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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바울의 신앙적 모범

영동장로교회 2021. 12. 19. 10:00

2021. 12. 19.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사도바울의 신앙적 모범”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예수를 믿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그러면 왜 예수를 믿는 것인가?

 

신앙생활 중에 우리는 방언을 하는 것과 이적이 행해지는 것을 경험하기도 하고 각기 받은 은사대로 그 일을 행하는 것을 경험하기도 한다. 이런 일들이 다 귀하기는 하지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단지 그런 것들을 행하려고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롬 12: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롬 12:7)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롬 12:8)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음으로 할 것이니라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써 이러한 것들을 누리려고 하는 것을 우리의 신앙생활의 목표로 삼는 것도 또한 아니다. 예수를 믿음으로써 우리가 구원에 이르고자하는 것이 사실이나 그것을 우리의 신앙생활의 진정한 목표로 삼아서는 안된다.

(행 16:30) 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행 16:31)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롬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롬 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구원을 목표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나의 구원을 이루는 그 일을 내가 이루려고 하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음이 된다. 이는 결국 나의 구원을 내가 이루려고 하는 것을 결과한다. 이를 결코 바른 신앙이라 할 수 없다. 구원은 예수를 믿는 자에게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이다. 선물에 욕심을 낸다는 것은 그 선물을 받을 자가 그 선물을 줄 자에게 가질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다.

(엡 2: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엡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신앙의 목적보다는 신앙의 태도를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가 보다 더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예수를 믿는 자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바른 믿음의 태도를 가져야 할까?

 

우리는 예수가 나의 구주되심을 믿음으로 받았다. 내가 구원을 얻든지 아니 얻든지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몫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구원이 이루어질지에 대해서는 상관할 것이 없고 오직 믿는 자로서 감당해야할 그 몫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그것을 행하는 일에 전심해야 한다.

(엡 3: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벧후 1:11)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믿는 자로서 자신의 행할 바가 무엇인지를 안다는 것은 곧 구주이신 그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인의 그 뜻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종이 행하는 그 일은 주인을 감동시키지 못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주인 되신 주님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주님의 참된 일군이 되지 못할 것이다.

 

예수가 진정한 우리의 주인 되심은 죄로 인해 죽은 우리를 그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피로 우리의 죄값을 대신 지불하셨기에 우리의 소유권이 그 예수에게로 이전되었음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는 우리의 참 주인이 바로 예수이신 것이다.

 

예수의 이 땅에서의 삶은 믿음의 백성들의 삶에 대한 표본이 되셨다. 우리는 그의 삶을 통해 그가 우리에게 원하는 진정한 삶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세련되고 부유한 예루살렘, 그곳을 택하여 나시지 아니하시고 가난하고 천한 땅 베들레헴에 태어나셨다. 그러나 그는 온 우주의 참된 왕이시다.

(엡 1:20)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 편에 앉히사

(엡 1:21)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엡 1:22)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만물을 그 발아래에 둔다함은 그가 온 우주의 진정한 왕이시란 것이다. 예수 자신도 빌라도에게 자신의 왕 되심을 증거했다.

(요 18: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요 18:37)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

 

그런 왕이심에도 그는 우리에게 오실 때 낮고 천한 자리에 임하셨다. 왜 그랬을까?

 

낮은 자리는 겸손함을 상징한다. 우리로 하여금 그와 같이 겸손한 자리에 서라하심이다. 왜 우리는 겸손한 자리에 서야 할까?

 

겸손히 행하는 그 일은 그 상대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겸손을 취한다는 것은 곧 상대를 향한 사랑의 마음을 품음이다. 예수의 죄인된 우리를 사랑하심이 그의 그 낮은 자리에 임하심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그 같은 마음을 품으라 가르치신 것이다. 그가 산상수훈을 우리에게 주신 것도 그러했다. 우리를 사랑하셨으므로 우리를 살리시기를 간절히 원하신 그 마음으로 하신 것이다. 우리가 사는 것, 즉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는 우리가 그러한 자리에 서야한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이다. 그의 가르침은 이러했다.

(마 5: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마 5:2)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마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 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 5: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심령이 가난할 수 있는 자는 자신이 구원받을 길이 없었던 죄인이었던 사실을 깊이 깨닫고 예수의 은혜로 구원의 길에 들어선 은혜를 입은 자라야 한다. 이 사실을 이해할 때 비로소 품을 수 있는 마음이 가난한 마음이다. 이 마음은 빚진 마음이다. 이 마음이란 구원이 필요한 자들을 향해 쏟아내어져야 할 그 사랑밖에 없는 마음이다. 이 마음이 가난한 마음이다. 이런 마음을 가진 믿음의 백성들은 그 이웃을 위해 어떻게 하여야할까를 고민하게 된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이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이런 실천을 요구하고 계시는 것이다.

