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서의 분노
2022. 11. 13.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에서의 분노“
이삭의 가정에 결국 사달이 났다.
장자의 복을 야곱이 받도록 하려고 리브가가 꾸민 계략이 마침내 에서의 분노를 결과하고 말았다. 아비 이삭이 이미 야곱에게 장자의 복을 축원한 그 기도를 함으로써 자신에게 와야 할 그 복이 쌍둥이 동생 야곱에게로 가버렸고, 자신에게는 저주에 가까운 복이 돌아온 것에 대해 에서는 살인의 적의를 표출하고 말았다.
이삭의 축복기도를 통한 그 복을 받을 것을 잔뜩 기대하고 사냥을 나간 에서가 아니던가!
그런데 그 복을 동생 야곱이 날름 빼앗아갔으니 에서의 분함이 어찌 작을 수 있었겠는가!
에서는 세상을 탐한 자였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뜻과 그 영광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애초부터 없었다. 그는 아담의 그 원죄를 고스란히 유전 받았고, 또 처음부터 하나님의 택정하심도 입지 않은 자였기에, 그의 마음속에 담겨져 있었던 아담이 품었던 것과 같은 세상을 탐하는 그 욕심에는 조금의 교정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온 사방으로 그 땅에서 생명을 숨 쉬는 그 짐승들의 뒤를 쫓기만 바빴다. 하나님은 그 땅의 모든 것을 다스리라고 하셨지 그것들을 잡아서 죽이는 그 일을 하라고 하시지 않으셨다. 그 땅에 대한 다스림을 명하신 하나님의 뜻을 전혀 깨닫지 못한 대표적인 인물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에서였다.
그러하니 에서가 세상적인 욕심에 사로잡힌 삶을 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할 것이다. 지금도 이 땅을 사는 많은 자들이 하나님의 그 뜻에 대한 깨달음에는 무관심한 채로 살아간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깨닫는 영을 허락하시지 않으시니 어찌 그들이 돌이켜 깨달음에 이를 수 있을까! 하나님의 그 뜻을 깨닫지 못한 자가 실로 이 땅에서 가장 불행한 자이다.
하나님께서 이 땅의 생명 있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심은 그 다스림을 통해 하나님 보시기에 좋게 하는 그 아름다움을 이루라 하심이었다. 모든 생물들이 살기에 좋은 환경을 만들고 지켜나가는 그 일은 진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되며, 그것이 바로 ‘다스림’이었다.
이 바른 다스림은 결국 사람이 살기에 좋은 그 환경을 만드는 일을 결과하니,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다스리라 명하신 것은 좋은 환경에서 우리가 잘 살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의 그 마음에서 이셨던 것이다.
(창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너무나도 큰 은혜를 입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이 임하는 복을 누리게 하셨으니 우리는 능히 하나님의 그 뜻을 깨닫는 자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 세상에 속한 자들과는 다르게 우리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셔서 선택하시고, 깨닫게 하셔서 구원받은 자의 자리에 서게 하셨다.
이 크신 사랑!
우리가 무엇이관데 우리에게 이와 같은 은혜를 베푸셨나이까!
이로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광을 올려드리나이다, 할렐루야!
동생 야곱을 죽이고자하는 이 말을 리브가가 듣게 되었다. 택하심을 입지 못한 자들은 이와 같이 세상에 속한 그 복을 빼앗겼을 때는 목숨을 걸고 투쟁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오직 이 세상뿐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다음 세상인 천국이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 세상보다 더 좋은, 아니 비교조차 되지 않을 만큼 좋은 천국의 소유권이 있기에 세상 욕심을 배설물처럼 여겨 과감하게 던져버릴 수 있는 담대한 용기가 생긴다. 그래서 참된 믿음의 사람이라면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선물이다.
(빌 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빌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빌 3: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요일 5: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일 5:5)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요일 5:6)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요일 5:7)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에서가 야곱을 죽이려고 결심했고, 이에 리브가가 야곱을 불러 하란으로 피신하라고 이른다. 어미라면 당연히 그렇게 할 만한 이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될 만큼의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이었을까?
