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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으로 쓰신 기록들

영동장로교회 2022. 12. 18. 08:47

2022. 12. 18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사랑으로 쓰신 기록들”

-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을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셨다.

그렇게 택하심을 입은 그 이스라엘이 살고자하여 애굽으로 내려갔다. 이는 그 땅에 가뭄이 심하여 곡식을 얻기 어려워졌으나 애굽에는 곡식이 넉넉했음 때문이었다.

(창 41:53) 애굽 땅에 일곱 해 풍년이 그치고

(창 41:54) 요셉의 말과 같이 일곱 해 흉년이 들기 시작하매 각국에는 기근이 있으나 애굽 온 땅에는 식물이 있더니

(창 41:55) 애굽 온 땅이 주리매 백성이 바로에게 부르짖어 양식을 구하는지라 바로가 애굽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요셉에게 가서 그가 너희에게 이르는 대로 하라 하니라

(창 41:56) 온 지면에 기근이 있으매 요셉이 모든 창고를 열고 애굽 백성에게 팔새 애굽 땅에 기근이 심하며

(창 41:57) 각국 백성도 양식을 사려고 애굽으로 들어와 요셉에게 이르렀으니 기근이 온 세상에 심함이었더라

(창 42:1) 때에 야곱이 애굽에 곡식이 있음을 보고 아들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서로 관망 만하느냐

(창 42:2) 야곱이 또 이르되 내가 들은 즉 저 애굽에 곡식이 있다 하니 너희는 그리로 가서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사오라 그리하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하매

 

(창 46:1) 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발행하여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 아비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니

 

(창 46:5)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발행할새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바로의 태우려고 보낸 수레에 자기들의 아비 야곱과 자기들의 처자들을 태웠고

 

요셉의 덕분에 그 땅에서 환대를 받고 귀한 신분으로서의 삶을 사는듯했으나 끝내는 노예의 신분으로 전락했다. 택하신 그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신음하며 구원을 사모하던 그 날에 하나님은 그들을 그곳에서 구원해내셨다.

(창 47:1) 요셉이 바로에게 가서 고하여 가로되 나의 아비와 형들과 그들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가나안 땅에서 와서 고센 땅에 있나이다 하고

 

(창 47:5) 바로가 요셉에게 일러 가로되 네 아비와 형들이 네게 왔은즉

(창 47:6) 애굽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땅의 좋은 곳에 네 아비와 형들로 거하게 하되 고센 땅에 그들로 거하게 하고 그들 중에 능한 자가 있는줄 알거든 그들로 나의 짐승을 주관하게 하라

 

(창 47:11) 요셉이 바로의 명대로 그 아비와 형들에게 거할 곳을 주되 애굽의 좋은 땅 라암세스를 그들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고

(창 47:12) 또 그 아비와 형들과 아비의 온 집에 그 식구를 따라 식물을 주어 공궤하였더라

 

(출 1:8)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서 애굽을 다스리더니

(출 1:9) 그가 그 신민에게 이르되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출 1:10) 자 우리가 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갈까 하노라 하고

(출 1:11)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로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

 

그들이 스스로 찾아간 그 세상, 가나안을 버리고 내려간 그 애굽은 자신들에게 살 길을 열어주는 듯 했으나 끝내는 그들을 죽음과 같은 노예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왜 하나님은 그들이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을 보고만 계셨을까?

 

사랑하셔서 선택하신 당신의 자녀들이 애굽에서 노예로 살게 될 것을 하나님은 모르셨을까!

하나님은 전지하시고, 전능하시지만 또 한편으로는 인격의 원천이 되시는 존재가 아니신가!

그래서 이스라엘이 스스로의 선택으로 애굽을 향해가는 그 결정을 존중하셨다. 그렇지만 그들이 어떻게 될 것을 미리 내다보셨을 하나님의 그 심정은 또 어떠하셨을까!

 

낯선 곳을 향해가기에 두려워하는 그 야곱,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나도 함께 가겠으니 두려워말라고 위로하셨다. 만약 애굽에서 이스라엘에게 늘 좋은 세월만 있었더라면 굳이 하나님이 함께 동행한다하셨을까!

(창 46:2) 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시고 불러 가라사대 야곱아 야곱아 하시는지라 야곱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창 46:3)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비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창 46:4)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정녕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

 

누구나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능히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품안에 거하는 그 삶이 얼마나 행복한 삶인지를 알지 못했다. 부모의 품 안에서 사는 삶이 얼마나 행복한 삶인지를 모르기에 가출을 결심하는 청소년들이 더러 있다.

