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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로우심과 선하심에 관하여

영동장로교회 2023. 1. 29. 08:28

2023. 1. 29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로우심과 선하심에 관하여”

 

 

우리를 구원하여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그 의지는 그의 속성들 중에서 특별히 ‘도덕적 속성’에서 드러난다.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은 그의 ‘공유적 속성’에 속하는 것으로 크게 거룩하심(성(聖))과, 의로우심(의(義))과, 선하심(선(善))의 세 가지 성질로 구성되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란 무엇일까?

 

성(聖)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드러내는 가장 요체가 되는 성질이라 할 수 있다. 이 거룩하심이 하나님을 하나님 되시게 하며, 또한 그와 관계되는 대상들의 본질을 정의하는 기초를 형성하게 된다. 또한 이 성은 의와 선의 속성이 있게 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레 11:44)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길짐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레 11: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고전 3: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벧전 1:16)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이 거룩은 하나님 홀로 존재하실 때에는 드러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의 피조물과 관계를 맺을 때 비로소 드러나는 것이 바로 이 거룩하심이다. 하나님의 삼위 되심이 그의 피조물과의 관계를 통해 사역하심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드러남과 마찬가지로 그의 피조물과의 관계를 가질 때 이 거룩하심도 드러나신다.

 

거룩하심이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에 속한다는 것에서 이미 이 속성은 그의 피조물과 관계를 가짐에서 드러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덕이라는 것은 관계의 관념에서 출발하니, 따라서 거룩하심도 바로 이 관계의 관념에 속한다 할 것이다.

 

관계의 관념에서 하나님의 이 거룩하심을 살피면 이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고찰될 것이다. 하나는 ‘위엄적 성’이라 칭하는 것으로서, 이는 그 대상에 대하여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하나님의 성질의 탁월한 특징들을 구성하는 영광스런 완성들 중에서 특히 그 대상들과 구별되어 무한히 높은 위엄의 자리에 계심을 뜻한다. 이 위엄적 성이란 그 피조물에게서는 도무지 발견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을 뿐이다. 이는 관계의 관념에서 볼 때 그 피조물과는 완전한 분리에 놓임이다.

 

그러하기에 이 속성은 ’절대적 불가접근성‘, ’절대적 위압성‘, 혹은 ’무서운 위엄‘과 같은 관념들을 포함한다고 사고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위엄적 성‘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마음 속에 절대적 자비에로 인도하여가는 ’절대적 공무의 감(感)‘, ’피조물 의식‘, ’피조물 감‘을 일으키게 한다. 그리하여 이것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통로의 구실을 하게 만든다.

(출 15:11)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가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가 누구니이까

(삼상 2:2)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시 22:3)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사 57:15)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호 11:9)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왜 하나님은 죄를 그리도 미워하시는가?

 

하나님은 무한히 높은 위엄적 성을 그 속성으로 하시기에 거룩하지 못한 것과 관계를 하실 수가 없으시다. 바로 이 원리에 따라 그의 또 다른 거룩하심이 죄와 관계될 때 드러나는 것이 바로 ’윤리적 성‘이다.

 

윤리적 성도 관계의 관념에서 보면 역시 분리에 놓임을 말하게 되는데, 이때의 분리는 하나님의 죄에서의 완전한 분리를 말한다. 죄는 결코 하나님과 함께할 수 없기에 그는 거룩하신 것이다.

 

그래서 죄와 관계되는 하나님의 속성이 바로 ‘도덕적 속성’ 중에 ‘거룩’하심의 ‘윤리적(도덕적)’ 속성의 이 부분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 ‘성’의 효능으로 인하여 죄와는 교제하실 수 없으시니, 우리의 죄에 대해 당연히 책임을 물으시는 것이다.

(욥 34:10) 그러므로 너희 총명한 자들아 내 말을 들으라 하나님은 악을 행하지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결코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시고

(합 1:13)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히 12:14)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그러기에 특별히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대응하시는 그 속성이 바로 이 ‘윤리적 성’ 부분이다. 이 윤리적 속성은 죄인들로 하여금 죄에 대한 회오를 일으키게 한다. 따라서 이 속성은 결과적으로 ‘분배적 공의’의 속성으로 연결된다.

(사 6: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눅 5: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정리해서 정의하면 하나님의 ‘윤리적 성’이란 하나님께서 영원히 자기의 도덕적 안전을 유지하시면서, 자기의 도덕적 피조물들의 죄를 미워하시고 순결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완성을 뜻한다.

