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2023. 1. 22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베드로가 그의 사랑하는 자들에게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벧전 2:11)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아담에게서부터 생겨나 하나님을 거역하게 한 그 욕심이 지배하고 있는 인격이 담겨있는 그릇인 그것을 베드로는 ‘육체’라고 칭하고 있다.
반면에 영혼이란 죄로 인해 죽음에 이르게 된 그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에 이를 자로 선택함을 입어 성령의 은혜로 중생하여 회개하고 믿음을 고백함으로써 성화의 길에 들어선 거듭남을 입은 자의 생명을 담고 있는 그 그릇을 ‘영혼’이라 칭한 것이다.
그래서 택하심을 입은 믿음의 백성들은 매일매일 자신을 죽음으로 이끄는 그 세력에 지배당하고 있는 육체와 영원한 삶으로 인도하는 그 세력의 보호를 받고 있는 영혼과의 끊임없는 투쟁을 하며 나아간다.
(롬 7:15)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롬 7:16)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롬 7:17)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롬 7: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롬 7: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롬 7:20)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롬 7: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롬 7: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롬 7: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롬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갈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 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성화 되는 삶은 처음에는 영혼을 거스리는 육체의 정욕에서 나오는 그 힘이 더 세다가 점차 영혼의 육체의 정욕을 이겨내는 힘이 강성해지는 쪽으로 나아간다. 그러하기에 베드로의 이 권면은 우리가 성화를 이루어가는 그 투쟁에 대한 격려의 권면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누구라서 이 일을 쉽게 해낼 수 있을까!
아브라함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두 번이나 그 땅의 최고 권력자들을 속이는 가운데서 당한 그 실패를 통해 이루어갔던 것이 바로 이 성화였으며, 야곱도 얍복강 나루터에서 천사와 겨루어자신의 환도뼈가 위골 되어가면서까지 이루어 간 것도 바로 이 성화였다.
(창 12:11)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를 때에 그 아내 사래더러 말하되 나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창 12:12)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고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창 12:13) 원컨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 하니라
(창 20:2) 그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보내어 사라를 취하였더니
(창 20:3)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취한 이 여인을 인하여 네가 죽으리니 그가 남의 아내임이니라
(창 20:7)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 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 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정녕 죽을 줄 알지니라
(창 20:9)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리 하느냐 내가 무슨 죄를 네게 범하였관대 네가 나와 내 나라로 큰 죄에 빠질 뻔하게 하였느냐 네가 합당치 않은 일을 내게 행하였도다 하고
(창 20:10) 아비멜렉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의견으로 이렇게 하였느냐
(창 20:11) 아브라함이 가로되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를 인하여 사람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창 20:12) 또 그는 실로 나의 이복 누이로서 내 처가 되었음이니라
(창 20:13) 하나님이 나로 내 아비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내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이후로 우리의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 하였었노라
(창 32: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창 32:25)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위골되었더라
(창 32:26)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 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창 32: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야곱이니이다
(창 32:28)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베드로가 언급한 육체의 정욕이란 어떻게 드러나는가?
아담은 자신의 내면에서 생겨난 그 욕심을 따라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어보려는 그 자리에까지 나아갔다. 그래서 스스로 그 일을 이루고자 하여 하나님과 같이 되게 해줄 것만 같아 보였던 선악을 알게 하는 그 나무의 열매를 먹었다. 그때 그는 그 열매를 먹기로 한 자신의 그 결정이 옳다고 굳게 믿었던 것이다.
(창 3: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창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창 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그날에 아담의 심정에 생겨난 그 욕심은 그대로 그의 후손들에게 유전되었고, 그 후손들은 그 욕심에 따라 자신이 행하는 바는 모두 옳다고 여겨 주장하는 그 아집이 본능 속에 고스란히 자리 잡았다.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는 이 일은 결국 욕망에 따라 생겨난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는 그 일을 멸하는 일이었고, 베드로가 정욕을 제어하라는 것은 곧 이 일을 하라는 의미가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그 베드로는 그 이전에 어떤 사람이었던가!
자신의 의를 가장 강하게 드러낸 주님의 제자가 아니었던가!
언제 어디서든지 주님의 질문하심에 가장 당당하게 자기 뜻을 피력한 자였다. 자신이 늘 옳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있었던 자였다. 주께서 “너희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하는 그 질문에도 가장 먼저 나서서 보란 듯이 대답한 자가 베드로였고, 변화산에서 초막 셋을 짓자고 주장한 이도 베드로였다.
(마 16:15)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 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마 16: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마 16: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마 16: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마 17: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 가셨더니
(마 17:2)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마 17:3)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마 17:4)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잡히시던 그 날에 예수를 잡으러 온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칼로 베어버린 그 일을 벌인 자도 베드로였다. 끌려갈 예수를 지켜서 이스라엘의 왕의 자리에 앉혀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생각이 옳다고 굳게 믿었기에 예수가 붙잡혀 끌려가지 않게 하려고 그렇게 한 것이었다. 그렇게 주님의 구속 사역을 이해하지 못한 채 자신의 그릇된 의에 사로잡혀있던 베드로였다.
