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예수의 속죄(1)
2021. 9. 5.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그리스도 예수의 속죄(1)”
하나님은 왜 우리를 만드실 때에 천사들과는 달리 부모를 통해 태어나게 하는 그 방식을 택하셨을까?
천사들은 우리와는 다르게 개별적 존재로 만드셨다. 다시 말해 우리와 같이 부모를 통해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천사 하나 하나를 개별적 존재로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천사들에게는 우리와 같은 부모가 존재하지 않는다. 천사들도 우리와 같은 이성적 존재이이지만 천사들은 개별적 존재요 우리는 종적 존재라는 확연한 존재적 차이를 가진다.
그러면 하나님이 왜 천사들은 개별적 존재로 창조하시고 우리는 그와는 다르게 부모를 통해 태어나게 하는 종적 존재로 만드셨을까?
천사들은 단지 하나님의 부림을 받는 존재, 즉 하나님의 종들이다.
(삼하 24:17) 다윗이 백성을 치는 천사를 보고 곧 여호와께 아뢰어 이르되 나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거니와 이 양 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하건대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을 치소서 하니라
(대상 21:27) 여호와께서 천사를 명령하시매 그가 칼을 칼집에 꽂았더라
(대하 32:21) 여호와께서 한 천사를 보내어 앗수르 왕의 진영에서 모든 큰 용사와 대장과 지휘관들을 멸하신지라 앗수르 왕이 낯이 뜨거워 그의 고국으로 돌아갔더니 그의 신의 전에 들어갔을 때에 그의 몸에서 난 자들이 거기서 칼로 죽였더라
(단 6:22)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의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하지 못하였사오니 이는 나의 무죄함이 그 앞에 명백함이오며 또 왕이여 나는 왕에게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니라
그러나 우리는 천사들과는 다르게 하나님의 자녀이다. 신분상의 이 엄청난 차이를 두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었을까?
(요 1: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요 1: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요 1: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롬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롬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롬 8: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하나님은 전능자이시니 모든 것을 선하게 자신의 뜻대로 행하실 수 있으신 존재이시다. 따라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선택하신 것도 자신의 기쁘신 뜻대로 하셨다고 성경은 밝히고 있다. 성경이 그렇게 기록하고 있음은 하나님이 진실로 그러하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이 자신이 뜻을 성경기자에게 영감을 주시어 기록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엡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엡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우리를 창조하시기 전에 우리를 천사와는 다르게 개별적 존재로 창조하시지 않으시고 종적 존재로 창조하신 것은 우리로 사랑 안에서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 없는 자로 세우시려 하셨음이었고 그렇게 되어지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셨다고 한다. 여기에 우리의 삶이 존재하는 이유가 드러나 있다.
인생의 사는 목적이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 없는 자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사도 바울도 가르치고 있다.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 10:32)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고전 10:33)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그러면 이러한 삶을 살도록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굳이 종적 존재로 창조하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천사들처럼 개별적 존재로 우리를 만들어도 되지 않았을까?
우리를 부모 되게 하고 자녀를 낳게 하신 것은 도대체 왜였을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흠 없고 거룩한 자되게 하신 그 전제는 바로 사랑 안에서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받들기만 하면 되는 존재들이다. 심부름꾼이기에 하나님의 그 깊으신 심정이 무엇인지를 깊이 헤아릴 필요가 없는 자들이다. 그러나 자녀들은 심부름꾼들과는 다르다. 부모의 그 깊은 심정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부모의 그 깊은 심정에는 늘 사랑이 자리하고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심정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셨을 것이다. 그러했으므로 우리를 개별적 존재로 창조하지 않으시고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가지게 하신 것이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의 그 원형은 바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이다. 우리를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에 놓이게 하신 것은 바로 하나님이 그 심정을 우리가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였다.
예수께서도 가르침을 주실 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눅 11:11)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눅 11:12)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부모는 그 자식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줄 준비가 항상 되어 있다. 그것이 그 부모 심중에 자리한 사랑이다. 이 사랑의 원천이 바로 하나님에게 있는 그 사랑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우리가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하시려고 우리로 하여금 부모의 자리게 설 수 있게 하신 것이다. 부모로서 그 자식을 사랑하는 그 이상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자녀 된 자는 마땅히 그 부모의 사랑을 깨달아 그 자신도 그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통상 이를 가리켜 효라고 한다. 자녀들이 그 부모에게 효도를 하는 것은 그 부모를 사랑함이다. 세상에서 이 효를 으뜸 되는 덕목으로 꼽는다. 세상이 그처럼 귀하게 여기는 부모에 대한 그 사랑의 원천이 하나님에게 존재한다는 것은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의 백성이라면 이 이치를 바르게 깨달아야 한다. 자녀된 자가 그 부모를 사랑하여 효를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하듯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그 사랑을 깊이 깨달아 하나님을 향한 그 사랑이 진실로 우리 자신들의 삶 속에 채워져야만 한다. 그 삶의 모습은 하나님 앞에 흠 없고 거룩한 자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에덴동산에서의 하나님은 아담에게서 이런 사랑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셨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한량없는 사랑을 베푸셨다. 아담은 하나님의 그 사랑을 깨달아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드러내는 그 삶을 살았어야만 했다. 그 하나님이 명하신 그 모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야말로 하나님을 향한 아담의 사랑을 드러내는 삶이 될 수 있었다. 그는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흠 없고 거룩한 자로서의 모습을 보였어야만했다.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모습인 것이다.
