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2022. 6. 5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주님께서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한 서기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마 8:19)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씀하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마 8: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이것이 무슨 말씀일까?
여기에 등장하는 서기관은 예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한 것 같다.
그런데 서기관은 어떤 자들이던가!
이스라엘에서 서기관은 율법을 필사하거나 연구하여 가르치는 일을 전문하는 율법학자들이다. 이들은 주로 레위 지파에서 나왔으며, 이 직은 세습되었다.
이스라엘의 왕정 시대에서는 서기관의 역할이 국가 중요 문서를 기록하고 정리하며 보관하는 일,
(왕하 22:3) 요시야 왕 십팔 년에 왕이 므술람의 손자 아살리야의 아들 서기관 사반을 여호와의 전에 보내며 가로되
(왕하 22:4) 너는 대제사장 힐기야에게 올라가서 백성이 여호와의 전에 드린 은 곧 문 지킨 자가 수납한 은을 계수하여
(왕하 22:5) 여호와의 전 역사 감독자의 손에 붙여 저희로 여호와의 전에 있는 공장에게 주어 전의 퇴락한 것을 수리하게 하되
왕의 비서,
(삼하 8:15)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다스려 모든 백성에게 공과 의를 행할새
(삼하 8:16) 스루야의 아들 요압은 군대장관이 되고 아힐룻의 아들 여호사밧은 사관이 되고
(삼하 8:17) 아히둡의 아들 사독과 아비아달의 아들 아히멜렉은 제사장이 되고 스라야는 서기관이 되고
성전 창고지기,
(왕하 12:10) 이에 그 궤 가운데 은이 많은 것을 보면 왕의 서기와 대제사장이 올라와서 여호와의 전에 있는 대로 그 은을 계수하여 봉하고
(대하 24:11) 언제든지 레위 사람들이 궤를 메고 왕의 유사에게 가서 돈이 많은 것을 보면 왕의 서기관과 대제사장에게 속한 아전이 와서 그 궤를 쏟고 다시 그 처소에 갖다 두었더라 때때로 이렇게 하여 돈을 많이 거두매
징병관 등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었다.
(대하 26:11) 웃시야에게 또 싸우는 군사가 있으니 서기관 여이엘과 영장 마아세야의 조사한 수효대로 왕의 장관 하나냐의 수하에 속하여 떼를 지어 나가서 싸우는 자라
그러다가 포로기 이후에는 율법을 기록하거나 율법을 가르치는 교사 역할에 전념했다. 이는 포로기를 거치면서 서기관의 업무가 율법 중심으로 전문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기관은 어려서부터 집중적으로 양육되었고, 이렇게 양육받은 자들 중에는 14세 때 이미 율법 해석에 통달한 자들도 있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서기관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가정에서 부모나, 전문 교사를 통해 율법을 배우는데, 율법을 비롯한 각종 전승 사료를 해석하는 법, 종교 수칙, 재판 관련 법규 등 학습 과목도 다양했다.
이렇게 훈련받은 후에 자격을 인정받으면 '탈미드 하캄'(보조교사)이란 칭호를 받았고, 계속해서 수련을 쌓아 40세가 되면 안수를 받고 '하캄'(정교사)으로 불리며 정식 서기관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이렇게 정식으로 서기관이 된 자는 전승을 해석하고 새로운 전승을 창출하며, 종교적인 규약을 만들고 재판관의 일원으로서 민형사상의 재판에도 참여하는 등 명실상부한 유대사회에서의 최고 지위를 누렸다.
또한 이들이 만든 전승은 율법 이상의 권위를 가지는 등 서기관의 권한은 실로 막강하였다. 서기관은 신약 시대에 와서는 율법교사로도 불렸으며, 대부분 바리새파에 속하였고 산헤드린 공회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서기관들은 막강한 권한을 배경으로 외식을 일삼고 백성을 그릇되게 지도하여 주님으로부터 꾸지람을 받았다. 이에 반발하여 서기관들은 항시 주님을 시험하고, 송사할 근거를 찾기에 혈안이 되었고, 마침내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죄까지 서슴없이 자행하였다.
(마 20:18)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초창기의 서기관들은 권력 측면에서 그다지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수백 년의 세월을 거쳐 예수께서 사역하시던 시대에 이르러서는 성경 지식에 관한 독점권을 가진 신흥 권력집단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이들은 하루 종일 성경을 읽고 쓰는 것이 일이다 보니 성경 속의 수많은 율법들을 통째로 암기하고, 그 해석에 관해 스승에게서 제자로 전승된 수많은 지식들이 쌓여서 남들에게 토라를 가르치는 율법선생(랍비)의 지위를 차지하게 됐을 뿐 아니라 은연중 사람들이 율법을 제대로 지키는지 감시하고 비판하고 정죄할 수 있는 부수적인 권력까지 지니게 된 것이다.
글을 모르는 대중은 결국 서기관들의 눈과 입을 통해 성경을 이해할 수밖에 없으니 그들의 영향력은 지대한 것이었다.
