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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해에서의 기적에 담긴 하나님의 뜻은?

영동장로교회 2022. 9. 4. 09:00

2022. 9. 4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홍해에서의 기적에 담긴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홍해를 건너가게 하신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 첫 번째 관문인 홍해를 반드시 건너야만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여정을 진행했던 그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믿음의 백성들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믿음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믿음의 훈련을 이루어 나간 그것을 상징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는 정하신 그 때가 되면 반드시 하나님께로 나아와 하나님의 백성으로 되는 그 훈련과정을 거치게 되어 있다. 이스라엘은 이미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족속들이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그 때가 되었으므로 그들은 모세를 통해 그 애굽을 탈출했다. 이는 믿음의 백성된 자리에 들어섬을 의미했다.

 

믿음의 백성된 자는 사단의 지배하에 있었던 그 세상의 때를 벗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그 새 옷을 입어야만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널 수 있도록 그 바다를 가르신 일은 하나님께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을 만나주시기 위해 행하신 그 일을 상징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그 때를 살아온 우리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을 때 하나님은 기꺼이 우리와 만나주시고 당신이 어떠함을 드러내어 보이신다. 이것을 우리는 신앙적 체험이라 한다.

 

사도 바울은 그가 사도로 부르심을 받기 전에는 유대인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던 자였다. 그렇지만 그 때의 바울은 구속주이신 성자 하나님을 알지 못한 자였다. 때가 되매 성자 하나님이신 주님이 그를 부르셨다. 예수 믿는 자들을 잡으러 가는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은 그를 만나주셨다. 그 일은 그에게 있어서의 놀라운 신앙적 체험이 되었다.

 

우리를 구속해 주신 주님을 아는 일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는 절대적이다. 바울도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구속주이신 주님을 만나야만 한다. 그래서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났다. 이는 그에게 사명을 맡기시려고 주 예수께서 그를 부르심이었다. 주님이 바울을 부르신 것은 그를 이방인들을 위한 선교사로 쓰시고자함이었다.

(행 9:3)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행 9: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행 9:5)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행 9:6)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행 9: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그 시절에는 그들이 하나님에 대해 정확히 알만한 체험을 한 적이 없었다. 이제 가나안으로 가는 그 여정에 들어선 그들로서는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하는 그 일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 된다. 신앙이란 가장 먼저 하나님을 아는 그 지식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냥 귀로만 듣는 정도로 하나님에 대해 아는 지식은 그 믿음을 견고케 해주지 못한다. 욥이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만났을 때 그가 지금까지는 듣기만 했는데 이제는 하나님을 보았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이 욥의 신앙을 위해 그를 만나주심이었다. 이 사건으로 욥의 믿음은 그 누구도 쉽게 따라올 수 없는 그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욥 42: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보았다는 것은 하나님을 진실로 만남이니 이 믿음은 절대로 부인되어질 수 없을 것이다. 이 경험은 연약하던 믿음이 견고한 믿음으로 거듭남을 의미한다. 이런 믿음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온전한 믿음이 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참 믿음의 세계로 들어선 그 순간에 하나님이 어떤 존재이신지를 직접 보여주심으로 그들의 믿음이 산 믿음이 되게 하는 그 기초가 되는 당신과의 만남을 허락해주셨다. 이 일은 홍해를 가르는 그 일로 성취되었다.

 

이 일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직접 목격할 수 있었고, 그 경험이 자신들의 믿음에서 참된 지식이 될 수 있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해 그들로 하여금 홍해 바닷가에 도달하게 하시고, 곧 이어 바로의 군대가 따라 미치게 하셨다.

 

이런 상황에서 홍해가 갈라지면 그 일을 행하신 하나님은 분명히 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이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르게 알고 그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그 일을 행하셨다.

(출 14: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출 14:2)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돌쳐서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에 장막을 치게 하라

(출 14:3) 바로가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들이 그 땅에서 아득하여 광야에 갇힌바 되었다 할지라

(출 14:4)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 온 군대를 인하여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으로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하시매 무리가 그대로 행하니라

(출 14:5) 혹이 백성의 도망한 것을 애굽 왕에게 고하매 바로와 그 신하들이 백성에 대하여 마음이 변하여 가로되 우리가 어찌 이같이 하여 이스라엘을 우리를 섬김에서 놓아 보내었는고 하고

(출 14:6) 바로가 곧 그 병거를 갖추고 그 백성을 데리고 갈새

(출 14:7) 특별 병거 육백 승과 애굽의 모든 병거를 발하니 장관들이 다 거느렸더라

(출 14:8) 여호와께서 애굽 왕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자손의 뒤를 따르니 이스라엘 자손이 담대히 나갔음이라

(출 14:9)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과 그 군대가 그들의 뒤를 따라 바알스본 맞은편 비하히롯 곁 해변 그 장막 친데 미치니라

(출 14:10) 바로가 가까워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 뒤에 미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그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 하나님의 뜻에 찬동하는 이것이 참 믿음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이 같은 믿음을 갖게 해주시려고 홍해를 가르셨고, 이것으로 당신의 어떠함을 분명히 그들에게 가르치셨다. 홍해 그 바다를 가를 수 있는 자는 오직 전능자이신 하나님뿐이신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분명히 목도했다.