(요 18:10) 이에 시몬 베드로가 검을 가졌는데 이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요 18:11)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요 18:12)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하속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요 18:13)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
주님이 마지막 만찬의 자리에서 고별 말씀을 하실 때 모두가 주를 버릴지라도 자신은 결코 주를 버리지 않겠다고 장담하던 자도 베드로였다. 언제나 자신의 의를 주장한 자가 바로 베드로였다.
자신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고, 그래서 항상 옳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있었던 자가 바로 베드로였다.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있던 주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아담에게서 생겨난 그 욕망을 본능으로 유전 받은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주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그 베드로가 주님의 수제자 자리에 있었다는 것은 아담의 그 욕망을 유전 받은 대표적인 인물이라는 의미에서의 으뜸이 되는 그런 자리에 있었던 제자였음을 뜻하고 있었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때로는 주님을 가르치려고 나서기도 했다. 그 상황에서 자신의 생각이 주님의 생각보다 옳다고 믿었고, 그래서 자신의 생각대로 자기주장을 편 것이었다.
(눅 18:28) 베드로가 여짜오되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요 6: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요 13:8)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요 13:9)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요 13:37)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과연 베드로만 그랬을까?
이 욕심 많고 자기 의로 가득했던 베드로가 변하여 이제는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이와 같은 권면을 하고 있다.
자신의 능력으로 이와 같은 깨달음에 이르러 이같이 말했을까?
주님께서 네가 새벽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나를 부인할 것이라 말씀하셨고, 그 말씀대로 그는 주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다. 바로 그 순간에 그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였고, 그래서 그는 깨달음에 다다랐다.
그 순간 그는 통곡하며 한없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그 눈물 흘림은 그때까지 자신을 지배하고 있던 그 욕망과 자신이 한없이 의롭다고 착각하게 만든 자신의 그 모든 의를 내던져버림이었다.
(요 13:36)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요 13:37)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요 13:3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마 26: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베드로처럼 우리가 은혜를 깨닫는 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놀라운 은혜가 임하는 그 순간에 우리는 그런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그렇게 베드로는 그 순간에 하나님의 그 은혜를 받았다. 그 순간에 대해 마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베드로가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주님의 말씀하심이 기억되어 생각하고 울었더라고.
(막 14:66) 베드로는 아래 뜰에 있더니 대제사장의 비자 하나가 와서
(막 14:67) 베드로의 불 쬠을 보고 주목하여 가로되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막 14:68) 베드로가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하며 앞뜰로 나갈새
(막 14:69) 비자가 그를 보고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다시 이르되 이 사람은 그 당이라 하되
(막 14:70) 또 부인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당이니라
(막 14:71)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의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막 14:72)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생각하고 울었더라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너도 예수와 한 패냐고 물었을 때 베드로는 부인하고 또 부인하다가 급기야는 저주하며 맹세까지 하여가며 예수를 모른다고 했다. 세 번째 저주하며 맹세하여 주를 모른다고 부인한 것은 아담에게 잉태되었던 그 욕망이 베드로에게서 최대로 드러난 순간이었다.
자신의 유익만을 구하며 억지로 자신이 옳다고 꾸며대는 그 순간의 모습이 그렇게 드러났다. 이 모습은 바로 인간 최대 모순의 그 순간에 대한 예시였다. 원죄를 지닌 죄인이기에 가능한 그 모습이었다.
그런 베드로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신 것은 하나님의 죄인을 향한 최고 사랑의 표현이었다. 이 사랑을 받아 누릴 자가 누구이던가! 바로 우리 모두가 아니던가!
아무리 내가 의로울지라도 내가 의롭다고 주장할 수 없는 것은 그 의가 나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 누가 의로울 수 있었던가!
모두 하나같이 예외 없이 죄 중에서 태어났으니 어디 그에게 의로운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롬 3:10)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 3: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롬 3:12)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우리의 원죄에 대한 값을 치르시고, 그 의를 예수와 연합한 우리에게 전가해주심으로 우리가 의로운 자라 칭함을 입을 수가 있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의가 있었기에 우리는 비로소 의로운 자의 자리에 오를 수 있게 되었고, 그 자리에 섰기에 의를 행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롬 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롬 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롬 6: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그런고로 우리에게 있는 이 의를 우리 자신의 것이라고 하고, 이로써 스스로 의를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 염치없는 일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그 의를 주신 이의 은혜로 여기고, 그 주신 자의 영광만을 위해 그 의를 사용하는 것이 참된 의인으로서의 마땅히 할 바일 것이다.
