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2022. 5. 22.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1.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란 어떤 것인가?
물리적인 현상 중에 공명현상이라는 것이 있다. 공명의 사전적 의미는 발음체가 외부 음파에 자극되어 이와 동일한 진동수의 소리를 내는 현상이다.
가만히 있는 한 소리굽쇠에 그와 진동수가 같거나 유사한 소리굽쇠가 진동하면서 가까이 다가오면 가만히 있던 그 소리굽쇠도 같이 진동하며 소리 내는 그 현상이 공명이다.
만약 진동수가 전혀 다른 소리굽쇠가 진동하면서 다가오면 준비된 그 소리굽쇠는 진동하지 않고 따라서 소리를 내지 않는다. 공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령하나님의 인도를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공명되어짐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그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공명되어질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하나님과 함께 동행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 공명된 삶을 살아감을 의미한다. 우리가 진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갈망하고, 그것을 위해 기도할 때 이러한 공명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 나의 이익과 내 뜻대로, 내 방식으로 하는 삶 속에서는 결코 이 공명현상은 일어나지 않는다.
하나님께 공명되는 삶이란 오직 하나님이 명하신 그 뜻대로 모든 것을 행하는 그 삶, 즉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다.
이와 같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호 4:1)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거민과 쟁변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호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골 1:10)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요일 4:6)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 삶, 즉 하나님께 완전히 공명된 그런 삶을 살아내려고 애를 써야한다. 구약에서의 에녹이 그런 삶을 살았고, 노아 또한 그런 삶을 살았다.
이런 삶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에녹에게 죽음을 보지 않게 하시고 그를 데려가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창 5:21)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창 5: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창 5:23) 그가 삼백육십오 세를 향수하였더라
(창 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 6:9)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창 6:22)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하나님이 명하신 그대로를 다 준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에게 사랑하는 어떤 사람이 있다면 어찌하든지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 다 해주려고 할 것이다. 그것이 사랑이다.
사람을 사랑함에서 그러할진데, 하물며 하나님을 사랑함에서야 어찌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다 행하지 않을 수 있으랴!
이런 삶이 하나님께 공명된 그 삶이라 할 것이다.
사도바울 역시 그런 삶을 살았다. 그가 그런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깨달았고,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소원했다. 그러했기에 그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었고, 그 삶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하는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지 못했다. 세상을 탐하는 그 욕망은 하나님의 울림에 공명되지 못하게 막았다. 제사장들은 성전세를 받아 챙겼고, 바리새인들도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었다.
(마 17:24)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이는 ‘성전세’이다)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가로되 너의 선생이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마 17:25) 가로되 내신다 하고 집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가라사대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뇨 세상 임금들이 뉘게 관세와 정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마 17:26) 베드로가 가로되 타인에게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하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마 17:27) 그러나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
(눅 16:14)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그런고로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공명될 수 없는 자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성령의 함께 하심이 있지 않았다. 그런 그들이 설 곳은 가장 불행한 자의 자리, 즉 하나님을 배척하는 자의 자리였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욕심과 그 소견대로 결국은 오신 메시아를 십자가에 매다는 그 일까지 서슴지 않았다.
사도바울이 깨달은 것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그 깊으신 사랑이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 예수가 자신을 부른 것은 오직 자신을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이었고, 그 사랑을 모두에게 전하기를 원하시는 그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은 것이었다.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라는 이 말씀 속에 주께서 그를 사랑하심이 담겨져 있다.
예수께서 아나니아에게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라고 하신 말씀 중에 바울이 기도를 하고 있다고 했는데, 이 기도를 통해 바울은 하나님에게 공명되는 그 삶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 일이 있기 전에 이미 그는 세상의 모든 욕망을 버렸다. 이전까지는 권세있는 유대교의 가장 열심인 자였지만 이제는 세상의 권세에 대한 욕망과 재물에 대한 욕심도 버렸다. 심지어는 그의 뛰어난 세상적 학문조차도 배설물로 여기게 되었다.
그는 이렇게 하나님께 공명됨으로써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위대한 사도로 거듭남을 입을 수 있었다.
(빌 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빌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빌 3: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변화되기 전의 바울은 자신이 베냐민 지파에 속한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는 유대인 방식으로 히브리말로써 양육을 받았다. 또한 바리새파의 가장 엄격한 신앙교육을 받았으며 가장 존경받는 가말리엘 문하에서 수학을 하였다.
그러하였기에 그는 바리새인 중에서 가장 신실하게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유대교의 모범 신자였다. 그래서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자처했다. 그러나 그 일들은 하나님이신 예수의 뜻과는 달랐다.
(롬 1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행 22:3)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
(행 22:4) 내가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행 22:5)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저희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
(빌 3:5)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빌 3:6)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바울처럼 그렇게 기도함으로써 하나님께 공명되었듯이 우리 역시 하나님에게 공명되는 삶을 살아야한다. 그 삶은 전적으로 성령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그런 삶이 될 것이다. 그 삶은 또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이 되어질 것이다.