(출 14:21)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어민대 여호와께서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출 14:22)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고 물은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니

(출 14:23)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들이 다 그 뒤를 쫓아 바다 가운데로 들어 오는지라

(출 14:24) 새벽에 여호와께서 불 구름기둥 가운데서 애굽 군대를 보시고 그 군대를 어지럽게 하시며

(출 14:25) 그 병거 바퀴를 벗겨서 달리기에 극난하게 하시니 애굽 사람들이 가로되 이스라엘 앞에서 우리가 도망하자 여호와가 그들을 위하여 싸워 애굽 사람들을 치는도다

(출 14:2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바다 위로 내어밀어 물이 애굽 사람들과 그 병거들과 마병들 위에 다시 흐르게 하라 하시니

(출 14:27) 모세가 곧 손을 바다 위로 내어밀매 새벽에 미쳐 바다의 그 세력이 회복된지라 애굽 사람들이 물을 거스려 도망하나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을 바다 가운데 엎으시니

(출 14:28) 물이 다시 흘러 병거들과 기병들을 덮되 그들의 뒤를 쫓아 바다에 들어간 바로의 군대를 다 덮고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더라

(출 14:29)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였고 물이 좌우에 벽이 되었었더라

(출 14:30) 그 날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스라엘을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매 이스라엘이 바닷가의 애굽 사람의 시체를 보았더라

(출 14:31)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베푸신 큰 일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 종 모세를 믿었더라

 

성경이 이 일을 기록한 것은 이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된 자들이 홍해가 갈라지는 그 일을 행하신 하나님의 그 역사하시는 현장에 함께 동참할 수 있게 하심으로써 체험을 통한 믿음의 참지식을 얻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그 의도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가는 길은 세 가지가 있다고 한다.

그 첫 번째 방법은 최단거리인 바닷길을 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길은 애굽의 군용도로이다. 지중해를 옆으로 두고 그 해안을 따라 난 길인데, 길목마다 애굽의 국경수비대가 지키고 있어 탈출을 감행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매우 위험한 선택지가 되었다.

 

또 이 길 끝에는 블레셋 사람들이 사는 땅이 있었다. 그 당시의 블레셋 사람들은 전투에 능하였기에 전투 경험이 전혀 없었던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존재들이었다.

 

두 번째 방법은 브엘세바와 네겝으로 향하는 ‘광야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 길은 가나안 땅과 블레셋 영토를 관통하고 있었다. 이 길로 가면 전투는 피할 수 없는 일이 된다.

 

그러나 이 때의 이스라엘은 전투를 치른 경험이 없었기에 이 일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되었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아시기에 세 번째 방법을 따르게 하셨다.

 

세 번째 방법은 시내 반도를 향하는 그 길을 선택하는 것이었다. 이 길은 가나안 땅으로 직접향하는 길은 아니었다. 이 길은 40년이나 소요되는 먼 길이었다.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4일이나 5일 정도면 가게 되는 바닷길 대신에 광야의 이 길을 가게 했을까?

 

아무리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도 무턱대고 아무 때나 그의 전능을 사용하시지 않으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노역을 감당하기 어려워 하나님께 구해 달라고 간구하였을지라도, 또 그런 이스라엘을 당신의 백성 삼으시기로 정하셨을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 때에 그 처지에 맞는 처분을 내리신다.

 

우리의 처지와 믿음의 수준에 맞추어서 필요한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울며 떼를 쓴다고 그 어린아이에게 위험하고 예리한 그 칼을 내어주는 부모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우리가 아무리 기도하고 구해도 우리에게 해가 될 그것을 결코 주시지 않는다.

 

지금의 이스라엘은 신앙에서는 초보자와 같은 수준이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믿음의 경지에 도달하게 하여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그런 믿음의 경지에 이르게 하셔서 그들을 통해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신앙적으로 미숙한 그들은 지금 단계에서는 결코 스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없다. 이 사실을 하나님은 잘 아시기에 이스라엘로 하여금 참 믿음의 백성이 되는 그 자리에까지 이르도록 그들을 인도하실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40년 동안 그 광야 길을 가게 하셨다.