그러나 아담은 이 사랑의 이치를 깨닫지 못했다. 하나님과 아담 사이의 그 사랑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짝사랑으로 끝이 나고 말았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어버린 그 순간이 바로 아담이 하나님의 그 사랑을 내 팽겨버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아담에게서 욕망이 그의 내면에 자리 잡은 그 순간에 하나님을 향해 자라야만했던 그 사랑의 싹이 잘라져버리고 만 것이다.
사랑은 상대가 바라는 것을 주는 것이다. 상대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내 기분에 따라 내가 원하는 바를 주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항상 상대를 바라보고 상대를 생각해주어야 한다. 그러나 아담은 선악과를 먹는 그 순간 하나님에 대한 배려의 그 마음을 내어버렸다. 오직 자신의 유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존재로 변해있었다. 그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그 사랑이 전혀 자리잡고 있지 못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를 싫어하여 하나님을 그 마음에서 내어버린 자가 된 아담, 그래서 아담은 죽을 수밖에 없게 된 죄인이 되고 말았다.
(롬 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롬 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롬 1: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롬 1: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롬 1: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롬 1:25)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롬 1:26)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롬 1:27)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롬 1:28)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롬 1: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 하는 자요
(롬 1: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롬 1: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롬 1:32)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그러나 그의 후손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죄인 된 우리를 살리시려고 자신의 단 하나뿐인 아들인 그 독생자까지도 서슴없이 내어주셨을까!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을 내어주신 것은 바로 우리의 죄를 속해주시려고 하신 위대한 사랑의 행위이셨다.
죄를 속하는 일, 즉 속죄에 대한 필요성은 왜 생겨난 것인가?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기로 창세전에 정하신다. 왜 하나님은 굳이 사람을 창조하셨을까?
하나님은 살아계신 존재이시다. 성경은 자주 이 사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마 26:63) 예수께서 침묵하시거늘 대제사장이 이르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요 6: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행 14:15)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고후 3: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고후 6: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딤전 3:15)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
(딤전 4:10)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힘쓰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히 3:12)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히 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히 10:31)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히 12:22)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계 7:2)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받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계 10:6) 세세토록 살아 계신 이 곧 하늘과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이며 땅과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이며 바다와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을 창조하신 이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되 지체하지 아니하리니
(계 15:7) 네 생물 중의 하나가 영원토록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 대접 일곱을 그 일곱 천사들에게 주니
하나님은 살아계신 존재이시므로 그 하나님다우신 성품을 갖고 계신다. 이를 하나님의 속성이라 한다. 하나님의 여러 가지 속성 중에서 특히 도덕적 속성은 이 사랑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공의의 원천이시며 지극히 성스러우시며 선하신 이 속성에서 우리는 그의 사랑을 발견한다. 그는 사랑의 원천으로서의 그 속성을 지니시므로 그 사랑은 드러날 수밖에 없으시다. 그래서 그는 사랑의 대상으로서의 우리를 창조하시기로 그 기쁘신 뜻대로 정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은 하나님을 배반할 자였다. 전지하신 하나님이 그 사실을 모르셨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 즉 우리를 창조하신 것은 그가 사랑의 원천이 되시는 그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었다. 무한하신 그 사랑이 자신을 배반할 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지으신 그 완전한 사랑! 그 사랑을 조금이라도 알게 하시려고 우리도 그 자리에 세우셨다. 부모되게 하신 것이다.
자신을 배반하고 원수의 자리에 선 그 아들 압살롬을 향한 다윗의 그 사랑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그 지극한 사랑에 대한 예표였다.
(엡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다윗의 아들 암논이 그의 또 다른 아들 압살롬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삼년이 지난 그 때 다윗은 그 압살롬을 향해 간절한 마음을 드러낸다. 자신의 아들을 죽인 또 다른 그 아들은 어쩌면 도무지 용서하지 못할 그런 자가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들을 향한 사랑을 드러낸 자가 다윗이니 이는 원수된 우리를 향해 사랑한다고 말씀하시는 그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
압살롬의 배반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삼하 13:38) 압살롬이 도망하여 그술로 가서 거기에 산 지 삼 년이라
(삼하 13:39) 다윗 왕의 마음이 압살롬을 향하여 간절하니 암논은 이미 죽었으므로 왕이 위로를 받았음이더라
아버지 다윗을 배반하여 반역을 일으키고 아버지의 후궁들과 백주에 강간하는 일을 벌인다.