 

 

하나님은 왜 의로우신가?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것은 그가 자기 본질에서 바르심이 없이는 불가하며, 또한 그가 하시는 모든 행동에서 나타나는 성질의 바르심이 없이는 불가하다. 따라서 거룩하심이란 곧 그의 바르신 성질의 원인이 됨을 의미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것은 그의 성질이 바르심이니 이는 곧 그가 의로우심을 드러내는 원천이 되신다.

 

하나님의 그 거룩하심을 모방하여 그와 같이 거룩하게 만드는 그 일을 성의 한 양식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능동의 성’이라고 하기보다는 ‘타동의 성’이라 하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하나님이 그리하시는 그것을 ‘공의’라고 칭한다.

 

그렇다면 ‘공의’는 하나님의 정치에 순종하는 자와 불순종하는 자의 처우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성의 한 면이라 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이 공의로우시다는 것은 이미 그에게 의의 원천이 있으시다는 것을 함의한다. 하나님이 의로우시다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공의로우시다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이 의로우시다는 것은 그의 도덕적 속성들 중의 또 다른 한 속성으로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하나님이 의로우시다는 것을 내면적인 영역과 외면적인 영역으로 구분하여 살필 수 있다. 내면적인 의를 통상 ‘절대적 의’라 하고, 이는 그 자신의 실유의 무한한 도덕적 완전, 즉 보편적 의를 말함이다. 반면에 외면적 의는 ‘상대적 의’라고 하여 그의 도덕적 창조물들에 대하여 드러내시는 그의 무한한 의로움이시다.

 

하나님의 ‘고유적 의’(절대적 의)는 그가 자기의 피조물들과의 관계에서 ‘계시하시는 의’(상대적 의)에게 기초가 됨은 당연하다.

 

외면적 의인 ‘상대적 의’는 하나님의 자기의 거룩함을 침해하지 않도록 제어하시고, 모든 면에서 자신이 거룩한 자이심을 드러내는 신적 완성이시다. 그래서 ‘상대적 의’를 특별히 이름하여 ‘공의’라 칭한다.

 

 

하나님은 왜 율법을 주셔야만 했으며, 또 왜 그 율법을 준수하게 하셔야만 했는가?

 

하나님의 공의는 모든 피조물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될 때와 특별히 죄를 범한 자와 범하지 않은 자에게 적용될 때로 구별될 수 있다. 그래서 이 공의를 그의 피조물계를 통치하시는 정치적인 입장에서 통치주로서 드러내시는 공의와 그의 피조물계에 있어서 심판주로서의 입장에서 드러내시는 공의로 구분할 수 있다.

 

통치주로서 행하시는 그의 공의는 선인과 악인에 대하여 구별함이 없이 모두에게 발하시는 그의 바르심인데, 이는 세상의 도덕적 정치를 제정하게 하시며, 사람들에게 그의 율법 주시되 상선벌악으로 하시는 것에 대한 원인이 된다. 이와 같이 통치주로서 행하시는 공의를 ‘주재적 공의’라 칭한다.

 

반면에 심판주로서 행하시는 그 공의를 ‘분배적 공의’라 하고, 이것은 다시 의인에 대해 행하시는 ‘상선적 공의’와 죄인에 대해 행하시는 ‘벌악적 공의’로 구분한다. 의로운 자에게는 상을 베푸시고, 죄인에게는 반드시 그 죄에 대한 책임을 물으시는 하나님이심이 그의 공의로우심에 의해 드러남이다. 이처럼 공의는 특별히 각 사람에게 당연히 줄 것을 줌에서, 그리고 그의 공로에 의하여 대우함에서 나타난다.

(롬 13:7)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왜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선하셔야만 하는가?

 

하나님은 무한하심을 그 속성으로 가지신다. 이 속성은 그의 피조물과의 관계 여부에는 상관없다. 그래서 이 속성을 ‘비공유적 속성’이라 한다. 하나님이 무한하시다는 것을 시간과 공간 안에서의 무한으로 상상해서는 안된다. 이 무한은 양적인 의미에서의 무한이 아니라 질적인 의미에서의 무한이시다.

 

그러므로 이 무한하심에 의해 그는 완전하시다고 할 것이다. 만일 하나님의 어떤 성질에서 부분적 흠결이 있다고 한다면 무한하시다고 할 수가 없다. 무한하신 것은 그의 성질에서 그러하시다는 것이기에 이 무한은 곧 그의 완전하심을 함의하고 있다.