만일 그 의를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쓴다면 그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 의를 유용함이 될 것이다. 이런 행위자를 의로운 자라고 칭한다면 그 자체로 모순이 되고 말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의인은 결코 이 의를 유용하지 않을 것이니, 이 의를 자랑하지도, 주장하지도 않을 것이다.
(벧전 2:15)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벧전 2:16)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벧전 2:17)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
주님도 자신을 스스로 선한 자에서 제외하는 듯이 말씀하셨다. 선의 원천되시고, 의의 본질이 되시는 하나님이신 주님도 이렇게 말씀하심으로 스스로 의롭다고 주장하는 이 자리를 양보하셨는데, 누가 감히 스스로 의롭다 할 것인가?
(막 10:1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막 10: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자신을 구세주로 이 땅에 보내신 성부하나님 앞에 가장 겸손한 자의 자리에 서신 주님, 그래서 그는 스스로 참된 의의 표본이 되어주셨다.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리에서 내려온 베드로의 그 모습은 이전과는 전혀 달라졌다. 주를 위해 순순히 복종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이전의 베드로 모습에서 상상이나 할 수 있었던 모습이던가! 하나님이신 주님도 자신의 아래라고 여긴 베드로가 아니던가!
그런 베드로가 순순히 복종하라 권면하고 있다. 더더군다나 하나님에게가 아니라 인간이 세운 그 모든 제도, 그것도 그 땅의 왕이나 방백들에게 그리하라 하였다. 순복한다는 것은 자신이 스스로 의롭고 옳다고 하는 생각을 버릴 때나 가능한 일이다. 베드로가 말한 그때 그 땅의 왕이 누구이던가?
바로 로마의 황제이다. 때로는 폭군으로서, 때로는 기독교인들을 무자비하게 박해하던 자들이 아니었던가!
그런 자들에게 복종한다는 것은 불의를 참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참으로 힘든 권면이다. 그러나 그들을 그 위에 앉히신 자가 하나님이 아니신가?
그런 자들을 그러하다 하고 복종치 않는 것은 곧 하나님의 그 처사가 옳지 못하다고 하는 그 일이 된다. 그 누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하고 옳다함을 받을 자가 있는가?
다만 우리는 그 하나님의 뜻을 받들고, 하나님이 그리하신 그 뜻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하여 그 뜻대로 행할 뿐이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그 뜻대로 행하는 그것이 곧 사람들에게 선한 행위로 드러나 보일 것이다.
그렇다고 그런 선을 행한 우리가 우리의 능력으로 그 선을 행한 것이었는가?
아담의 그 행위로 인해 우리는 선을 행할 능력을 상실했으니 우리의 능력으로는 선을 행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주시는 그 은혜로 우리가 선을 행한 것일 뿐이다. 그러하니 우리가 칭찬받을 것은 애초에 아무것도 없다.
그렇게 행한 우리의 선은 곧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그 일로 이어질 것이다.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우리의 그 선을 행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로 나아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구원의 반열에 들어선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일이 될 것이며, 하나님은 그 일을 통해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바대로 그 선을 드러내어 보이라고 권면하고 있었다. 자신의 불의함을 깨달았을 때 이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은혜의 복음을 설파할 수 있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희망을 안겨준다. 이 큰 희망이란 우리도 그와 같은 깨달음을 얻고 하나님의 위대한 사역자로 설 수 있음에 대한 그 희망이다.
(벧전 2: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벧전 2:13)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벧전 2:14) 혹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
이제 우리는 베드로처럼 아담이 물려준 그 욕망에서부터 자유를 얻었다. 이는 주님의 그 십자가 공로로 취하신 그 의를 우리에게 전가해주심이니, 이로써 우리는 진정한 자유인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종노릇을 할 수는 없다.
(골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골 3:6)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골 3:7)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골 3:8)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골 3: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골 3: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자유하다는 것은 모든 것을 임의대로 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의 그 뜻에 따라 그 무엇을 행하는 그것이 바로 자유이다. 하나님의 그 뜻에 따라 행하지 않는 것은 여전히 죄의 종으로 매여 있음을 뜻한다.
자유는 하나님의 정하신 그 뜻에 따를 내 의지의 자율이다. 따라서 이 자유는 결코 사단의 그 유혹을 따르지 않는다. 사단의 유혹을 따른 아담은 에덴동산에서의 자유인이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로 악을 가리우는데 쓰고 말았다.
(창 3: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창 3:10)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창 3:11)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창 3:12)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자신의 그 잘못을 가리려고 하나님 앞에서 하와에게 책임을 전가한 것은 그의 자유의지의 남용이었다. 이는 베드로가 말한 대로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 그 일에 사용함이었다. 이런 경우의 자유는 참된 자유가 아니었다. 진정한 자유자는 오직 하나님의 그 뜻에 따라 행하니 이는 주인의 뜻대로 행하는 그 종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뜻대로 따르는 하나님의 종이라 할 것이다.
(벧전 2:15)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벧전 2:16)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벧전 2:17)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