정확한 성경말씀과 율법에 의거하여 신앙의 세속화를 거부하면서 티끌 한 점 없이 깨끗하고 의롭게 신앙을 지킨다는 서기관들의 초심은 나쁜 것이 아니었지만 율법의 자구와 획수를 지키는데 너무 전전긍긍하다 보니 어느 순간에 사랑과 공의를 담고 있는 하나님 말씀의 본질을 잊어버리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점차 자신들의 권력을 이용해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늘리고 겉으로만 의로운 척 하면서 뒤로는 엄청난 비리와 방탕한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이 사실을 주님은 모르실리 없으셨으니 위선적인 그들을 질책하는 장면이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마 23:1)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마 23: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마 23: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마 23:4)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마 23:5)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마 23:6)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마 23:7)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마 23:8)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마 23:9)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마 23:10)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마 23:11)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마 23: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마 23: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마 23:14) (없음)
(마 23:1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마 23:16) 화 있을진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마 23:17) 우맹이요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금이냐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마 23:18)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마 23:19)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예물이냐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마 23:20) 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마 23:21)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마 23:22) 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
(마 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마 23:24)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마 23: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마 23:26)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마 23: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마 23:28)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마 23:29)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마 23:30)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마 23:31)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
(마 23:32)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마 23: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그 서기관도 이러한 서기관들 중의 하나였다. 이 서기관에 대해 혹자는 그가 진심으로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예수께로 나아왔고, 그래서 주님의 제자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때 예수께서는 이 서기관에게 예수의 제자가 되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고단한 일인지에 대해 말씀하시려고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단다.
머리 둘 곳인 쉴만한 거처, 즉 집 한 칸도 장만하지 못하는 그런 삶을 살지도 모른다는 의미의 말씀이었다고 한다. 과연 예수께서는 그런 의미로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을까?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이던가?
그는 죄인을 구하여 살리시려고 이 땅에 오신 메시아가 아니시던가?
그러므로 예수께서 하신 일은 오직 이 구원에 관계되는 일이었다. 만약 혹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예수의 제자가 되는 그 일이 힘들고 고된 것을 표현하는 것이라면 구원을 얻는 그 일이 고행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의미가 되어질 것이다. 구원은 정말 많은 수행을 통해 얻어질 수 있는 일이던가?
또 쉴만한 집 한 칸조차도 마련하지 못하는 그런 형편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밝히시는 말씀이라면 구원 얻는 그 일이 금욕적인 생활을 통해서도 이루어 질 수 있다는 것이 아닌가?
과연 금욕적인 생활을 하는 그것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주어지는 일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미 창세 전에 구원의 은혜를 베풀 자들을 미리 정하셨다. 이를 우리는 ‘선택’된 자라고 한다.
구원은 고행을 통해서도 아니고 물질에 대한 욕심을 버리는 금욕적인 삶을 산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얻어지는 것이 구원이다.
그러면 예수께서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신 것은 무슨 의미였을까?
그 서기관은 분명 예수의 많은 이적들을 듣기도 하고 직접 보기도 하였을 것이다. 서기관들은 전형적인 외식하는 자들이었다. 시장이나 그 외 장소에서 그들이 지나가면 많은 사람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그들에게 예의를 표하였다고 한다. 그들이 긴 옷을 입고 다니며 거드름 피우는 그 모습이 얼마나 가관이었을까!
(막 12:38)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가라사대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막 12:39)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막 12:40)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것을 의도적으로 즐겼다고 한다. 그러했기에 어떤 서기관들의 입장에서는 예수의 이적 행하는 그 모습이 그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예수를 찾아온 이 서기관도 자신이 예수의 제자가 되어 예수처럼 그렇게 이적을 베풀어 많은 사람들로부터 관심을 끌어보려 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그 어떤 서기관보다도 더 모양새가 날 수 있다고 욕심을 품었을지도 모른다. 또 혹시는 이런 재주를 부려 그것으로 재물을 모으려는 욕심도 품었을지도 알 수 없다.
이제는 주님의 입장으로 돌아가서 살펴보자.
예수에게서 머리 둘 곳이란 어디인가?
머리를 두는 곳은 곧 잠자며 쉴 곳을 말한다. 집이란 말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 단지 쉴만한 집 하나를 장만하시려고 오셨단 말인가?
예수는 하나님이시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니, 이 땅의 모든 것이 그의 소유이다. 그런 예수께서 이 땅에서 쉴만한 집하나 없다고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그는 분명히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그의 집이란 곧 성전이다. 그런데 그 성전이란 성경에서 우리의 마음이라 했다. 믿음의 백성들의 그 마음이 성전인데, 예수를 찾아온 자칭 제자라 하는 이 서기관의 그 마음은 어떠한가?
(고전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고전 3: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그의 마음은 온갖 세상적인 욕망과 위선으로 가득하였으니 어디 빈 공간이라도 있었을까?
그 온갖 추악한 것으로 가득한 그 공간에 예수께서 좌정하실 수 있었을까?
