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드온과 삼백 명의 용사들 이야기
2022. 9. 25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기드온과 삼백 명의 용사들 이야기”
기드온의 삼백용사의 이야기를 성경에 기록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삿 7:1) 여룹바알이라 하는 기드온과 그를 좇은 모든 백성이 일찍이 일어나서 하롯샘 곁에 진쳤고 미디안의 진은 그들의 북편이요 모레 산 앞 골짜기에 있었더라
하나님은 위대하시고 전능하시니 겨우 삼백 명만으로도 미디안의 그 많은 적을 무찌르게 하셨다는 단지 그 사실을 우리에게 알리시려고 기록하셨을까?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나 그런 정도로만 이해를 했다면 이 사건을 기록케 하신 하나님의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고 할 것이다. 성경의 이런 기록들은 하나님이 당신의 전능하심을 우리에게 자랑거리로 삼으시려고 기록한 것이 아니다. 이런 기록들을 통해 우리를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그 구원의 뜻과 그 의지를 우리로 하여금 분명히 깨닫고 그에 대한 확신, 즉 믿음을 굳게 하라 하심이다.
성경의 그 모든 기록은 오직 우리를 구원하여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그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기드온의 삼백 명의 용사에 관한 이 이야기도 우리를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그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러면 이 이야기 속에 하나님의 어떤 사랑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성경의 기록에서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이 같이 말씀하셨다. “너를 좇은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붙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스려 자긍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고.
(삿 7:2)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좇은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붙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스려 자긍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인즉 너무 많은 그들이 그 전쟁에서 이기면 자신들의 능력이 그들보다 탁월하여 이겼노라고 할 것이라 했다. 즉 그들 스스로 자신들이 잘해서 이긴 것이지 하나님이 이 전쟁에서 무엇을 했겠느냐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전쟁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능력으로 이스라엘이 이기도록 해주신 것을 그렇게도 생색을 내고 싶어 하셨다는 것인가?
하나님은 결코 그런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그들이 자신들의 입으로 이 전쟁을 하나님이 이기도록 하셨다고 고백하는 그것을 바라셨다. 이렇게 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 된다. 그렇다면 왜 그들의 입에서 이 말이 나와야만 하는 것일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그 일이 우리 인생의 이 땅에서 사는 참 목적이 된다.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는 자들은 오직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뿐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로서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이 이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고 애를 쓰는 삶을 사는 자는 분명히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이니 그는 곧 구원에 이를 자가 됨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선택한 자는 결코 이 구원의 길에서 떨어져 나갈 수 없다.
그는 하나님의 그 구원하심에 따라 반드시 천국의 백성된 자리에 서게 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이 고백을 할 수 있게 하시려고 그 군대의 숫자를 감하신 것이다.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살리시려는 그 사랑이 없었더라면 그렇게 하실 수 있었을까?
그때의 이스라엘은 미디안과의 이 전쟁에서 얻는 그 승리의 결과에 대해서 그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확실히 인정하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만 했다. 이렇게 하는 이것이 그들을 구원하여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간절한 바램이었을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 땅의 많은 족속들 가운데서 특별히 이스라엘을 선택하시어 당신의 백성 삼으신 이유였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아주신 하나님의 그 뜻이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얻었어야만했다. 이 일은 자신들을 당신의 백성 삼으시고 사랑을 베푸신 하나님의 그 은혜에 대한 보답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의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당신의 백성 삼으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그 일을 감당하게 하려 하신 것이라는 데에 대한 인식은 없었던 것 같다. 어쩌면 우리 역시 그 이스라엘과 같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사건을 성경에 기록하여 이스라엘과 같은 우리에게 그 깨달음을 얻게 하여 우리로 하여금 온전히 하나님의 그 구원하심의 은혜에 대하여 알게 하려하심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그 이스라엘과 같이 구원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백성이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에게 있어서 가장 가슴 아픈 일이 될 것이다.
기드온과 삼백 용사들의 이 전쟁의 이야기 속에 담겨져 있는 선택된 우리를 구원하여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이 애끓는 사랑을 이해하는가?
나를 이 땅에 창조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 창조하신 뜻대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을 하며 살아가게 하려 하시는 하나님의 그 의지가 담겨 있는 것이 바로 이 기드온의 삼백 용사의 이야기이다.