 

가출을 하고 그 모진 삶을 경험한 후에야 비로소 이전의 삶이 좋았다는 것을 깨닫고 후회하게 된다. 탕자의 비유에서 둘째 아들이 그랬다.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이 사실을 아시기에 이스라엘이 애굽을 향해가는 그것을 지켜만 보셨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그 노예 생활을 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그 마음이 편하셨을까?

자식을 키워본 경험이 있는 자들만이 하나님의 이 심정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누구나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잘 공감하지 못한다. 하나님을 사랑해본 경험이 없는 그들로서는 하나님이 자신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했으리라.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그렇게 마음 졸이신 하나님의 심정을 전혀 공감하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를 애굽으로 보내시려고 말씀하실 때 ‘이제“라고 언급하셨다. ”이제는 때가 되었다“는 뜻으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기 위해 필요했던 시간이 다 채워졌음을 선포하신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그 땅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는 동안 하나님은 편안한 잠 한번이라도 주무셨을까!

애끓는 맘 졸이시면서 이 날이 되도록 기다리신 것을 그 이스라엘이 알았을까!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이 아픈 사랑을 그들은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출 3:4)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출 3:5)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출 3:6)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우매

(출 3:7)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출 3:8)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출 3:9)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출 3:10)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그들을 그 땅에서 이끌어내셔서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답고 광대한 가나안 땅에 인도하시려는 하나님의 그 마음을 알 턱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심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그 지독한 사랑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을 그처럼 사랑하사 그런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드러내지 못했다.

큰 은혜와 사랑을 받았다면 당연히 감사해야 하는데, 그들이 그렇게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신앙적 지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의 그들은 신앙적으로는 어린아이와 같았다. 그러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을 당신의 품에 안으시고 엄마가 아기에게 부드러운 이유식을 떠먹여 기르듯이 그렇게 조심스럽게 정성을 다하여 그들의 신앙을 길러주셨다.

 

그들이 광야 길을 가는 동안에 더운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시고, 추운 밤에는 따뜻한 불기둥으로 지켜 보호하시면서, 또 그들이 배고플 때에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면서 당신의 사랑과 당신의 어떠함에 대해 가르치셨다.

(출 13:20) 그들이 숙곳에서 발행하여 광야 끝 에담에 장막을 치니

(출 13:21)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 하시니

(출 13:22)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출 16: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산 사이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제이월 십오일이라

(출 16:2) 이스라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출 16:3)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

(출 16:4)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 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출 16:5) 제육일에는 그들이 그 거둔 것을 예비할지니 날마다 거두던 것의 갑절이 되리라

 

(출 16: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출 16:12)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

(출 16:13)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사면에 있더니

(출 16:14)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세미한 것이 있는지라

(출 16:15) 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출 16:31) 이스라엘 족속이 그 이름을 만나라 하였으며 깟씨 같고도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

 

모든 아기들은 엄마의 그 음성을 듣고 기뻐하며 옹알이를 한다. 그러면서 그 엄마를 닮아가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그가 주시는 말씀에 대해 도무지 기뻐하지도 못했고, 따라 배우지도 않았다. 모세를 통해 하시는 그 말씀에는 늘 투정하고 불평과 불만만 쏟아낸 그들이었다.

 

만약 내 아기가 그 이스라엘처럼 그렇게 한다면 어찌할꼬!

 

신앙적으로 모범이 되는 족속들로 키우시고 싶으셨던 하나님이셨다. 그래서 온 땅의 족속들이 그런 이스라엘을 보고 하나님에게로 나아와 영광 돌리는 그 일이 그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셨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도무지 변화가 없는 그들이었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아야 하는 참담한 하나님의 심정을 성경은 신인동형동성론(神人同性同形論)적으로 표현하여 기록하고 있다.

(註:여호와를 인간의 용어로 표현하거나 혹은 인간의 품성을 지닌 것처럼 묘사하는 것을 ‘신인 동형 동성론’(神人同形同性論)이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것을 가리켜 “이는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낸 하나님이다“라고 말하여 우상에게 신앙고백을 했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어찌 우상과 같은 존재이던가!

(출 32: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출 32:8)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숭배하며 그것에게 희생을 드리며 말하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대해 아는 신앙적 수준이 그 정도였다. 우상을 가장 싫어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이스라엘이 전혀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했다면 하나님이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또 무엇을 가장 싫어하시는지를 알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그리했더라면 그들이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우상을 만들었을까?

 

그렇게도 많은 이적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셨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의 신앙적 지식을 얻으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그때 그들은 세상적인 욕망에 사로잡혀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것을 바라볼 수 없었다.