(창 27:41) 그 아비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을 인하여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하였더니
(창 27:42) 맏아들 에서의 이 말이 리브가에게 들리매 이에 보내어 작은 아들 야곱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 형 에서가 너를 죽여 그 한을 풀려하나니
(창 27:43) 내 아들아 내 말을 좇아 일어나 하란으로 가서 내 오라버니 라반에게 피하여
(창 27:44) 네 형의 노가 풀리기까지 몇날 동안 그와 함께 거하라
(창 27:45) 네 형의 분노가 풀려 네가 자기에게 행한 것을 잊어버리거든 내가 곧 보내어 너를 거기서 불러오리라 어찌 하루에 너희 둘을 잃으랴
이 사실에 대해 어떤 주석가는 “비록 야곱이 언약의 후손으로 지명되었으나 인간적인 방법을 통해 약속된 축복을 쟁취하려 함으로써 그의 허물에 대한 대가를 치루게 된 것이다. 이처럼 택한 백성일지라도 범죄하면 그 죄에 대한 보응을 반드시 받게 된다.”라고 언급함으로써, 이 사건을 도덕적인 관점에서만 해석하고 있다.
그런 정도라면 성경책은 성경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한다. 성경책은 도덕책이 아니다. 그렇다고 성경이 도덕을 무시하거나 하찮은 것으로도 보지 않는다. 도덕적인 것이 성경의 전부는 아니다. 도덕은 성경의 부분일 뿐이다. 그렇다면 성경은 무엇인가?
성경은 우리를 구원하여 살리시고자하는 하나님의 그 뜻이 담겨져 있는 책이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때로는 우리의 성화를 언급한다. 이때 우리가 성화를 이루도록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땅에서의 도덕적인 삶도 요구하신다.
그렇다고 해서 도덕적인 삶이 우리를 구원하는 일은 되지 못한다. 아무리 도덕적으로 완전할지라도 그것으로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이스라엘에서는 이 도덕이 율법이라는 것으로 구체화되었다.
그래서 한 청년이 예수께 나아와 자기는 율법을 다 지켰는데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또 무엇을 더 해야 하는가하고 물었다. 우리를 구원하여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참된 의도를 그는 깨닫지 못했고, 더더욱 참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도 깨닫지 못한 것이다.
이 깨달음은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지 않으면 도무지 깨달을 수 없는 비밀이다. 오직 선택된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이 은혜가 바로 ‘사랑’이다. 우리는 이 사랑을 깨달았기에 물질적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 오지에 들어가서 죽어가는 자를 기꺼이 살리는 그 일도 서슴없이 행하기도 하고, 도움이 필요한 곳에는 비록 이득이 돌아오지 않는다할지라도 기꺼이 재물을 내어놓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구원에 이를 자들에게서만 나타나는 가장 큰 특징이다. 구원에 이르지 못할 유기된 자들에게서는 결코 이런 모습이 발견되지 않는다.
(마 19: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마 19:17)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마 19:18)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말라, 간음하지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말라,
(마 19: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마 19:20)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마 19: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마 19: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그렇다면 리브가가 야곱에게 하란으로 피신하라고 한 그 일은 그림자로서 분명히 어떤 암시하는 바가 담겨져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허락하실 그때에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가나안땅에 들어가거든 도피성을 만들라고.
도피성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 백성들 중에 그릇 살인한 자가 있어 그리로 도피하면 그의 생명이 보존될 수 있게 한 그 장소가 도피성이었다.