예수께서는 그런 그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내가 보니 너의 마음에 세상적인 탐심이 가득하여 빈 공간이 없구나. 그래서 내가 그곳에서 쉴만한 구석을 찾을 수가 없구나”하는 의미를 담은 예수의 말씀이 “인자가 머리 둘 곳이 없도다”였다.
그런데 이 서기관이 바로 우리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인물이라면 어찌할꼬!
그는 종교적으로 상당한 지위에 있는 자였다. 서기관들은 그 시대에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어쩌면 신앙적 연륜이 깊은 우리들과 같을지도 모른다.
서기관들은 시대가 흐를수록 그들의 신앙적 모습이 마치 굳은살처럼 딱딱해졌다. 그래서 신앙적 외식에 사로잡혀 율법의 자구만 따지고 그 내면에 있는 본질적인 하나님 사랑에 관해서는 무감각해졌을 것이다. 그래서 신앙적 아집과 고집만 남아있는 그 모습이 어쩌면 우리들의 그 모습일지도 모른다.
혹자는 이 서기관이 나중에 주님의 참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주님의 참 제자가 되었는지는 여기서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본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기를 원하는 것은 지금 이 순간, 내가 어떤 믿음의 선택을 하는가에 있다.
내일은 우리의 영역이 아니다. 내일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속한 것이어서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만날 수 없는 시간의 영역이다.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의 영역은 오늘뿐이다. 어떤 믿음을 선택하여야 하는가 하는 것은 오늘 이 순간에서의 일이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어떤 믿음의 자리에 서 있는가가 하나님께서 관심 가지시는 일이다. 이 서기관이 어떤 믿음의 마음을 소유했는지를 주님은 보고 계신 것이었다. 그가 내일 회개하여 주님의 참 제자의 자리에 선다는 것은 그 서기관의 선택의 몫이 아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그는 내일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두 번째 제자가 등장한 것이다.
(마 8:21)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마 8:22)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두 번째 등장하는 이의 관심은 지금이 아니라 나중이었다. 지금 당장 예수의 제자로서의 그 사명을 감당하는 대신에 세상적인 일, 즉 부친의 장사를 먼저 지낸 후에 나중에 주의 제자로서의 일을 하겠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지금뿐이다. 이 땅에서 가장 귀하고 가치있는 일은 주님의 뜻에 따라 그 일을 이루는 일, 즉 구원사역에서 그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다. 예수를 따르는 것은 바로 이 일을 위함이었다.
그래서 주님은 이 순간 그 일을 감당하라고 그 제자에게 명하고 계신 것이다. 세상에 속한 자, 즉 구원에 이르지 못할 자들은 구원사역에서의 이 일을 할 수 없다. 할 수 없는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죽은 자를 장사하는 일이었다. 그들은 신앙 안에서는 죽은 자들이다. 그래서 주님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라 하신 것이었다.
과연 우리는 주님의 그 뜻대로 지금 이 순간 그 일을 감당하기로 준비되어 있는가?
마태복음의 이 말씀에 대한 평행본문이 누가 복음에 있다. 누가복음에는 마태의 그 기록에 없는 세 번째의 제자가 등장한다. 그는 주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한다. 그런데 조건이 있다. 먼저 자신의 가족과 작별하게 허락해달라는 것이다.
(눅 9:57) 길 가실 때에 혹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눅 9: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눅 9:59)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눅 9:60)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눅 9:61)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눅 9: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그 말은 지금은 가족과 작별인사를 하고 나중에는 주님의 제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겠다는 것이다. 이 말에는 교만함이 가득하다. 나중이 자신의 영역 안에 있어 자신의 뜻대로 하겠다는 것이다. 나중이 자신의 영역이던가?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오지 않는 그 영역을 어찌 자신의 뜻대로 하겠다는 것인가!
이것이 교만이다. 주님의 제자는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 귀한 것이 겸손이다. 지금 주님의 그 뜻에 따르는 것이 순종이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했다.
(벧전 1:13)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벧전 1:14)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벧전 1: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벧전 5: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삼상 15:22)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하셨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본다는 것은 이미 지나간 것에 대해 미련을 두는 일이다.
그러나 이미 지나온 것에 대한 결과물도 우리의 영역의 일이 아니다. 미래와 마찬가지로 과거도 전혀 우리의 영역이 아니다. 어찌 다시 손 댈 수 없는, 할 수 없는 영역이 과거이다. 오직 현재만이 우리에게 허락된 영역이며, 이 영역에서 순종하는 마음으로 주어진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마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이 사명을 감당함에서 특별히 ‘곧’이라는 표현으로 즉각적인 순종을 강조하고 있다. 주님의 제자들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이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서 결코 주저함이 없어야 한다. 우리들은 모두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이다.
아비를 장사 지낸 후 또는 가족과 작별인사를 한 후에 예수를 따르겠다는 것은 주저함이었다. 이는 주님의 제자된 자가 취할 자세가 아니었다. 성경이 이 사건을 기록한 것은 우리에게 주저함이 없는 신앙의 소유자가 되라고 교훈하심이었을 것이다.
(막 1:17)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막 1:18) 곧 그물을 버려두고 좇으니라
주저하는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진실로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백성들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목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