(행 9:3)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행 9: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행 9:5)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행 9:6)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행 9: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행 9: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행 9:9)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
(행 9:10)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가라사대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행 9:11)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행 9:12) 저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행 9:13)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행 9:14)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
(행 9:15)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행 9: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행 9: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행 9: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행 9:19)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행 9: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행 9:21)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부르는 사람을 잔해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행 9:22)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
사도바울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그 능력의 원천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을 깨달음에 있었다. 그가 하나님께 공명됨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이 그의 능력이 될 수 있었다.
(요일 4: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요일 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일 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요일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요일 4: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요일 4: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요일 4:13)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이는 마치 같은 진동수를 가진 정지된 소리굽쇠가 같은 진동수를 가진 또 다른 소리굽쇠가 진동하며 가까이 다가올 때 그 소리 에너지를 받아 울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능력이 그에게 전가된 결과였다. 그가 그 사실을 경험하였기에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이 사랑이 제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고전 13: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고전 13:2)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고전 13: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전 13:9)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고전 13: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고전 13: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고전 13:12)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전 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그가 말한 사랑이란 하나님의 가장 기본적인 속성이다. 우리의 이 사랑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 없이는 결코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이해할 수 없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없다. 그러하기에 예수께서는 그 사랑을 잃어버린 에베소 교회를 책망하신 것이다.
사랑을 잃어버렸으니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 삶이 상실된 교회가 된 것이다.
그런 교회를 어찌 능력있는 교회라 할 것인가!
또한 그러한 교회가 어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역을 감당할 수 있으랴!
부름 받은 우리를 교회라고 한다. 그런데 교회인 우리가 이 에베소 교회라면 어찌할까!
(계 2: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계 2: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계 2: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계 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계 2: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계 2:6)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계 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반면에 세상적으로는 능력이 없어 보이는 빌라델비아 교회였지만 그 교회는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교회였다. 그러했기에 주의 인내의 말씀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교회는 주님과 동행하는 교회였으나 세상적으로는 능력이 없어 보였다.
그러할지라도 시험의 때에 그 시험을 능히 면하는, 누구도 넘보지 못하는 큰 능력을 드러낼 수 있게 되는 것은 주의 능력이 그 교회에 임하기 때문이다. 이는 진실로 하나님에게 공명된 그 교회였다. 우리가 이런 교회여야하지 않을까?
(계 3: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계 3: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계 3:9)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계 3: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계 3:11)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계 3: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계 3:13)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2. 복음 전함에 있어서 철학적 변론의 무가치함에 관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그 사역에 필요한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사람은 미약한 존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손은 나귀 턱뼈 하나로도 일천 명의 블레셋 사람들을 죽였고, 마지막에는 집 기둥을 무너지게 하여 수천 명을 죽이는 초인적인 힘을 보였다. 이 힘은 도대체 어디에서 난 것인가?
그가 머리털이 모두 제거되었을 때는 보통 사람과 다름없었다. 그가 나실인으로서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 공명되는 자였다는 의미였다. 그의 힘의 원천은 하나님에게 공명되는 그것에 있었던 것이다.
(삿 13:5)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
(삿 13:24) 여인이 아들을 낳으매 이름을 삼손이라 하니라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
(삿 16:17) 삼손이 진정을 토하여 그에게 이르되 내 머리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내가 모태에서 허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 만일 내 머리가 밀리우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하여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삿 15:14) 삼손이 레히에 이르매 블레셋 사람이 그에게로 마주 나가며 소리지르는 동시에 여호와의 신의 권능이 삼손에게 임하매 그 팔 위의 줄이 불탄 삼과 같아서 그 결박되었던 손에서 떨어진지라
(삿 15:15) 삼손이 나귀의 새 턱뼈를 보고 손을 내밀어 취하고 그것으로 일천 명을 죽이고
(삿 15:16) 가로되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일천 명을 죽였도다
(삿 15:17) 말을 마치고 턱뼈를 그 손에서 내어던지고 그곳을 라맛 레히라 이름하였더라
(삿 16:26) 삼손이 자기 손을 붙든 소년에게 이르되 나로 이 집을 버틴 기둥을 찾아서 그것을 의지하게 하라 하니라
(삿 16:27) 그 집에는 남녀가 가득하니 블레셋 모든 방백도 거기 있고 지붕에 있는 남녀도 삼천 명 가량이라 다 삼손의 재주 부리는 것을 보더라
(삿 16:28)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이 나의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
(삿 16:29) 집을 버틴 두 가운데 기둥을 하나는 왼손으로, 하나는 오른손으로 껴 의지하고
(삿 16:30) 가로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
성령하나님의 도우심에 의한 증언은 하나님과의 울림, 즉 하나님에게 공명된 울림의 말씀이기에 능력이 있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이 울림이 없는 인간의 지혜의 결정체인 철학적 논증으로는 하나님께서 이미 선택하신 자를 결코 하나님과의 울림에로 인도할 수 없다.