(삼하 16:22) 이에 사람들이 압살롬을 위하여 옥상에 장막을 치니 압살롬이 온 이스라엘 무리의 눈앞에서 그 아버지의 후궁들과 더불어 동침하니라
족장 시대에 야곱의 장자 르우벤이 그랬다. 그는 그 아비의 첩 빌하와 간통했다.
(창 35:22) 이스라엘이 그 땅에 거주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훗날 야곱이 그의 임종이 다가왔을 때 자식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는 자리에서 그의 장자 르우벤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창 49:1) 야곱이 그 아들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모이라 너희가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
(창 49:2) 너희는 모여 들으라 야곱의 아들들아 너희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들을지어다
(창 49:3)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내 능력이요 내 기력의 시작이라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마는
(창 49:4)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하지 못하리니 네가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
야곱은 르우벤이 자신의 후처와 통간한 것에 대해 책임을 물은 것이다. 하나님의 법도에서는 이러한 일을 행하지 않아야 산다고 했다. 그러하기에 르우벤은 스스로 죽을 짓을 행한 셈이다. 마찬가지로 압살롬도 마땅히 죽음에 해당하는 죄를 저지른 것이다.
(레 18:5)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레 18:6) 각 사람은 자기의 살붙이를 가까이 하여 그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레 18:7) 네 어머니의 하체는 곧 네 아버지의 하체이니 너는 범하지 말라 그는 네 어머니인즉 너는 그의 하체를 범하지 말지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비 다윗은 압살롬이 자신의 심복 요압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렇게 외쳐 부르며 통곡을 했다. 자신을 철저히 배반하고 모반을 일으킨 그 아들이었지만 끝까지 붙들고 사랑한 것은 하나님의 그 심정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었다. 압살롬보다 더한 우리를 하나님은 처음부터 그렇게 사랑하신 것이다.
(삼하 18:32) 왕이 구스 사람에게 묻되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 구스 사람이 대답하되 내 주 왕의 원수와 일어나서 왕을 대적하는 자들은 다 그 청년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니
(삼하 18:33)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 위층으로 올라가서 우니라 그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이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세상’이란 곧 믿음의 백성들인 우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요 3: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요 3: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만약 다윗이 압살롬이 자신을 배반하고 반역을 일으켜 자신을 죽이려고 할 것을 알았다면 그 압살롬을 낳았을까?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배반할 것을 아셨음에도 우리를 창조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지독한 사랑이셨다. 그 사실을 아셨으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개별적 존재로 지으시지 않으시고 부모를 통해서 태어나는 종적 존재로 만드셨다. 그리고 창세전에 이미 우리를 위한 위대한 구속을 준비하셨다.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셨으면 이렇게까지 하면서 우리를 이 땅에 존재하게 하셨을까?
하나님이 지으신 첫 사람 아담이 지음을 입었을 때 하나님은 그를 위해 모든 것을 예비하셨다. 마치 산모가 태어날 아기를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하듯이. 그렇게 에덴동산은 아담이 살아가기에 부족한 것이 전혀 없는 그런 곳이었다. 아무 것도 더 바랄 것이 없는 그 곳. 그러하기에 그는 당연히 더 욕심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욕심을 내는 것은 곧 죽음에 이르는 길이었다.
(약 1: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약 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아담은 그런 욕심을 가지지 말았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그 욕심을 갖게 되었다. 죽음에 이르는 그 지독한 욕심을 가지는 것은 영원히 살아가면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삶을 삶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 일을 감당하는 것과는 정 반대되는 삶이니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못하는 일이 되고 만다.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배반이며 하나님 앞에 가장 큰 죄이다. 아담은 하나님을 사랑해야할 그 책무를 버린 자로서 죄인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이것이 죄를 잉태시켰다. 벌써부터 하나님은 이렇게 되지 않게 하시려고 그에게 다짐을 두셨다. 이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이 말의 이면에 담긴 뜻은 “내가 너를 진실로 깊이 사랑하니 너는 나와 영원히 함께 하여 내 사랑이 네게 항상 함께 하기를 원하노라. 그러하니 너는 스스로 마음에 욕심을 품지 말지어다. 네가 욕심을 품으면 정녕 너에게서 나와의 관계는 끊어질 것이니 이는 내 사랑이 네게 이르지 못할 것이라. 내가 이것을 심히 염려하노니 너는 내 말을 명심하고 내 사랑이 네게서 끊어지지 않게 할지라”였다.
