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2022. 5. 29.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튜닝이란 라디오·텔레비전 방송 따위에서 수신기나 수상기의 다이얼을 돌려 주파수를 조절하여 특정한 방송국을 선택하는 일을 말한다.
라디오를 켰을 때 찌직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은 그 라디오가 어떤 방송에도 동조되어있지 않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 때 어떤 특정 방송을 듣기 원하여 다이얼을 돌리는 것은 그 방송국의 주파수에 맞도록 라디오에 내장된 동조회로를 움직여주는 일이다.
이 회로는 동조를 이용하여 특별한 주파수의 진동 전류만을 골라내는 일을 한다. 이렇게 해서 라디오에 내장된 동조 회로와 맞는 주파수를 찾아냈을 때 비로소 즐거운 음악을 잘 들을 수 있다. 이것이 ‘튜닝 (tuning)’이다.
우리의 믿음도 그러하다. 우리 속에 내장된 동조회로를 움직여 하나님의 주파수를 찾아가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실 때 우리 속에 ‘자유의지’를 심어주셨다. 이는 일종의 동조회로였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를 로봇과 같이 만드셔서 무조건 하나님만 섬기도록 설계하여 만드셨다면 우리 속에는 그런 동조회로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주파수에 맞추려고 노력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셨더라면 하나님을 섬기며 기쁘시게 하는 그 일을 선택한 것은 누가 한 것이 될까?
만약 처음부터 그렇게 프로그램되어 있었다면 우리 스스로가 그 일을 선택했다고 할 수 있을까?
엄마들이 아기를 키울 때 그 아기를 통해 큰 기쁨을 얻는다. 그 아기의 재롱을 통해 얻는 그 기쁨과 같은 것을 또 어디에서 얻을 수 있을까!
엄마는 그 아기가 재롱을 피울 수 있도록 여러 가지 환경과 여건을 만들어 준다. 그런 상태에서 아기는 자연스럽게 엄마에게 재롱을 피운다. 그 때 그 엄마는 아기에게 잘했다고 무한히 칭찬하며 보상을 해준다.
그런데 사실은 그런 결과를 얻도록 모든 것을 준비해준 이는 그 엄마가 아닌가?
그럼에도 그 엄마는 그 아기가 재롱을 피웠다는 그 이유로 모든 공을 그 아기에게 돌린다. 이것이 엄마의 사랑이고 그 아기는 그 엄마의 그 사랑을 먹고 자란다.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가 그러하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하시고, 그 아기가 엄마 앞에서 재롱을 부려 그 엄마를 기쁘고 즐겁게 해주듯이 우리가 우리의 그 자유의지를 행사하여 하나님께 영광돌림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게 하셨다.
그 자유의지를 행사하여 이룬 그 모든 결과를 하나님은 우리의 공로로 인정해주시고 상급을 예비하신다. 그런데 그것이 참으로 순전히 우리가 이룬 것이라 할 수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것을 우리가 노력하여 이룬 결과라고 인정해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를 위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마 10:40)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마 10:41)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마 10: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고전 3: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고전 3:12)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고전 3:13)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고전 3:14)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우리의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그 의지에 항상 종속된다. 요나서의 이야기는 이를 증명한다.
요나가 니느웨의 멸망을 예고하여 그들을 돌이키는 그 일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요나는 그 일을 거부하고 도망을 갔다. 이는 자신의 주파수를 하나님의 주파수에 맞추기를 거부하는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른 결정이었다.
(욘 1:1)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욘 1:2)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욘 1:3)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그러나 하나님은 요나가 니느웨를 회개시키는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요나의 환경을 계속 변화시켜주셨다. 변화된 그 환경에서 요나는 자신의 자유의지를 발동하여 또 다시 새로운 결단을 하는 과정을 계속 이어갔다. 그 과정에서 그 결정은 언제나 요나 자신이 자신의 자유의지를 발동하여 스스로 한 결정이었다.
요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은 요나가 하나님의 그 뜻에 따라 니느웨 사람들을 회개시키는 그 일을 하도록 견인하셨다.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을 회개시키는 그 일을 하지 않는다면 그가 니느웨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음이 된다. 정말로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을 미워했다.
이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그 명령을 어김이 된다. 만약 니느웨 사람들이 천국에 간다면 요나는 천국에 갈 수 없는 자가 되고 만다. 왜냐하면 천국은 미워하는 사이에 있는 자들이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오직 사랑으로 충만한 곳이 천국이며, 진실로 사랑을 행하는 자들만이 갈 수 있는 곳이다.