 

이성적 존재가 흠이 없고, 그래서 완전하다면, 그는 분명히 의로울 것이고, 선할 것이다. 의롭지 못한 것은 곧 그가 죄를 지고 있음이며, 선하지 못하다는 것은 악을 포지(抱持)하고 있음이다.

 

하나님은 완전하시다. 그러므로 그는 무한히 의로우시며, 선하실 수밖에 없으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의의 원인이시며, 선의 원인이 되신다.

 

 

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살아야 하는가?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말은 하나님으로서 당연히 되어질 바 그 전부를 의미한다. 그는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선하시다고 하는 것이니, 본질적으로 선하시어 그 자신에게 절대적 완전이다. 이 의미로 예수께서는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나니”라고 말씀하신 것이었다.

(막 10: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에서 선하셨기에 그 피조물에게도 선하실 수밖에 없으셨다. 애초에 하나님은 창조하신 모든 것을 선하게 창조하셨고, 그래서 보시기에 좋으셨던 것이다. 그래서 성경 기자들은 하나님의 그 선을 계속적으로 감사하여 찬양하라고 권고했다.

(시 136:1) 여호와께 감사하세 대저 저는 선하심이여 그 인자함이 영원하시도다

(창 1:31)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인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 ‘최고선’이시다. 최고선은 도덕적 이상이라 할 것이니, 그래서 사람의 최고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영원히 기뻐하는 것이다. 이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선은 기독교 윤리의 진정한 기초를 형성한다.

(요 17:4 )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하나님이 죄인인 우리를 살리셔야 하는 그 동기는 무엇인가?

 

이러한 하나님의 선하심은 그의 피조물과 관계를 맺으실 때 그 대상의 성질에 따라 결정되니, 곧 자선, 사랑, 은혜, 긍휼, 오래 참음이다. 이것들은 그 대상들에 따라 결정되는 하나님의 선의 여러 방면들이다.

 

자선은 일반 생물들을 향한 그의 선이시다. 이는 지각이 있는 피조물에 대해 가지시는 하나님의 애정으로서 인자하게 대우하시는 신적 완성이다.

(시 145:9)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을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

(시 145:10) 여호와여 주께서 지으신 모든 것들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성도들이 주를 송축하리이다

(시 145:15) 모든 사람의 눈이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때를 따라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며

(시 145:16) 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시나이다

 

사랑은 하나님 자신의 모든 복리를 전하여 주고 자기 자신과의 영적 우교를 위하여 우리들을 소유하시려는 하나님의 욕망이다. 이 경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전달하시려는 것은 하나님의 성(聖)이니 이를 전달하려는 의도는 하나님의 행정의 최고목표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그 거룩하심을 전달하시려는 것은 우리와 더불어 영원히 사랑의 교제를 나누고 싶어 하심 때문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니, 결코 죄인과 교제하실 수 없으시다.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죄를 제거하시고 당신의 그 거룩함을 입혀주려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현재라도 죄악한 상태에 있는 죄인에게서라도 자기의 사랑을 완전히 철수하지 않으신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니라 죄인의 죄는 하나님께서 가증한 것으로 여기시나 죄인 그 자신은 오히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로 인정하셔서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마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 5: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동시에 하나님이 신자들을 특별한 사랑으로서 사랑하심은 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의 영적 자녀로 보시는 때문이다. 그가 그들에게는 자신을 전달하시되 가장 충분하고, 풍부한 의미로, 자기의 은혜와 긍휼의 충만으로써 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 은혜와 긍휼을 받아 누림에 감사할 줄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요 16:27)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요일 3: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하나님의 이 사랑은 그의 감정적 행위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그의 거룩한 성의 법칙에 따른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하기에 그의 사랑으로 택하신 백성들에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요구하셨던 것이다.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을지라도 행복한 자임을 고백할 수 있는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은혜는 하나님의 속성일 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나타나는 총애를 의미한다.