하나님은 기드온의 군대에서 많은 수의 군사들을 돌려보냈다. 그들은 분명히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그 삶을 살지 못한 자들이었다. 성경의 이 기록에서 돌아간 자들은 두려워서 떠는 자들이었다.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미디안과 싸우려고 왔다면 그 전쟁을 두려워했을까?
다윗은 골리앗에 대해 말하기를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는 자라고 했다. 모두들 그 골리앗이 두려워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을 때, 다윗이 그리 말하였다. 그 때 다윗은 군대에 들어갈 수도 없는 그런 어린 나이였다. 그런 그가 객관적으로 보아 골리앗에게 그리 말할 수 있는 상대였을까?
(삼상 17:26) 다윗이 곁에 섰는 사람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이 블레셋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의 치욕을 제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대우를 하겠느냐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삼상 17:36)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다윗의 이 모습은 하룻강아지가 범을 무서워하지 않는 그런 꼴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윗이 허풍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자 애를 쓰는 자의 믿음에서 나온 용기였다.
그는 하나님을 신뢰했고 전쟁은 하나님께 속해있다고 믿는 믿음의 용사였다. 그러했으므로 하나님은 다윗의 하나님이 되셔서 그의 물맷돌을 골리앗의 미간에 꽂아 넣어 주셨다. 골리앗이 다윗의 발아래에 누웠을 때 하나님은 그 다윗을 통해 영광을 받으셨던 것이다.
(삼상 17: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삼상 17:48) 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올 때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로 마주 그 항오를 향하여 빨리 달리며
(삼상 17:49)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취하여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
(삼상 17:50) 다윗이 이같이 물매와 돌로 블레셋 사람을 이기고 그를 쳐 죽였으나 자기 손에는 칼이 없었더라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자는 결코 구원의 반열에 들어설 수 없다.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는 자,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다. 이는 곧 구원에 이를 자임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그 남은 자들 중에서 이 같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낼 자를 찾으셨다. 나라면 어떻게 하였을까?
단지 눈앞에 보이는 그 전쟁이 두려워 피하여 달아났을까? 아니면 그 보이는 전쟁 뒤에 감추어져 있는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바라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 전쟁을 향하여 나아갔을까?
믿음의 삶을 사는 자는 겉으로 보이는 그 현상에 굴복하지 않는다. 그는 믿음의 눈으로 항상 그것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그 의도하심을 바라보고 나아간다. 하나님은 언제나 이런 믿음의 사람을 통해 일하신다.
(삿 7:3) 이제 너는 백성의 귀에 고하여 이르기를 누구든지 두려워서 떠는 자여든 길르앗 산에서 떠나 돌아가라 하라 하시니 이에 돌아간 백성이 이만 이천 명이요 남은 자가 일만 명이었더라
두려워서 떠난 자가 남은 자의 두 배나 되었다. 두려워했다는 것은 목숨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니 이는 이 세상에 대한 일종의 욕심이라 할 것이다. 세상에 대한 이 욕심을 가장 대표적으로 표현한 것이 ‘부자’이다. 부자가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약대가 바늘귀를 지나는 것보다 어렵다고 했다.
(눅 18:25)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두려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제하여버리시고 삼백 명의 믿음의 군사와 기드온을 통해 일하신 하나님이시다. 삼백은 3*10*10이니 하나님의 수, 즉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의 수에 완전을 의미하는 10을 거듭 곱했으므로 이는 강조하는 의미가 된다. 따라서 삼백 명이란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는 자의 수를 의미하게 된다 할 수 있다.
스스로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 자들, 선한 일을 하면 하나님을 믿지 않더라도, 교회를 다니지 않더라도 천국(좋은데) 갈 수 있다고 하는 자들, 그들을 하나님은 선택치 않으시고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만을 선택하여 구원하신다.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가장 큰 교만이다. 이것은 스스로를 믿는 또 하나의 우상으로서 하나님의 가장 싫어하시는 바가 되어버린다.
스스로의 구원에 대한 불가능을 성경은 이와 같이 말씀하고 계신다.
(렘 13:23)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과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을 기쁜 마음으로 하는 그 자를 하나님이 들어 쓰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시 100:2)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
(골 1:11)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개의 핥는 것같이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핥는 자란 믿음의 사람으로서 자신의 소명에 전심하는 자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선택하시고 이런 자들을 통해 일하신다. 하나님이 인정하신 이런 믿음의 사람이 삼백이었고 하나님은 이들을 선택하셨다.