 

그래서 신앙적으로 미숙하여 감당하기 어려운 그런 일을 그들로 하여금 무조건 해내라고 다그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기에 가나안 땅으로 직통으로 갈 수 있는 그 길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통상적인 우리의 생각으로는 은혜의 하나님이시니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힘들이지 않고 빠르게 지름길로 가나안 땅에 이르도록 하시면 그렇게 해주신 하나님께 더 고마워하지 않았겠냐고 할 것이다.

 

그러나 신앙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런 은혜를 베풀어도 그들은 결코 그 고마움을 느끼지 못한다. 이는 인간이 죄로 인하여 어리석음에 갇혀버린 결과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믿음 안에서 훈련시키심이 이스라엘을 그 믿음에서 성숙시키셔서 하나님을 참으로 기쁘시게 해드리는 그것을 취하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이기적인 생각에서 그리하심이셨을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 일이 단지 하나님 편에서만 이득이 되는 그 일일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 일은 ‘성화’를 이루어 가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다시 말해 구원의 그 큰 은혜를 누리게 될 자들만이 할 수 있는 그 행위이니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기쁨을 얻으신다는 것은 그 일을 행한 자가 분명히 구원을 얻은 자가 됨을 뜻한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이 구원을 얻게 되는 그 일을 기뻐하심이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 일은 곧 자신이 구원을 얻게 됨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얻는 그 일이 되어진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가는 그 여정을 감당하는 것은 곧 그들이 믿음의 백성으로 선택되어 성화 계단을 밟음을 뜻한다. 그러하기에 애굽을 탈출한 그 순간부터 그들은 믿음의 훈련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 앞에 가로놓인 홍해는 그 믿음을 훈련시키는 도구일 뿐이었다. 그것은 오직 믿음이 연약한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나님이 준비하신 믿음의 교재였던 것이다.

 

그들은 아직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그런 체험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런 그들을 위해 하나님은 홍해를 믿음의 교재로 사용하셔서 당신의 어떠함을 내어 보이셨던 것이다.

 

그 너른 홍해바다는 자신들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그런 장애물이었다. 앞에는 애굽의 그 강한 군대가 자신들을 향해 달려들고, 뒤에는 자신들이 어찌할 수 없는 바다가 있었다.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순간처럼 보였을 것이다. 절망의 순간이었던 것이다.

 

믿음이 없는 자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는 현장이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아직은 믿음이 자라지 않았으니 세상 사람들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를 원망했다. 공연히 우리를 애굽에서 데려나와 이 광야에서 죽게 만드는구나 하고 원망한 것이다.

(출 14:10) 바로가 가까워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 뒤에 미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출 14:11)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출 14:12)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믿음이 있는 자라면 어떠했을까?

 

다니엘과 그 친구들과 같은 믿음의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애굽의 군대의 손에서 우리를 구해내실 것이다.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 우리는 결국 천국으로 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순간에도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를 영화롭게 하노라”고 고백했을 것이다.

(단 3:14) 느부갓네살이 그들에게 물어 가로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그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니 짐짓 그리하였느냐

(단 3:15) 이제라도 너희가 예비하였다가 언제든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거든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리어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

(단 3:16)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단 3:17)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단 3:18)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그러나 지금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그런 수준의 믿음의 백성들이었다. 하나님은 이 순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니엘과 같은 정도의 믿음을 기대하시지 않으셨다.

 

만약 하나님이 갈대아 우르를 막 떠나온 초보 신앙인인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허락하시고 그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제물로 바치라고 한 그 일을 그 때 하라고 하셨다면 과연 그는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

(창 22: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창 22: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창 22: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창 22:4)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신앙의 훈련을 시키실 때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로만 하신다. 결코 우리의 능력을 뛰어넘는 수준으로는 하시지 않는다. 아브라함의 신앙이 그 아들 이삭을 제물로라도 바칠 수 있는 정도의 수준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은 그 아들 이삭을 내게 제물로 바칠 수 있느냐고 물으셨던 것이다.

(고전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아브라함은 그 시험에서 통과하였으니 분명히 하나님은 그를 위해 놀라운 상급을 준비해놓으셨을 것이다. 만약 그가 그 상급을 받았다면 그 상 받음이 온전히 자신의 공로였을까?