(창 33:8) 에서가 또 이르되 내가 만난 바 이 모든 떼는 무슨 까닭이냐 야곱이 이르되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

(창 33:10) 야곱이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내가 형님의 눈앞에서 은혜를 입었사오면 청하건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창 39:4)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

(창 47:25) 그들이 이르되 주께서 우리를 살리셨사오니 우리가 주께 은혜를 입고 바로의 종이 되겠나이다

(룻 2:2)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내가 밭으로 가서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하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갈지어다 하매

(삼상 1:18) 이르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

(삼상 16:22) 또 사울이 이새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원하건대 다윗을 내 앞에 모셔 서게 하라 그가 내게 은총을 얻었느니라 하니라

 

성경에서 이 ‘은혜’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받을 권리를 잃어버리고 정죄 아래 있는 자들에게 향한 하나님의, 공로에 의지하지 않는 ‘선’ 혹 ‘사랑’을 가리킨다. 이는 결과적으로 ‘칭의’와 ‘생명’을 결과하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는 자기의 총애를 베푸시되, 자기 자신의 생과 복되심을 아무 공로도 전연 갖지 못한 자기의 도덕적 피조물들인 우리에게 전달하기를 추구하는 그의 ‘선’이며, 탁월히 죄악한 피조물들로서 하나님의 주시는 은혜를 감당하기가 불가능한 대상들인 우리에게 무한한 대가로써 행복을 취해주시는 그의 ‘선택애‘, 즉 ’선택해주신 사랑‘이라 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는 죄인인 우리들에게 베풀어지는 모든 ‘영적 행복의 원천’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본질적으로 행복한 자의 자리에 선 것이다. 비록 어떤 경우에 세상의 눈으로 볼 때 불행해 보이는 그것은 그저 외형일 뿐이다. 본질에서 행복함에는 변함이 없다.

(엡 1: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엡 1: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엡 2: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엡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딛 2:11)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딛 3:4)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딛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딛 3:6)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딛 3:7)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은혜는 죄인들에게 최대한 실제적 의미를 가질 것이니, 은혜로 죄인들인 우리에게 구속의 방도가 열리었고,

(롬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고후 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구속을 위한 사도들의 서신이 세계에 나갔고,

(행 14:3)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

죄인들인 우리들이 칭의되고,

(롬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영적 행복으로 부요하여지고,

(고후 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결국은 죄인이던 우리들이 구원을 물려받는다.

(엡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딛 2:11)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죄인들은 자기들의 공로를 절대적으로 가지지 못한 때문에 전연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뢰할 뿐이다.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신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나님의 ‘긍휼‘(mercy)은 ’불쌍히 여김‘(pity) 혹 ’민망히 여김‘(compassion)이라는 말로도 표현되는 하나님의 선의 한 면이다. 하나님의 ‘긍휼’은 그로 하여금 그의 피조물들의 고난에 대하여 ‘동정’을 느끼고 ‘구출을 계획’하기에 이르시게 하는 것이다.

(시 27:7) 여호와여 내가 소리 내어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고 또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

(시 59:17)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을 하나님 앞에 유죄하고, 무능하여, 용서하여 구해줌과 원조를 요하는 자로 상상한다면, ‘하나님의 긍휼’은 그를 범죄의 결과로 가련한 상태에서 수난하여 하나님의 구출을 요하는 자로 묵상한다.

 

하나님은 자기의 긍휼에 의하여 자기를 민망히 여기는 하나님으로, 고생 중에 있는 자를 불쌍히 보아 곤란을 면케 하여 주시는 자로 계시하신다.

다시 말해 죄인된 우리를 향한 구원을 이루시는 그 일에서, 우리를 ‘구원하실 것에 대해 의욕’하시는 것은 대개 하나님의 ‘은혜’에 따른 결과의 일이요, 이 의욕하심에 따른 ‘구속의 실행’은 대개 하나님의 ‘긍휼’에 따른 결과의 일이다.

 

정의하여 말하면 하나님의 긍휼은 고난 중에 있는 우리들에게 우리들의 허물에도 불구하고 행하시는 그의 ‘선’이다. 불쌍히 여김 혹 단순한 민망은 수난하는 대상에 향하여 나가는 ‘선’이요, 긍휼은 ‘유죄하여’ 수난하는 자에게 향하여 불쌍히 여김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성적 창조물들의 모든 수난은 유죄로 인한 것인즉 그들에게 향한 그의 민망은 항상 긍휼이다.

 

하나님의 긍휼은 홍대하며, 영구한 것이다.