(민 35:9)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민 35:10)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 가거든
(민 35:11) 너희를 위하여 성읍을 도피성으로 정하여 그릇 살인한 자로 그리로 피하게 하라
(민 35:12) 이는 너희가 보수할 자에게서 도피하는 성을 삼아 살인자가 회중 앞에 서서 판결을 받기까지 죽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라
(민 35:13) 너희가 줄 성읍 중에 여섯으로 도피성이 되게 하되
(민 35:14) 세 성읍은 요단 이 편에서 주고 세 성읍은 가나안 땅에서 주어 도피성이 되게 하라
(민 35:15) 이 여섯 성읍은 이스라엘 자손과 타국인과 이스라엘 중에 우거하는 자의 도피성이 되리니 무릇 그릇 살인한 자가 그리로 도피할 수 있으리라
(민 35:16) 만일 철 연장으로 사람을 쳐죽이면 이는 고살한 자니 그 고살자를 반드시 죽일 것이요
(민 35:17) 만일 사람을 죽일 만한 돌을 손에 들고 사람을 쳐죽이면 이는 고살한 자니 그 고살자를 반드시 죽일 것이요
(민 35:18) 만일 사람을 죽일 만한 나무 연장을 손에 들고 사람을 쳐죽이면 이는 고살한 자니 그 고살자를 반드시 죽일 것이니라
(민 35:19) 피를 보수하는 자가 그 고살자를 친히 죽일 것이니 그를 만나거든 죽일 것이요
(민 35:20) 만일 미워하는 까닭에 밀쳐 죽이거나 기회를 엿보아 무엇을 던져 죽이거나
(민 35:21) 원한으로 인하여 손으로 쳐죽이면 그 친 자를 반드시 죽일 것이니 이는 고살하였음이라 피를 보수하는 자가 그 고살자를 만나거든 죽일 것이니라
(민 35:22) 원한 없이 우연히 사람을 밀치거나 기회를 엿봄이 없이 무엇을 던지거나
(민 35:23) 보지 못하고 사람을 죽일 만한 돌을 던져서 죽였다 하자 이는 원한도 없고 해하려 한 것도 아닌즉
(민 35:24) 회중이 친 자와 피를 보수하는 자 간에 이 규례대로 판결하여
(민 35:25) 피를 보수하는 자의 손에서 살인자를 건져내어 그가 피하였던 도피성으로 돌려 보낼 것이요 그는 거룩한 기름 부음을 받은 대제사장의 죽기까지 거기 거할 것이니라
(민 35:26) 그러나 살인자가 어느 때든지 그 피하였던 도피성 지경 밖에 나갔다 하자
(민 35:27) 피를 보수하는 자가 도피성 지경 밖에서 그 살인자를 만나 죽일지라도 위하여 피흘린 죄가 없나니
(민 35:28) 이는 살인자가 대제사장의 죽기까지 그 도피성에 유하였을 것임이라 대제사장의 죽은 후에는 그 살인자가 자기의 산업의 땅으로 돌아갈 수 있느니라
(민 35:29) 이는 너희 대대로 거하는 곳에서 판단하는 율례라
(민 35:30) 무릇 사람을 죽인 자 곧 고살자를 증인들의 말을 따라서 죽일 것이나 한 증인의 증거만 따라서 죽이지 말 것이요
(민 35:31) 살인죄를 범한 고살자의 생명의 속전을 받지 말고 반드시 죽일 것이며
(민 35:32) 또 도피성에 피한 자를 대제사장의 죽기 전에는 속전을 받고 그의 땅으로 돌아가 거하게 하지 말 것이니라
하나님과 맺은 행위언약을 어기는 그 일은 하나님 앞에 죄가 되는 일이었다. 그 죄의 결과는 곧 죽음이었다. 아담이 모든 인류를 대표하여 하나님과 이 행위언약을 맺었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아담의 그 죄에 대해서는 연대 책임을 져야만했고,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공의의 하나님이시니 우리에게도 이 죄에 대한 책임을 물으실 수밖에 없으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시던가!
비록 그 죄로 인해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그 자리에 서게 된 우리이지만 그래도 그 사랑하심에는 변함이 없으셨다.
이스라엘에게 도피성을 정하라 명하신 것은 바로 이 사랑 때문이셨다. 이스라엘이 그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도피성을 먼저 만들라 하신 것은 “내가 너를 사랑하기에 너를 살리고 싶은 이 마음이 가장 급하다”라고 말씀하심인 것이었다. 이스라엘에게만 그리 하셨을까?
이스라엘에게 그 도피성을 허락하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여 살리시겠다는 그 의지를 이스라엘을 통하여 보여주신 바로 그 증거였다.
도피성에 가서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던 자는 고의적으로 살인 한 자가 아니라 우연히 자기도 모르게 살인을 한 자였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아담이 범죄함으로써 죽음에 이르게 된 그 책임이 우리에게까지 돌려진 그것을 고의적 범죄가 아니라 우연히 살인에 이른 그런 죄라고 봐주신 것일지도 모르겠다.
철 연장이나 나무 연장이나 돌로 사람을 죽인 자에게는 그 도피성으로 피함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 살인에 대해서는 책임이 물어졌고 죽임을 당하도록 하셨다. 이는 유기된 자의 이 땅에서의 자의적으로 범한 그 자범죄에 대한 책임을 물으심에 대한 상징이다.