 

이미 하나님이 그를 그 정도로 훈련시켜 놓으신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상을 주심이니 이는 그에게 상을 주고 싶어 안달하시는 하나님처럼 보이게 한다. 우리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시다. 어린 아기가 예뻐서 무엇이라도 주고 싶어 어떤 구실을 찾는 어미의 그 마음이 하나님의 그 마음을 닮음에서 온 것일지도 모른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홍해 바닷가에 서게 하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신앙적인 어떤 일을 시키시려하심이 아니라 단지 그들에게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한 신인지를 똑똑히 보여주려고 하셨을 뿐이다. 이 경험은 믿음의 초보 단계에 있는 자들에게 꼭 필요한 믿음에서의 ‘확신’이다.

 

그래서 모세는 그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는지를 지켜보라고 했다. 그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똑똑히 지켜보고 그 하나님이 너희가 섬기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똑똑히 알라는 명령이었다.

(출 14: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출 14: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성경이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로 하여금 이 역사적인 현장에 함께 참여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얻게 해주려 함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뼈 속 깊이 하나님을 인식하고 사는 삶을 살지 못했다. 늘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그들은 살아왔으나 그것을 피부로 느끼며 살지는 못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뼈 속 깊은데 까지 하나님을 느끼며 살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을 부르셨다. 그리고는 뒤에는 짓 푸른 홍해 바다가 그들을 삼킬 듯이 버티고 있고, 앞에서는 애굽의 전차들이 그들을 깔아뭉갤 기세로 달려오고 있는 바로 그곳에 장막을 치게 하셨다.

 

모세가 지팡이를 바다를 향해 들었을 때 그 바다가 양쪽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세상의 그 누가 이렇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어느 신이 이 같이 할 수 있었던가!

이 광경을 목도한 자라면 그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지 않을 수 있으랴!

 

이 이후에 그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을 향한 신뢰, 즉 믿음은 너무나도 강하게 자리했을 것이라 우리는 짐작한다. 그러나 우리의 그 기대와는 다르게 그들은 또 다시 자신들의 처지에 대해 불평과 불만을 모세 앞에 쏟아 붓기 시작했다.

 

그것이 믿음이 아직 자리 잡지 못한 자들의 모습인 것이다. 우리도 하나님을 믿노라 하지만 한 순간 위기의 순간이 닥치면 두려움과 놀라움에 사로잡힌다. 그래서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심지어는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한다. 내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충성했는데, 왜 내가 이런 불행한 일을 당해야 하느냐고.

 

하나님은 지극히 인격적이신 자이시기에 우리를 아무렇게나 대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믿음이 연약한 그 때에는 우리의 믿음의 눈높이에 맞추어서 그 믿음으로 감당할 만큼만 감당하게 하신다. 아직 이스라엘이 믿음이 연약할 때 하나님은 그 홍해를 당신의 손으로 갈라지게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홍해를 가르라고 하시지 않으셨다.

 

그들에게는 겨자씨만한 믿음도 없었다. 만약 그들에게 그 정도의 믿음이라도 있었더라면 또 다른 역사가 성경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이 산을 저리로 옮기라했으면 옮겼을 것이라 했다.

(마 17:19) 이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마 17:20)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그 순간에는 하나님이 홍해를 직접 가르셨지만 그들의 믿음이 장성했을 때, 하나님은 여리고성을 자신이 직접 곧 바로 허무는 대신에 그들의 믿음에 맡기셨다. 그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하나님의 지시하신대로 그 성을 돌았다.

(수 6:1) 이스라엘 자손들로 인하여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 없더라

(수 6:2)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

(수 6:3) 너희 모든 군사는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수 6:4)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행할 것이요 제칠일에는 성을 일곱 번 돌며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수 6:5) 제사장들이 양각나팔을 길게 울려 불어서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하시매

(수 6:6)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제사장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언약궤를 메고 일곱 제사장은 일곱 양각나팔을 잡고 여호와의 궤 앞에서 행하라 하고

(수 6:7) 또 백성에게 이르되 나아가서 성을 돌되 무장한 자들이 여호와의 궤 앞에 행할지니라

(수 6:8)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기를 마치매 제사장 일곱이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여호와 앞에서 진행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언약궤는 그 뒤를 따르며

(수 6:9) 무장한 자들은 나팔 부는 제사장들 앞에서 진행하며 후군은 궤 뒤에 행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며 행하더라

(수 6:10)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레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 하고

(수 6:11) 여호와의 궤로 성을 한 번 돌게 하니라 무리가 진에 돌아와서 진에서 자니라

(수 6:12)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니라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궤를 메고

(수 6:13) 일곱 제사장은 일곱 양각나팔을 잡고 여호와의 궤 앞에서 계속 진행하며 나팔을 불고 무장한 자들은 그 앞에 행하며 후군은 여호와의 궤 뒤에 행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며 행하니라

(수 6:14) 그 제이일에도 성을 한번 돌고 진에 돌아오니라 엿새 동안을 이같이 행하니라

(수 6:15) 제칠일 새벽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서 여전한 방식으로 성을 일곱 번 도니 성을 일곱 번 돌기는 그 날뿐이었더라

(수 6:16) 일곱 번째에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외치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느니라

 

(수 6:20)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듣는 동시에 크게 소리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취하고

 

누가 전쟁을 그리 한다는 말인가!