(신 5:10)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시 57:10) 무릇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

(시 86:5) 주는 선하사 사죄하기를 즐거워하시며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함이 후하심이니이다

(대상 16:34)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대하 7:6) 그 때에 제사장들은 직분대로 모셔 서고 레위 사람도 여호와의 악기를 가지고 섰으니 이 악기는 전에 다윗 왕이 레위 사람들에게 여호와께 감사하게 하려고 만들어서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을 찬송하게 하던 것이라 제사장들은 무리 앞에서 나팔을 불고 온 이스라엘은 서 있더라

(시 136:1)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스(라) 3:11) 찬양으로 화답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이르되 주는 지극히 선하시므로 그의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하니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성전 기초가 놓임을 보고 여호와를 찬송하며 큰 소리로 즐거이 부르며

 

신약에서는 이것이 흔히 하나님의 은혜와 함께 언급되었으니, 특별히 서신들의 예식사에서 그리되었다.

(딤전 1:2)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딤후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딛 1:4) 같은 믿음을 따라 나의 참 아들 된 디도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하나님의 긍휼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시행된다고 반복하여 언명되었으나,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이 그들에게 국한된다 함이 아니라, 다만 그들이 특별한 분량으로 이것을 누린다 함이다.

(출 20: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신 7:9)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시 86:5) 주는 선하사 사죄하기를 즐거워하시며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함이 후하심이니이다

(눅 1:50)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하나님의 긍휼은 그의 모든 피조물에게 임하여 그를 경외하지 않는 자들이라도 이것에 참여하게 한다.

(시 145:9)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을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

(겔 18:23)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겔 18:32)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죽을 자가 죽는 것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

(겔 33:11)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눅 6: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눅 6:36)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죄인된 우리를 향한 구원을 이루시는 그 일에서, 우리를 ‘구원하실 것에 대해 의욕’하시는 것은 대개 하나님의 ‘은혜’에 따른 결과의 일이요, 이 의욕하심에 따른 ‘구속의 실행’은 대개 하나님의 ‘긍휼’에 따른 결과의 일이다.

 

 

하나님은 왜 그토록 오래 참으시는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long suffering)은 그의 선의 또 다른 한 방면이다. 이것은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긍휼이니, 긍휼의 연장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오래 참으심은 하나님이 완전히 죄인된 자와 악인의 계속적인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용서하여 참으시는 그의 선이다.

 

이 속성의 운용에 있어서 죄인은 교훈과 경고를 받음에도 불구하고 죄 중에 계속하는 줄로 묵상된다. 하나님이 오래 참으심은 당연한 심판의 미루심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이 속성이 운용되지 않으면 멸망을 면할 인생이 적을 것이나, 이것의 혜택으로 구원을 얻는 죄인이 많다.

 

성경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혹 더디 노하심을 밝히 말한다. 하나님의 이 속성은 그리스도의 성육신 이전의 전 시기에 나타났고, 지금이라도 자주 죄인들에게 보여진다.

(출 34:6)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민 14:18)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가 많아 죄악과 허물을 사하시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시고 아버지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느 9:17) 거역하며 주께서 저희 가운데 행하신 기사를 생각지 아니하고 목을 굳게하며 패역하여 스스로 한 두목을 세우고 종 되었던 땅으로 돌아가고자 하였사오나 오직 주는 사유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며 더디 노하시며 인자가 풍부하시므로 저희를 버리지 아니하셨나이다

(시 86:15) 그러나 주여 주는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오니

(시 103:8)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시 145:8)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자비하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욜 2:13)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욘 4:2)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롬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롬 2: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롬 9:22)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벧전 3: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은 또한 그리스도의 오래 참으심으로 나타났다. 특히 목이 곧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은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신 자”에게서 반영되었다.

(딤전 1: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벧후 3:15)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사 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우리에게 의를 요구하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거룩하시기에 의로우시며, 의로우시기에 선하시다.

하나님의 이러한 도덕적 속성들이 드러남은 그것들이 우리의 구원에 직접적으로 관계하시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의 공의하심은 죄에 대해 심판을 행하실 것을 함의하고 있었고, 그의 선은 우리를 살리실 것을 함의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우리를 구원하여 살리시려는 그 열망의 원천은 그의 도덕적 속성에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도덕적 속성을 지니셨던고로 끝내는 이 속성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죄에 빠진 우리에게 구속의 사랑을 베푸시게 하였고,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그 은혜 안에 거하는 하나님의 위대하고 무한한 사랑을 받아 누릴 수 있게 하였다.

 

우리에게 은혜와 긍휼을 베푸신 주의 놀라운 사랑에 진실로 감사와 영광을 돌려드리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