그 옛날 진공관을 이용하여 만든 전축이라는 것이 있었다. 보통 이 진공관 앰프는 그 내부 임피던스가 4Ω이었다. 그래서 외부에 소리를 내기 위해 4Ω의 임피던스를 가진 스피커를 연결했다. 동일한 임피던스를 갖는 이 스피커를 연결하는 것을 ‘임피던스매칭’이라고 부른다.
현재는 반도체 소자를 이용하여 앰프를 만들기 때문에 요즘의 보통 가정용 오디오 장비는 내부 임피던스가 8Ω이다. 따라서 현재는 8Ω의 스피커를 연결해야 임피던스매칭이 된다. 만약 4Ω의 내부임피던스를 갖는 앰프에 이 8Ω의 스피커를 연결하면 소리의 효율이 극대화되지 않는다. 아무리 명품스피커일지라도 이 임피던스매칭이 되지 않는 연결을 하게 되면 소리가 찌그러져 무용지물이 될 뿐이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바울은 아덴에서 자신의 세상적 학문을 통해 얻어진 지식을 총동원하여 철학적인 논증으로 아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했다. 바울은 세상적인 학식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그는 가말리엘 문하에서 학문을 익힌 자였다. 그러나 아덴은 또 어떤 곳이던가?
바울 당시 아덴은 플라톤의 이상주의, 에피큐러스의 향락주의, 스토익의 금욕주의가 유행하던 곳이다. 이곳은 지정학적으로 많은 외침을 받아 정치, 군사적으로 숱한 정복을 당했지만, 그곳을 정복한 세력들이 예외없이 그곳의 학문과 문화에 영향을 받아 융화될 정도로 고도로 세상적 지혜가 발달된 곳이었다.
바울은 제2차 선교여행 중에 이곳을 방문하여 회당과 시장, 아레오바고 등지에서 복음을 전하였다. 그 과정에 바울은 새로운 가르침에 대한 관심이 있으면서도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던 그곳 철학자들과 변론하였다.
그런 곳에서 그들과 철학적 변론을 통해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지 않는 일이었다. 따라서 그의 변론은 무력했다. 이는 마치 임피던스매칭이 되지 않은 것과 같았다. 복음을 전하는 이 일에 세상적 지혜는 전적으로 무익할 뿐이었다.
결국 바울은 그곳에서 교회를 세우는 그 열매를 맺지 못했다.
(행 17:16) 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여
(행 17:17)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저자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행 17:18)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혹은 이르되 이 말장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 하고 혹은 이르되 이방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
(행 17:19) 붙들어 가지고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우리가 너의 말하는 이 새 교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겠느냐
(행 17:20) 네가 무슨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행 17:21)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 되는 것을 말하고 듣는 이외에 달리는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행 17: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행 17: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행 17: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행 17: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행 17: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행 17:27)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행 17: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행 17:29)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행 17: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행 17: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행 17:32) 저희가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혹은 기롱도 하고 혹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행 17:33) 이에 바울이 저희 가운데서 떠나매
사도바울은 세상의 지혜, 즉 철학이나 인문적 사고를 통한 변론이 복음의 전함에 능력이 되지 못함을 깨닫고 스스로 고백했다. 실제로 그는 아덴에서 그가 지니고 있는 세상적 학문의 능력을 이용하여 복음을 전하려고 애를 써서 변론했다. 그곳 아덴에는 헬라철학에 능통한 자들이 많았고 바울은 그들과 변론함으로써 그들을 설득시켜 복음에 귀의토록 하고자 했다.
(행 22:1) 부형들아 내가 지금 너희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하더라
(행 22:2) 저희가 그 히브리 방언으로 말함을 듣고 더욱 종용한지라 이어 가로되
(행 22:3)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
그러나 그 시도는 결국 허사가 되었고 바울은 그곳에서 교회를 설립하는 일에도 실패했다. 이방선교의 결과는 교회설립으로 드러나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다. 그 실패를 그는 뼈저리게 느끼고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그 일에 인간의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 즉 세상적인 철학의 그 현란한 말솜씨가 아니라 단순한 진리, 다시 말해 예수의 그리스도이심과 그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것에 대한 사실을 알리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하나님을 신앙하는 일은 세상적인 지혜나 지식을 초월한다. 우리 역시 신학적 논쟁에 매달리기보다는 바울처럼 그렇게 복음을 전하여야 한다. 세상적인 지혜인 철학과 같은 도구로는 결코 구원을 성취해낼 수 없다.
하나님은 세상의 미련한 자를 택하셔서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신다. 바울은 이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우리는 예수 외에 자랑할 것이 없다.
바울의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는 이 말씀을 꼭 기억하자.
(고전 2: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고전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전 2: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고전 2: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고전 2: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