요나가 천국에 갈 수 없다면 이는 그가 구원받을 자로 선택되지 못한 유기된 자의 자리에 섬을 의미한다. 이는 요나에게 불행한 일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못하는 일이 되고 만다.
이런 불행한 일이 생겨나도록 하나님은 버려두실까?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은 요나로 하여금 니느웨로 가서 그들을 회개시키는 그 일을 하게 만드셔야만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무한하신 그 의지는 요나의 자유의지를 포용하여 요나 스스로 그 자유의지의 훼손 없이 내린 그 결정이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도록 작동하셨다.
요나가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을 때 풍랑을 일으킨 것은 요나가 새롭게 변한 환경에서 다시 자신의 자유의지를 작동시켜 새로운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의지가 작용한 일이었다.
(욘 1:4) 여호와께서 대풍을 대작하여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된지라
(욘 1:5) 사공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욘 1:6) 선장이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니라
그러나 그 순간에서도 요나는 하나님의 뜻과는 다르게 결단을 하였다. 니느웨로 배를 돌리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는 것이었다. 그 때에도 하나님은 요나를 위해 큰 물고기를 준비하시는 일을 하셨다. 그 물고기 배에서 요나가 다시 결단을 한다.
(욘 1:9)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욘 1:10) 자기가 여호와의 낯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고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욘 1:11) 바다가 점점 흉용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욘 1:12)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욘 1:13) 그러나 그 사람들이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에 돌리고자 하다가 바다가 그들을 향하여 점점 더 흉용하므로 능히 못한지라
(욘 1:14) 무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여호와여 구하고 구하오니 이 사람의 생명 까닭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 하고
(욘 1:15)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의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
(욘 1:16) 그 사람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더라
(욘 1:17)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삼 일 삼 야를 물고기 배에 있으니라
그 때는 니느웨로 가기로 결단한 것이다. 그 결단은 요나가 한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그 사랑하는 자를 위해 더 좋은 것으로 항상 예비하셨다. 우리는 과연 이런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
(욘 3:1)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욘 3:2)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욘 3:3)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극히 큰 성읍이므로 삼 일 길이라
(히 11:36)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히 11: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히 11: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히 11:39)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히 11: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더 크신 의지가 작동하심은 우리가 그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하여 옆길로 갈 때에 바른 길로 인도하시려는 하나님의 그 사랑의 발로이다. 사랑하며 애지중지하는 그 아기가 물가로 아장아장 걸어가는 것이 귀엽다고 내버려둘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성경에서 자신의 주파수를 하나님의 주파수에 맞추는 삶을 산 대표적인 인물의 예는 아브라함이다.
그가 부르심을 입은 후에는 그의 삶은 자신의 주파수를 하나님의 주파수에 맞추는 그 일의 연속이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자신의 뜻에 따라 자신이 의지를 가지고 무언가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셨다. 이를 우리는‘자유의지’라고 표현한다. 이 자유의지는 무엇에 의해 누구로부터 제한 받음이 없다. 하나님조차도 이 자유의지의 사용함에 대해서는 억압을 가하지 않으신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것은 그 자신이 소유한 그 자유의지에 따른 결과적인 행위였다. 성경 기록에 따른 그 장면에서 목격할 수 있는 자들은 아담과 자신의 아내 하와 그리고 그들을 유혹한 뱀뿐이었다. 그 자리에는 하나님이 아니 계셨다.
(창 3:1)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창 3: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창 3: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창 3: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창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창 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창 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전지하신 하나님이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그 나무의 열매를 먹을 것을 모르시고 그 자리에 아니 계셨던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을 것을 알고 계셨다.
(창 3:8)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창 3: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창 3:10)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창 3:11)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창 3:12)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그런데 아담이 잘못된 선택을 하는 그 자리에 아니 계셨던 것은 아담을 인격적으로 대우하심이었고, 그래서 아담 자신이 스스로 자유의지에 따른 그 선택을 하는 것을 존중하심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이 자유의지는 무한대로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이 자유의지는 더 큰 하나님의 그 의지에 종속된다. 하나님의 그 무한하신 의지에 의해 인간의 자유의지는 견인되고 결국은 하나님의 그 뜻은 성취되어진다.