 

전쟁을 치룬 경험이 있는 지휘관이라면 하나님의 그 지시를 절대로 따르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전쟁을 어떻게 그런 식으로 하느냐고, 작전을 그렇게 짜고 하는 전쟁이 어디 있느냐하고 하나님을 비난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의 이스라엘백성들은 홍해 바닷가에 섰던 그 백성들이 아니었다. 그 순간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그런 믿음의 단계에 이른 자들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 뜻대로 실행했다. 그것을 확인하신 하나님이 그들의 믿음을 인정하셨다.

 

그래서 그 때에 하나님이 그 견고한 여리고성을 단숨에 무너뜨리셨던 것이다. 우리라면 그렇게 아무 의심 없이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있었을까? 그것이 믿음이다. 그들의 그 믿음은 그래서 성화 계단을 온전히 밟고 지나갔다. 드디어 하나님은 천국으로 상징되는 그 가나안 땅에 그들이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셨던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 광야 여정은 믿음을 성숙시켜나가야 할 우리에게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하는 이야기였다.

 

 

홍해가 갈라지는 그 큰 이적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지만 그들의 눈은 여전히 세상을 향하고 있었다. 그것이 초보 신앙인들의 모습이다. 성숙한 신앙인들은 그들의 눈이 항상 천국을 향해 있다.

 

그래서 세상의 그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스데반 집사가 돌멩이에 맞아 죽는 그 순간에도 그의 눈은 천국을 향해 있었다. 그래서 그 순간에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 주 예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이었다.

(행 7:55)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행 7: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행 7:57)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행 7:58)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반면에 홍해 바닷가에 서있었던 초보신앙인이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에는 암울하고 절망적인 현실이 가득 들어왔다. 먹을 양식과 마실 물이 없는 그 현실을 바라보고 그들은 모세를 원망했다.

(출 16: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산 사이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제이월 십오일이라

(출 16:2) 이스라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출 16:3)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

(출 16:4)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 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출 16:5) 제육일에는 그들이 그 거둔 것을 예비할지니 날마다 거두던 것의 갑절이 되리라

(출 16:6) 모세와 아론이 온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저녁이 되면 너희가 여호와께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을 알 것이요

(출 16:7) 아침에는 너희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가 자기를 향하여 원망함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관대 너희가 우리를 대하여 원망하느냐

(출 16:8) 모세가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저녁에는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이시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불리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향하여 너희의 원망하는 그 말을 들으셨음이니라 우리가 누구냐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

 

(출 17: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출 17:2)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가로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출 17:3) 거기서 백성이 물에 갈하매 그들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생축으로 목말라 죽게 하느냐

(출 17:4)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얼마 아니면 내게 돌질 하겠나이다

(출 17: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하수를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출 17:6) 내가 거기서 호렙 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출 17:7) 그가 그곳 이름을 맛사라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 하였음이더라

 

우리라면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고 어떻게 대했을까? 도무지 예쁠 것이 없는 그들이었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던 것이다. 그래서 반석에서 물을 내어주셨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그들의 배를 불려주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리 대우하심은 우리를 그렇게 대우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을 밝히심이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이 사랑을 우리는 이해하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가지 사실에 대한 깨달음에 도달해야만했다. 그들이 그 땅을 살아가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아는 그 깨달음에.

 

우리가 이 땅을 사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그것에 있다. 이스라엘은 이것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었다. 그 당시에 그 땅에 사는 많은 족속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밝히 드러내는 그 일을 그들의 삶을 통해 이루어 나갔어야만 했다.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그러나 그들은 겨우 그들의 입에 풀칠이나 하는 그 일에 몰두한 자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광야 여정에서 점차 믿음이 성장하여갈수록 그 땅의 족속들에게 두려운 존재가 되어져갔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전투를 치루었고 그 전투에 승리함으로써 그 땅의 족속들에게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내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었으니 그런 일을 감당하는 그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은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우리가 이 땅을 사는 날 동안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드러나게 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 될 것이다.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 삶은 분명히 목적 있는 삶이 될 것이요, 천국의 상급을 받을 만한 삶이 될 것이다.

 

이런 삶을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하노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