사는 그것에 대한 보장이 없을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참된 의미에서의 메시야는 우리를 죽음에 머무르도록 버려두어서는 안된다. 즉 우리의 부활에 대한 보증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다시 산다는 것은 곧 하나님과 함께하는 그 삶이 주어질 것에 대한 약속이다. 이 행복에 대한 보장을 메시야는 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는 그것으로 자신의 사명이 완수되었다고 할 수 없다. 우리의 다시 살 것에 대한 보장을 해야 했으니 그것이 바로 자신의 부활이었다. 이는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중요한 사명이다.
그가 마지막 아담으로서 다시 산다는 것은 우리 모두를 대표한 그 일이다. 이는 아담이 우리 모두를 대표하여 하나님과 행위언약을 맺었고, 그가 그 언약을 어김으로써 죽음에 이를 자가됨으로써 우리 역시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가 됨과 같이 인성을 지닌 예수가 부활하심은 곧 우리도 다시 살게 될 그것에 대한 보증이다.
가끔 죽었다고 판정된 사람들이 다시 살아난 일들은 존재한다. 그러나 이 경우는 육신이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훼손이 된 경우라기보다는 외관상으로는 훼손 없이 생체전기신호의 발생이 멈췄다가 알 수 없는 이유로 다시 작동한 경우이다. 그렇지만 이 사람도 끝내는 다시 완전한 죽음으로 끝이 난다. 영원히 죽지 않고 산 자는 없다.
하지만 예수는 외형적으로 신체의 훼손이 심각하여 도무지 다시 살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나 삼일 후에 그 신체의 훼손 상처를 지닌 채로 다시 살아났다. 부활하신 것이다. 이 부활은 우리가 죽어 신체가 부패되어 생물학적으로 살 가능성이 전혀 없을지라도 부활하게 될 것이라는 것에 대한 증거였다.
만약 우리가 이렇게 다시 살 것이 없다면 우리의 삶에 대한 태도는 전혀 다를 것이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부정한 자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오직 이 땅에 사는 동안에 누릴 그 낙만을 생각했다. 그래서 세상의 권세와 지위를 누림으로써 이 땅에서의 복을 누리려고 혈안이 되었다.
(마 22:23)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에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
(행 5:17)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그 결과로 그들은 고위 성직자로서의 화려한 삶을 누렸다. 우리 역시 부활이 없다면 이 땅에서의 화려한 삶에 목숨을 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부활의 신앙을 믿고 이 땅은 나그네와 같이 잠시 머무르는 공간으로 생각하기에 머무르는 동안 이 땅에서 가치 있는 삶을 살다가려고 애를 쓸 뿐이다.
예수의 부활에는 단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그 의미만 담겨져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부활한 몸은 이미 생전의 그 몸과는 전혀 달랐다. 그가 부활한 후에는 문이 닫혀져 있는 방에 문의 닫혀있음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오셨다. 벽을 그대로 통과하신 것이다. 우리의 몸은 결코 벽을 그대로 통과할 수 없다.
(요 20: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요 20: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요 20: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 20: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요 20: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요 20:24) 열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요 20: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요 20: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요 20: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공을 벽에 던지면 그 공은 벽을 통과하지 못하고 튕겨 나온다. 이는 우리가 익히 경험하여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우리의 경험적 사실을 거스르시는 거동을 보이신 것이다. 우리의 육신은 죄로 인해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 갇혀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벽이라는 장애물을 마음대로 통과할 수가 없다.
그런데 원자의 세계와 같은 미시세계에서는 이런 우리의 경험을 위배하는 일들이 일상적으로 일어난다. 전자가 벽을 마음대로 통과한다. 이를 ‘터널링 현상‘이라고 부른다. 소립자의 세계에서는 갑자기 있던 알갱이가 사라지고, 또 없던 알갱이가 불쑥 생겨나는 도깨비 같은 일들이 일상적으로 일어난다.
부활 후에 우리가 경험하게 될 기이한 일들에 대해 하나님은 그 암시를 이렇게 미시세계 속에 담아두셨는지도 모른다. 일부 선택된 자들만이 이 사실들을 보게 하심으로써 우리의 부활 후의 모습이 어떠할런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하셨는지도 모른다. 믿는 자들에게는 주님께서 자신의 부활하신 몸을 통해 우리의 부활 후의 모습이 어떠할런지를 직접 보여주신 것이리라.
부활한 육신은 더 이상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주님께서 승천하신 일은 이를 직접적으로 증명해 보인 일이었다. 사람이 공중으로 올라간다는 것은 물리학적으로 중력의 지배에서 벗어남을 의미한다. 중력의 법칙을 벗어난다함은 자유롭게 공간을 이동할 수 있음이며, 이는 이동 속도에 또한 제약이 없어짐을 의미한다.
(눅 24:50) 예수께서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눅 24:51) 축복하실 때에 저희를 떠나 [하늘로 올리우]시니
물체가 빠르게 이동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가속을 하여야 한다. 중력에 의한 중력가속도란 물체가 지상과 반대방향으로 빠르게 이동하는 것을 막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로켓이 빠르게 솟아오르기 위해서는 이 중력을 얼마나 극복하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그런데 주님이 그냥 공중으로 오르셨다. 이는 중력의 지배에서 벗어나셨다함이다. 중력을 벗어나면 그 이동 속도는 제한을 받지 않는다. 이 이야기는 결국 시간의 흐름에까지 영향을 미치는데, 무한히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면 그때는 시간이 멈춘다. 다시 말해 영생할 수 있음이다.
(막 16:12) 그 후에 저희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저희에게 나타나시니
(눅 24:31)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