유기된 자는 최후의 심판 날에 그가 자의적으로 범한 그 자범죄가 원죄에 더하여져 보다 큰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그 결과는 영원한 지옥에서의 형벌이다. 그러나 주 예수의 십자가 공로의 은혜를 입은 우리는 그 원죄의 죄책으로부터 자유로워져 살 길을 얻게 되었다.
도피성을 통해 그릇 살인한 자가 살게 되는 그것은 곧 주님의 은혜로 살길을 얻은 우리가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될 그것을 상징한다. 에서의 위협을 피해 살길을 얻으려고 떠난 그 하란은 이 도피성에 대한 그림자였고, 이 도피성은 또 다른 피난처에 대한 그림자가 되고 있었다.
(수 20:1)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수 20:2)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내가 모세로 너희에게 말한 도피성을 택정하여
(수 20:3) 부지중 오살한 자를 그리로 도망하게 하라 이는 너희 중 피의 보수자를 피할 곳이니라
(수 20:4) 그 성읍들의 하나에 도피하는 자는 그 성읍에 들어가는 문 어귀에 서서 그 성읍 장로들의 귀에 자기의 사고를 고할 것이요 그들은 그를 받아 성읍에 들여 한 곳을 주어 자기들 중에 거하게 하고
(수 20:5) 피의 보수자가 그 뒤를 따라온다 할지라도 그들은 그 살인자를 그의 손에 내어주지 말지니 이는 본래 미워함이 없이 부지중에 그 이웃을 죽였음이라
(수 20:6) 그 살인자가 회중의 앞에 서서 재판을 받기까지나 당시 대제사장의 죽기까지 그 성읍에 거하다가 그 후에 그 살인자가 본 성읍 곧 자기가 도망하여 나온 그 성읍의 자기 집으로 돌아갈지니라
야곱에게서의 하란은 어떤 곳인가?
바로 자신의 어머니 리브가의 본향이 아닌가?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에게서는 자신의 목숨을 대신 내어줌으로써 우리를 살리신 그 주님 예수를 상징한다. 따라서 그 리브가가 태어난 고향은 주님이 본디 계셨던 그곳, 바로 천국을 상징한다.
천국은 어떤 곳인가?
하나님이 계신 곳이 바로 천국이다. 성경에서 시인들은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라고 수없이 노래하고 있다. 이스라엘에게서의 그 도피성은 바로 하나님이 계신 이 천국을 예표한 모형이었다. 천국은 우리가 가서 생명을 보존할 영원한 본향이었다.
(시 14:6) 너희가 가난한 자의 경영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 피난처가 되시도다
(시 46:1) [고라 자손의 시, 영장으로 알라못에 맞춘 노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시 46:7)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시 46:11)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리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시 48:3) 하나님이 그 여러 궁중에서 자기를 피난처로 알리셨도다
(시 59:16)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산성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
(시 61:3)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심이니이다
(시 62:7)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시 62:8) 백성들아 시시로 저를 의지하고 그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셀라)
(시 71:7) 나는 무리에게 이상함이 되었사오나 주는 나의 견고한 피난처시오니
(시 73:2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
(시 91:2)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시 91:9)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로 거처를 삼았으므로
(시 142:5)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생존 세계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
(시 144:2) 여호와는 나의 인자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의 산성이시요 나를 건지는 자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피난처시요 내 백성을 내게 복종케 하시는 자시로다
리브가가 야곱에게 자신의 친정 오라비 라반이 있는 그 고향으로 가서 생명을 보존하라 한 것은 우리가 가서 영원히 생명을 보존할 그 본향인 천국에 대한 그림자였다. 리브가의 그 본향이 민수기에서 점차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 바로 도피성이었다.
그러나 이 도피성도 여전히 그림자였다. 그림자였기에 그 본 모습이 감추어져 있어 그 정체를 쉽게 알아 볼 수가 없었다. 구원에 이르지 못할 자가 이 도피성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면 단순히 이스라엘이 사람에 대한 존엄성을 높이 산, 도덕적으로 대단히 앞선 법체계를 이루었구나 하고 단순히 인본주의 입장에서 해석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구원에 이르게 될 우리는 신본주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그 위대한 사랑을 발견하고 감격하게 될 것이다.