 

우리라고 그 이스라엘과 다르랴!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이스라엘처럼 그렇게 세상에 사로잡혀있으면 우리의 신앙도 결코 성숙한 신앙에 이르지 못하고 끝내는 하나님을 실망시켜버리고 말 것이다.

 

신앙적 지식이 없었으므로 그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으로 들어가게 하마”하신 하나님의 그 약속에 대해 신뢰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신들을 위해 산 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준비하는 모세를 인내하며 기다리는 그 일을 끝까지 해내지 못했다. 결국 그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내었고 그것으로 하나님을 대신했다.

 

이들의 이런 참담한 신앙적 수준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었을까?

우리라면 그런 그들이 예쁘게 보였을까?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심정도 마찬가지로 그럴 것이라고 한 표현이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리라“이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이시므로 이스라엘 족속을 그 땅에서 완전히 진멸하실 수는 없으시다. 만약 이 표현 그대로가 하나님의 참된 그 뜻이었다면 이스라엘 족속들은 그 땅에서 완전하게 멸절되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바대로 이스라엘은 여전히 이 땅에 존재한다. 따라서 이 말씀은 우리가 보기에 그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는 그런 정도의 참람한 수준의 신앙인들이었다는 의미이다.

 

모세의 간언을 듣고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을 돌이키신 것처럼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정말로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면 그는 자신의 뜻을 이랬다저랬다 하는 변덕스러운 하나님이 되시고 만다. 그러나 하나님은 불변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던가!

(출 32:9)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출 32:10)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출 32:11) 모세가 그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어찌하여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출 32:12) 어찌하여 애굽 사람으로 이르기를 여호와가 화를 내려 그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고 인도하여 내었다 하게 하려 하시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출 32:13)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주를 가리켜 그들에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나의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나님과 모세의 이 대화는 공의를 집행하셔야만 하는 성부하나님과 죄인 된 우리를 살리시려고 성부하나님께 우리의 죄에 대해 중보를 행하시는 성자하나님의 그 관계를 은유적으로 묘사함이다.

 

우리는 우리의 그 원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공의의 집행하심에 대해 피할 길이 없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주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의 피 흘리심으로 우리를 위한 구속을 완성하셨으니 이 구속사역의 성취로 성부하나님의 그 진노를 잠재울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성부하나님께서는 성자하나님의 이 공로를 담보로 하시어 공의를 집행하실 그 뜻을 이미 영원에서 거두셨다. 이것이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는 그 말씀 속에 비밀스럽게 숨겨져 있었다.

(출 32:14)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하나님께서 모세와 대화하신 것으로 기록된 이 성경말씀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족속들을 모두 진멸하고 모세에게서 태어나는 후손들로 다시 한 족속으로 삼아 큰 나라를 이루게 하시겠다고 하셨다. 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일까?

 

하나님의 그 말씀대로 한다면 모세가 아브라함과 같은 지위에 놓여짐이다. 한 민족의 조상이 되는 그 자리, 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탐할 수 있는 자리일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모세를 시험하심이었다.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그 아들,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번제물로 바치라고 명한 그 시험과 같은 것이었다. 아브라함이 그 시험을 통과함으로써 그가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던 것처럼, 이 순간 모세가 완곡히 그 유혹을 뿌리침으로써 그도 하나님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

(창 22:12)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창 22: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창 22: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창 22:15)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창 22:16)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창 22: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한 구속사역을 행하실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그 순간에 광야로 나가 사단의 시험과 유혹을 받으셨다. 그러나 그 모든 시험과 유혹을 이겨내심으로 진정한 메시야로서의 자격을 획득하셨다.

(마 4: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마 4: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마 4: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마 4: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 4:5)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마 4:6)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마 4:7)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신대

(마 4: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마 4:9)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마 4: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마 4:11)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하나님의 감동으로 그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받으시는 대신에 번제물로 쓸 수양을 주시면서 그를 인정하신 그 일이 바로 주님의 이 일을 예표하고 있었고, 이 순간의 모세가 자신의 후손으로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백성 되는 그 자리에 서는 그 유혹을 물리침으로 그가 이스라엘의 구원자의 자리에 진정으로 서게 된 것도 바로 주님의 이 일을 예표한 것이었다.

 

모세가 그 유혹을 뿌리친 그 결과로 그가 두 번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오던 날, 그의 모습이 변형되었다. 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났다는 것은 그가 이전의 모습과는 달라짐이었다.

(출 34:29)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자기 손에 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모세가 주님의 그 사역을 상징하는 유혹을 물리친 그 일을 하나님 앞에서 행하였다는 것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이었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것과 같은 모세 자신의 신앙을 고백함이었다.