하나님의 그 무한하신 의지에 의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이것을 우리는 ‘작정’이라 부른다. 그래서 역사의 흐름은 항상 하나님의 정하신 그 뜻에 따라 이루어져가는 것이다.
바사왕 고레스에 의해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그 성을 중건한 것도 이 작정에 속하는 일이었다. 구원을 얻을 자들이 ‘선택’되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 원죄에 따라 멸망으로 이르게 될 자들로 버려두시는, 즉 간과될 자가 정해지는 ‘유기’의 이 일들도 하나님의 작정에 속한 것이기는 하나 이 일들을 특별히 구분하여 ‘예정’이라고 칭한다.
아브라함은 그가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 순간의 아브라함은 온전히 하나님께 ‘동조’되지 못한 자였다. 자신의 주파수가 하나님의 주파수에 온전히 맞추어져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가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 속인 그것이 바로 이 사실을 말해준다.
그가 그렇게 일을 꾸민 것은 자신의 자유의지로 그리한 일이다. 그러나 그의 자유의지로 결정한 그 일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되지 못했다. 이는 그의 주파수가 하나님의 그 주파수와 같지 않음을 보인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부합하는 그 결정을 하여야 하나님의 주파수에 온전히 동조되었다고 할 것이다.
하나님의 주파수에 동조되었을 때는 그의 입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른 말씀이 흘러나와야만 하고, 그 말씀대로 움직여야만 한다. 한 순간 하나님의 주파수에 자신의 주파수를 맞추는 그 동조에 실패한 아브라함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동조’작업을 이어갔다.
그리할 때 하나님은 자신의 그 무한하신 의지로 아브라함의 그 자유의지를 품어주셨다. 그래서 그는 점진적으로 하나님의 주파수에 자신을 맞추어 나갈 수 있었다. 이것이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려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그 사랑이시다.
그가 모리아 산에서 자신의 독자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는 그 일을 결행에 옮긴 그 순간은 자신의 주파수를 하나님의 주파수에 완전히 일치시킨 완벽한 ‘동조’의 순간이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깨달아 들을 수 있었다. 그 순간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온전히 기쁘시게 하는 참된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창 22: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창 22: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창 22: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창 22:4)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창 22:5) 이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창 22:6)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창 22:7)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창 22:8)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창 22:9)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창 22: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창 22: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창 22:12)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그에 반하여 그 아들 이삭은 참으로 지혜로운 자였다. 그 아비 아브라함의 삶을 지켜보면서 하나님의 뜻을 살폈고, 그래서 그는 그 어린 나이에 자신의 주파수를 하나님의 주파수에 온전히 동조시킬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에 이를 자로 선택하신 이 이삭에게서 그 순간 달리 더 훈련시킬만한 부분을 찾을 수 없었다.
따라서 그는 온전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었고, 그래서 그 이후에는 이삭에 관한 성경의 그 기록은 아버지 아브라함에 비하여 무척 적은 지면을 차지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그 외에 많은 믿음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와 그 반대로 그렇지 못하고 간과하신 자들의 이야기를 함께 성경에 기록케 하신 것은 그 예들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주파수에 동조시키는 그 일을 힘써 하되 지혜롭게 하여 이삭처럼 에녹처럼 그렇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라는 그 뜻을 담은 표현이었을 것이다.
에녹은 처음부터 자신의 주파수를 하나님의 주파수에 온전히 일치시킨, 하나님의 뜻에 동조된 자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에게 더 이야기 하실 것이 없었다. 그래서 성경에서의 그의 기록은 아브라함과 비교해서 너무나도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라는 표현은 자신의 주파수를 하나님의 주파수에 온전히 일치시킨 완전히 동조된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그 삶은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삶이었을 것이다. 그의 삶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런 삶을 살라고 요구하고 계시는 것이다.
(창 5:18) 야렛은 일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창 5:19) 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창 5:20) 그가 구백육십이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창 5:21)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창 5: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창 5:23) 그가 삼백육십오 세를 향수하였더라
(창 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히 11: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우리 속에 있는 동조회로가 사단의 주파수에 동조되지 않도록 늘 살피는 것이 깨어 있는 믿음이다. 우리가 잠시 긴장을 풀고 졸면 어느 순간에 사단이 우리의 그 동조회로를 자신의 주파수에 맞도록 조정해버린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깨어있으라 말씀하신 것이다.
(마 26:40)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마 26: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