개의 핥는 것같이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핥는 자라는 것은 한 손에 창을 잡고 한 손으로는 물을 마심이니, 이는 적군이 나타나면 전사로서의 제일가는 사명인 그들과 맞서 싸우는 그 일에 바로 돌입할 수 있음을 의미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자는 언제나 그에게 주어진 사명에 대해 전심전력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상징한다. 이는 믿음 안에서 깨어 있는 자의 모습이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신다.
(삿 7:6)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핥는 자의 수는 삼백 명이요 그 외의 백성은 다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신지라
(삿 7:7)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물을 핥아 먹은 삼백 명으로 너희를 구원하며 미디안 사람을 네 손에 붙이리니 남은 백성은 각각 그 처소로 돌아갈 것이니라
무릎을 꿇고 마심은 짐승이 먹이를 먹는 것과 같은 모습이니 이는 잠시 그 본분을 잊고 오직 육신의 원하는 일에 우선함을 상징한다. 이는 전사로서의 본분을 망각한 행위가 된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외면하셨다. 구원의 반열에서 제외됨을 의미한다.
우리도 우리의 삶 속에서 오직 우리 자신만을 위한 일에 탐닉해서 잠시라도 나의 사명을 망각하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하나님은 오늘 이 본문을 통해 당신이 사랑하시므로 마땅히 구원의 은혜를 입어야할 우리에게 “나의 명한 사명을 너는 한 순간에라도 잊지 말라”고 교훈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 전쟁을 통해 전쟁의 승리는 세상의 수단과 방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달려있음을 알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 땅에서 우리가 감당하여야할 그 모든 일들의 성취가 우리의 수단과 방법에 의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이 그 일을 우리로 하여금 이루게 하시도록 하나님을 감동시킬만한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어야한다.
하나님은 기드온과 그 삼백 용사에게 미디안을 물리칠 방법과 시간을 정해주셨다. 기드온과 그 삼백 용사들은 자신들의 생각대신 하나님의 그 지시하심만을 믿고 따랐다. 이것은 기드온과 그 삼백용사들의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었다. 그 순종은 그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나도 이 같은 순종을 이루어 낼 수 있을까?
(삿 7:9) 이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내려가서 적진을 치라 내가 그것을 네 손에 붙였느니라
믿음이 좋은 자라도 세상에 속한 육신을 입고 있으니 어찌 한 순간에라도 두려운 마음이 없을 수 있을까! 이것을 모르실 하나님이 아니시다. 그는 전지하시니 능히 그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신다. 그는 또한 인격적이셔서 우리의 그 마음을 다독이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기드온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주셨다. 의지할 자도 주셨다. 그의 부하 부라를 데려가라 하신 것이다.
(삿 7:10) 만일 네가 내려가기를 두려워하거든 네 부하 부라를 데리고 그 진으로 내려가서
(삿 7:11) 그들의 하는 말을 들으라 그 후에 네 손이 강하여져서 능히 내려가서 그 진을 치리라
믿음 안에서 우리에게 늘 용기를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자.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하신 그 말씀도 또한 늘 기억하자.
(막 9: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여호수아로 하여금 강하고 담대하라고 명하신 그 명령을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받아 새기자.
(수 1:6)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
(수 1:7)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수 1: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수 1:9)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또한 이 땅에서 우리가 감당할 그 일을 해결함에 있어서 필요한 지혜를 주시는 은혜의 전능자이시다.
하나님은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 사명을 맡기실 때 막무가내로 하시지 않으신다. 우리에게 그 일을 감당함에 필요한 지혜를 주신다. 솔로몬에게 그 백성을 다스리는데 필요한 지혜를 주셨던 하나님이 아니시던가!
기드온에게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그 전투에 필요한 지혜를 주셨다. 이는 구원을 베푸실 자로서의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주신 사랑의 선물과도 같은 것이었다.
(삿 7:16) 삼백 명을 세 대로 나누고 각 손에 나팔과 빈 항아리를 들리고 항아리 안에는 횃불을 감추게 하고
(삿 7:17)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만 보고 나의 하는 대로 하되 내가 그 진 가에 이르러서 하는 대로 너희도 그리하여
(삿 7:18) 나와 나를 좇는 자가 다 나팔을 불거든 너희도 그 진 사면에서 또한 나팔을 불며 이르기를 여호와를 위하라 기드온을 위하라 하라 하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을 하고자 할 때는 하나님이 그에게 그때마다 필요한 지혜를 허락하신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을 어찌 신뢰하지 않을 수 있으랴!
그래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하셨다.
(잠 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