(창 2: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에덴동산에서의 삶은 하나님의 사랑이 늘 충만하게 공급되는 그런 삶이었다. 에덴동산은 하나님이 아담을 지극히 사랑하시고 이에 아담은 스스로 자원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런 사랑을 하나님께 드리는 그런 곳이어야 했다. 적어도 하나님은 그런 에덴동산이 되기를 바라는 그 마음으로 그것을 만드셨다.
그러나 아담은 그런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내지 못하고 도리어 자신의 내면에 하나님이 금하신 그 욕망을 잉태시켰다. 끝내는 그 욕망이 그의 마음속으로부터 뱀처럼 슬며시 솟아나왔다. 드디어 그에게 죄가 임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 도덕적 속성상 죄와는 도무지 함께 하실 수 없으시다. 그는 지극히 선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악과는 결코 동거하실 수 없다.
스스로 죽음에 이르는 병을 자초한 아담이었다.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존재가 되어버린 그 아담을 하나님은 그대로 버려두고 바라만 보고 계실 수는 없었다. 비록 죄를 범한 아담일지라도 그를 향한 하나님의 그 사랑에는 결코 변함이 있을 수 없었다. 그 사랑은 여전하였다. 하나님을 배반할 것을 미리 아시고도 그를 창조하신 것은 그를 그토록 사랑하셨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죽음을 향해가는 그를 살리실 길을 이미 예비해 두셨다. 그는 전지하시고 전능하신 자였기에 아담이 그런 자리에 설 것을 이미 아셨고 그 방책을 마련해 두신 것이다.
이 땅의 모든 아비들도 그 아들이 어떻게 할 것이라는 그 정도는 예측하고 그 대비책을 마련해둔다. 비록 그것이 완벽하지는 않을지라도 어느 정도는 효과를 거둔다. 그 아비는 전능하지도 전지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래서 완전하지는 못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전지하시고 전능하시기에 그 방책은 완전하다.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의 그 부끄러움을 가려주기 위해 하나님은 친히 짐승의 가죽으로 그들을 위해 옷을 해 입히셨다. 이는 우리의 죄를 가려주시려고 십자가 위에서 스스로 죽임을 당하실 자신의 독생자, 그 예수의 죽음에 대한 예표였다.
(창 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무엇이든지 자신의 뜻대로 행하실 수 있는 절대자이시다. 그러므로 인간의 그 범죄에 대해서도 그냥 임의대로 묵과하시면 될 터인데 굳이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필요로 하신 것은 무슨 이유일까?
하나님은 그 속성상 의로우시므로 반드시 공의를 행하셔야만 한다. 비록 그가 절대자이실지라도 그가 하실 수 없는 일도 존재한다. 예를 들면 그가 악을 행하여 죄를 범한다거나 어떤 존재를 미워하시는 등의 일들은 행하실 수 없으시다. 이런 일들은 그의 속성에 위배되는 일들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죄를 지은 것에 대해 눈감으시는 일도 그에게는 결코 가능한 일이 될 수 없다. 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 책임을 물으셔야만 한다. 그래서 그런 하나님을 공의의 하나님이라고 칭한다. 우리에게 율례를 가르쳐 주신 그 하나님이 아니시던가? 따라서 인간의 그 죄에 대해서도 반드시 그 죄 값을 요구하셔야만 한다.
모세를 통해 주신 제사의 규례에서 죄인이 자신의 그 죄를 짐승에게 안수하여 전가시키고 그 짐승의 피로 죄값을 치르게 하신 하나님이 아니시던가?
이는 진실로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나타낸 일이다. 마땅히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자신이 그 죄값을 치러야함에도 불구하고 짐승의 그 피로 그 죄값을 대신 치르도록 하신 것은 그 죄를 지은 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의 발로였던 것이다.
이렇게 죄인이 그 죄를 대신 속하도록 하는 그 길을 열어주신 것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었다고 한다. 그 기쁘신 뜻이 생겨나게 된 원천은 바로 하나님의 그 사랑이었다. 대상적 속죄로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이 기쁘신 뜻은 그의 사랑과 공의에 기초하였던 것이다.
우리를 위해 대신 십자가 위에서 죽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속죄의 죽음은 예수의 그 사랑이 동기가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사랑의 배면에는 하나님의 그 기쁘신 뜻이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은 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나타내어 준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이 속죄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이셨다. 속죄는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그 근원이 있으니 그 중 어느 한 위에게서 그 고동적 원인이 독점적으로 발견될 바는 아니다.
(요일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죄인된 우리들에게 살길을 열어주신 것은 하나님의 이 사랑이었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사랑은 차별없는 사랑이 아니라 구원얻을 자들을 선택하여 예정한 사랑이었다. 믿는 우리들을 선택하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기쁘신 그 뜻 대로였다.
(엡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엡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