구약에서 리브가의 고향, 도피성 등의 그림자로 드러난 그 천국이 신약에 와서는 그 실체를 드러내었다. 사도바울은 그 땅에서 복음 전할 때에 여러 가지로 고난을 당했다. 그와 함께하던 자들도 그 땅의 위협에 다 도망 가버리고 홀로 남았을 때에도 그는 그들에게 원망하여 허물을 돌리지 않았다,
그가 그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땅에 대한 욕심을 버렸고, 궁극적으로 그가 피할 곳, 곧 천국을 사모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홀로 남아도 그는 담대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진실로 참된 믿음의 사람의 표본이 되었다.
(딤후 4:16)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딤후 4:17)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딤후 4:18)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드디어 그림자였던 리브가의 본향이요, 야곱의 외갓집인 하란의 정체가 드러났다. 외갓집이란 우리의 모든 허물과 부족함을 감싸주는 곳이 아니던가!
그래서 야곱의 이 외갓집은 그의 피난처가 될 수 있었다.
우리의 참된 외갓집이요, 본향인 천국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가 드디어 성경의 가장 마지막 권인 계시록에 등장한다. 그것도 계시록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 얼마나 드라마틱한 성경의 구성인가!
(계 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계 21: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계 21: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계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 21:5)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계 21: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계 21:7)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의 그 장엄함과 우리가 거할 처소의 그 아름다움이 새 예루살렘성으로 묘사되고 있다. 우리가 거할 처소인 그 새 예루살렘성이 지극히 귀한 보석과 같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마 그것은 보석 그 이상일 것이다. 부득불 이 땅에서 그것과 비교될 수 있는 최상의 것이 보석뿐이니 어찌하겠는가! 다만 그리 묘사할 수밖에...
사도바울은 이것을 이미 보았기에 그 땅의 모든 것을 다 배설물로 여기고 버릴 수 있었다.
(계 21:10)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계 21:11)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계 21:18)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계 21:19)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셋째는 옥수요 넷째는 녹보석이요
(계 21:20)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한째는 청옥이요 열두째는 자정이라
(계 21:21)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문마다 한 진주요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이 찬란한 천국이 우리의 소유라니!
어린 양의 생명책애 기록된 자들만이 그곳으로 갈 수 있다고 한다. 어린 양의 책에 기록된 자들이 누구던가!
바로 우리들을 가리킴이 아니던가!
(계 21:22) 성 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계 21: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계 21:24)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
(계 21:25) 성문들을 낮에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는 밤이 없음이라
(계 21:26)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겠고
(계 21: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
그 천국에서는 다시 저주가 없으니 우리를 죽일 만큼 위협하는 그 두려운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굳이 욕심내어 탐하지 않아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모두 준비되었다. 죽음을 상징하던 그 밤도 다시는 없을 것이며, 그 밤에 살길을 찾으려고 필요로 했던 그 등불도, 그리고 살림을 예표하며 그것의 그림자였던 그 햇빛도 이제는 그 실체가 되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에 따라 그 용도가 폐기된다.
이들의 효용이 마감되는 그 날이 우리가 천국에 이르는 그 날이다. 그 날에는 우리가 왕노릇을 하니 그 무엇이 우리에게 두려운 대적이 될 수 있을까?
죽을 것 같이 두려운 그 어떤 존재들이라 할지라도 그것들을 제압하는 그가 바로 왕이니 왕 노릇하는 우리에게 그 무엇이 대적이 될 수 있을까!
(계 22:1)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계 22: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계 22: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계 22:4)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계 22: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천국에 이를 때까지 당분간 이 땅에 거하는 날 동안 피할만한 곳을 우리에게 허락하셨다. 그것이 바로 교회이다. 그래서 교회는 우리에게 쉴만한 피난처로서의 공간이 되며, 위로와 평안이 넘쳐나는 곳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그런 은혜를 누리는 그곳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그 일을 행한다. 이러한 일들이 우리의 신앙생활인 것이다. 그런데 이 순간, 이 땅의 교회들은 과연 그러한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는가?
교회는 하나님께서 자기 피로 사셨다고 하셨다.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의 그 모진 고통을 감내하시면서 이루신 것이 교회이다. 당신께서 목숨 바쳐 지켜내신 그 양떼들이 모인 이 교회를 치게 하시려고 감독자, 목회자들을 세우셨다.
(행 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음부의 권세를 이기고 교회가 진정한 피난처가 되게 하는 그 일의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에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감사함으로 이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마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