 

애통하는 자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애통해하는 그 상대에 대한 진실한 사랑을 그 마음에 지녔기에 그는 애통해하는 것이다. 애통은 슬프고 가슴 아픔이니 무엇이 애통한 일일까? 주님의 그 뜻을 깨닫지 못하고 죄중에 헤매는 것을 보고 있음이 애통한 것이다. 그러한 마음이 생겨나는 것은 바로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이다.

 

주님이 말씀하신 이 팔복은 모두 한 방향을 향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랑하는 마음이다. 주님은 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의 모든 사역을 감당하셨다. 굳이 사마리아 마을을 지나 가셨던 것도 구원하시려는 그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그녀를 만나주시려고 택하신 길이었다.

 

하나님의 그 사랑을 배워 그 땅에 그 사랑을 실천해야할 선민 유대인들은 그 사랑에 대해 무지했다. 그래서 그들에게 가장 가까운 이웃이었던 사마리아인을 상종치 않았다. 예수께서 굳이 그 마을을 지나가시면서 그들을 만나주신 것은 그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그 사랑을 깨닫게 해주시려함이었을지도 모른다.

(요 4:3)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요 4:4)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요 4: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요 4: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육시쯤 되었더라

(요 4:7)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요 4:8)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요 4:9)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또 한 번은 예수께서 한 문둥병자를 구원하신 일이 있었다. 이미 주께서 그를 선택하시고 구원하시기로 정한 자였다. 열 명의 문둥병자가 나음을 입었지만 그 중에서 오직 한 사람, 그만이 구원에까지 이를 수 있었다. 이 일이 이루어진 것은 예수께서 그를 진실로 사랑하심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를 사랑하시매 그를 구원하시기 위해 굳이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나는 그 길을 택하셨던 것이다.

(눅 17: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눅 17:12)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눅 17:13)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궁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눅 17:14)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눅 17:15)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눅 17:16)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눅 17: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눅 17: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눅 17: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예수의 사역은 모두가 그러했다. 메시야로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죄인된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구속의 은혜를 베푸시려 하심이었다. 예수를 통해 은혜를 입은 자들은 마땅히 그 은혜에 보답하여야 한다. 그 일은 주님과 같은 그 사랑하는 마음을 품고 그 사랑을 삶 속에서 그대로 행하는 것이어야 한다.

 

주님을 만나 이 진리를 깨달은 바울의 그 삶은 주님을 만나기 이전의 삶과는 전혀 반대되는 그 삶이었다. 이전에는 교만하고 정죄하여 핍박하는 자였던 그가 회심한 후에는 겸손하고 순종하며 진실로 주님의 백성들을 사랑하는 자의 자리에 섰다. 그의 문서들에서는 그의 그 사랑이 너무나도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의 그 사랑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그 극치를 보이고 있다.

(고전 13: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고전 13: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고전 13: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고전 13: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 13:8)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주님의 그 사랑에 대한 완전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바울이 아직 신앙이 어린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그 신앙적 태도를 잘 드러내어 보이고 있다. 그는 주님의 사도로서 자신이 복음을 전한 그 값으로 넉넉히 대우를 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그런 요구를 하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그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들에게 조금도 불편을 끼치려고 하지 않는 것은 사랑의 대 사도로서의 신앙적 태도를 보인 것이었다.

(살전 2:9)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과 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노라

 

만약 우리라면 그리했을까? 내가 어떻게 너희를 위해 그렇게 애를 썼는데 나를 향한 너희들의 대우가 이러하냐하면서 그들을 원항하거나 심지어는 나무라기까지 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러했다면 우리는 진실로 주님의 그 사랑을 깨닫지 못한 불행한 자가 되었을 것이다.

 

바울은 그들에게 조금도 누를 끼치지 않으려고 복음을 전하여 가르치는 그 때에도 스스로 그물을 깁는 그 일을 하여가면서 자신들에게 필요한 경비를 만들었다. 이 시대에 바울의 그 믿음의 행위들은 참된 신앙의 귀감이 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그 사랑은 그의 애씀에서 절절히 드러나고 있다. 그들의 신앙적 양육자 됨을 그는 ‘유모’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드러내고 있다. 복음을 전하여주고 가르쳤으니 선생이라 표현할 수 있을 터인데 젖을 먹여 키운 어머니같은 존재라고 자신을 표현했다. 더구나 그들을 위해 목숨까지도 아까운 것으로 여기지 아니했으니 얼마나 큰 사랑으로 그들을 품었을까!

모름지기 목회자라면 그 성도들을 바울처럼 이 같은 사랑으로 품어야 하지 않을까?

(살전 2:7) 오직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살전 2:8)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

 

바울의 이 같은 행동들은 예수를 믿는 자들이 보여야 하는 신앙적 행위들의 모범이라 할 것이다. 우리가 주님처럼 그 위대한 사랑을 따라 할 수는 없다 할지라도 바울의 이 사랑의 마음이 담긴 신앙적 행위들은 따라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