(마 16:15)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 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그리하였기에 모세는 그때의 이스라엘 족속 중에서 참된 구원의 길에 들어선 대표적인 인물이 될 수 있었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성령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부르심을 입고 중생의 은혜에 참여하여 거듭난 자로서 회개하고, 그리함으로써 우리의 신앙고백을 할 수가 있었다. 모세가 그랬던 것이다.

 

믿음을 고백한 자에게는 주님의 그 구속의 공로가 전가되고, 그 의가 담보가 되어 의롭다함을 입는 ‘칭의’가 선물로 주어진다. 이 때 죄인이었던 자가 의롭게 됨을 입게 되었으니 능히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실 수 있게 되시는 것이다. 이것을 양자삼으심인 ‘수양’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는 마땅히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 일을 감당하여야 할 것이다. 이는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의롭게 됨이니 이를 ‘성화’라 한다. 이 성화는 일회적이 아니라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계속된다.

 

이렇게 계속되는 이 일은 오직 우리의 노력 만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성령의 도우심이 함께하여야만 가능하다. 성령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가는 이것을 ‘견인’이라한다. 성령하나님의 도우심을 입는 이 은혜는 우리가 이 땅을 작별하는 그 날까지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 땅에 있는 동안에 우리가 완전히 거룩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죽음의 문턱을 넘는 그 날에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이 일이 완성되어지니 이 일이 ‘영화’이다. 이때는 우리가 완전히 거룩해지는 그 일이 이루어진다.

 

영화된 그때, 우리가 부활하면 우리의 육신은 이전의 그 육신을 입지 않는다. 이전의 육신은 죄를 덮고 있는 육신이지만 영화되어 부활한 육신은 그 죄를 완전히 벗어던지게 되니 지극히 거룩할 것이다.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났다는 것은 바로 우리의 그 모습에 대한 예표였다.

 

주님이 변화산에서 변형되실 때의 그 모습이 모세의 변형된 그 얼굴에서 이미 예표되고 있었고, 주님의 그 모습은 부활 후의 우리들의 그 모습이 어떠할 것에 대한 확실한 보증이었을 것이다.

(마 17: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 가셨더니

(마 17:2)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마 17:3)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모세가 하나님께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라고 한 기도와 또 자신을 생명책의 기록에서 제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 죄악한 백성들을 용서해달라고 한 그 기도는 십자가 위에서 죄인들을 용서해줄 것을 간청한 주님의 그 기도를 예표하고 있었다.

(출 32:30) 이튿날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큰 죄를 범하였도다 내가 이제 여호와께로 올라가노니 혹 너희의 죄를 속할까 하노라 하고

(출 32:31)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출 32:32)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주옵소서

 

(눅 23:33)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눅 23: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눅 23:35)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 관원들도 비웃어 가로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눅 23:36) 군병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포도주를 주며

(눅 23:37) 가로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생명책에서 모세 자신의 이름이 지워짐은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됨을 의미한다. 모세는 자신이 영원히 죽는 죽음을 맞이할지라도 자신의 백성들의 죄를 사해달라고 애원하는 것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는 그 순간에도 죄인들을 용서해달라고 애처롭게 간청하신 주님의 우리를 향한 그 사랑을 온전히 예표하고 있었다.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죄인들을 용서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던 그때, 그 땅의 이스라엘은 그냥 구경꾼들일뿐이었다. 자신은 십자가에 달려 그 모진 고통으로 죽어가고 있으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죄인 된 자들을 그처럼 사랑하여 살리시기만을 간절히 소원하신 주님이셨다. 그때 이스라엘은 주님의 그 사랑을 도무지 깨닫지 못했다.

 

범죄한 이스라엘을 위해 하나님께 무릎 꿇고 사죄를 요청하는 모세의 그 기도는 오직 죄인 된 이스라엘을 향한 그 사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깨닫지 못하였던 광야의 그 이스라엘처럼 주님의 십자가가 세워진 그 날의 그 이스라엘도 그렇게 신앙적으로 무지하여 깨닫지 못했다.

 

이 모습이 어찌 저들만의 모습일까!

이 시대를 사는 믿음의 백성들도 하나같이 세상의 욕심을 쫓다가 하나님의 이 사랑을 깨닫지 못한다면 세상에서 이 백성들보다 더 불쌍한 자들이 또 있겠는가!

 

성경에 기록하신 이 이야기들은 우리로 하여금 그 옛날 그 어리석은 믿음의 백성들처럼 그렇게 어리석어 후회하는 삶을 살지 않도록 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애타고 절절한 그 사랑을 말씀에 온전히 담으신 그 타이르심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