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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승귀 두 번째 계단 - 승천

by 영동장로교회 2021. 7. 25.

2021. 7. 25.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예수의 승귀 두 번째 계단 – 승천”

 

성자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성육신하심으로 그의 비하는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낮아지심인 ‘비하’는 그의 장사되심으로 종결을 지었다.

 

예수, 그는 영이신 고로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성자하나님이 사람의 눈에 보이심으로 그들과 교통할 수 있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으신 존재이셨다. 그 교통하심의 목적은 죄인인 그들을 진실로 살리시기 위함이셨고 그래서 인간의 육신을 입으신 성자하나님은 스스로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는 그 교통함이었다.

(벧전 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그리고 예수의 승귀의 첫 계단인 그의 다시 사심, 즉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살 소망을 심어주셨다.

 

예수가 단지 부활하기만 하셨다면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의 산 소망이 되실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부활은 단지 우리의 다시 살 것에 대한 보증일 것뿐이니, 그래서 우리가 다시 부활하여 이 땅에서 산다면 그 삶은 아담의 그 죄로 인해 저주받은 이 땅에서 삶의 연속일 것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그 일은 저주받은 삶과 다름이 없다.

 

그런데 예수는 부활하셨고 그리고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늘로 오르셨다. 예수의 승귀의 두 번째 계단인 ‘승천’이라고 한다.

(눅 24:50) 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눅 24:51)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

(눅 24:52) 그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눅 24:53)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행 1:9)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행 1:10)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행 1:11)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승천하셨다 함은 그가 성부하나님께로 돌아가심이다.

(막 14:6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행 7: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행 7: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롬 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골 3: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히 1: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이 예수의 승천에 관해서는 예수 자신도 이미 언급하였다.

(요 6:61)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이르시되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요 6:62) 그러면 너희는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요 14: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요 14: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요 16:5)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가 없고

 

(요 16: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요 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요 16:9)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요 16: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요 16: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요 20: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요 20: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예수께서 승천하셨다 함은 그가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가셨다 함이다. 하나님과 함께하던 그곳이란 그 옛날 아담이 가장 큰 복된 삶을 누렸던 바로 하나님과 함께 하던 그런 곳을 의미한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복된 삶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일이다. 그런 고로 예수께서 성부하나님과 함께 계시는 그곳이 바로 우리의 이상적인 거처가 되는 곳이다. 이를 우리는 통상적으로 ‘천국’이라 칭한다.

(요 14: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고후 5: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만약에 예수께서 성부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가시지 않으셨다면 이는 우리를 절망 가운데로 인도하는 일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희망을 버리지 않고 우리의 삶을 이어가는 것은 바로 그곳이 존재하며 언젠가는 예수가 그곳으로 가신 것처럼 우리도 그곳으로 갈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사도바울이 그런 일에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이미 셋째 하늘로 칭한 천국을 보았고 그래서 예수와 함께 거할 그곳을 사모하여 달려가기를 원하였지만 부득불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 있으므로 잠시 천국 가는 것을 미룬다고 했다.

(고후 12:1)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고후 12: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고후 12:3)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고후 12:4)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고후 12:5)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고후 12:6)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두노라

(고후 12: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12:8)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고후 12: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고후 12: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예수의 승천은 그의 인성에서의 또 한 층의 변화를 포함하고 있었다. 그가 우리와 같은 인성 그대로로 승천했다면 과연 온전하게 그 승천이 이루어졌을까?

 

사람은 호흡을 통해 생명을 유지한다. 높은 산에 오르면 호흡하기가 힘들어진다. 산소의 공급이 원활하지 못한 고산에서는 생명 유지가 힘들다. 예수는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리워져 갔다고 기록되어있다. 이는 예수의 신체가 우리와는 다른, 변형된 몸을 지녔다는 증거가 된다. 그는 일찍이 변화산에서 그 신체가 변형되는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이셨다.

(마 17: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마 17:2)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예수의 이 변형된 신체는 우리가 죄의 사슬에서 풀려나게 되는 그날 입게 될 성화된 우리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심이었다. 그날에는 우리가 시간과 공간의 제약에서 풀려날 것이고 예수처럼 그렇게 구름 속으로 끌려올라 이동을 하게 될 것이다. 이를 ‘휴거’라고 표현한다.

(살전 4:17)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천국, 즉 하나님이 계신 그곳을 우주의 어느 한 부분으로 상상하지는 말 것이다. 우주의 어느 한 부분이란 우리가 존재하는 이 지구와 같은 공간의 한 연장선 위에 있을 뿐인고로 그곳 역시 아담의 죄로 인해 오염된 공간일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공간은 천국이 될 수 없다.

 

천국은 전혀 다른 차원의 어떤 곳일지 모른다. 유한한 우리의 지각으로는 전혀 이해될 수 없는 곳이기에 성경은 더 이상 천국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를 생략하고 있다. 천국이란 표현도 하나님이 계시는 그곳을 유한한 지각을 가진 우리가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로의 표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찌 되었던지 간에 천국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그곳이다. 예수는 그 성부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가셨다.

 

예수의 승천은 성부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이신 예수의 중보적 사역을 충족하다고 인정하시고 그 때문에 그를 하늘 영광중에 맞아들이셨다는 선언의 행위이셨다. 예수의 구속사역에 대한 하나님의 인치심은 그의 부활에서 시행되었고 승천을 통해 강화된 것이다.

 

예수께서 승천하셨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 그는 그의 왕국의 하늘 수도로 돌아가셔서 그의 왕권의 행사에 착수하신 일이었다. 이로써 그는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드러내어 보이셨고 또한 자기의 왕국관을 실제로 증명해 보이셨다.

 

이 사실은 중보의 왕국이 유대인만의 왕국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보편적 왕국이라는 것을 드러내어 보이신 것이다. 이는 이방인이었던 우리에게 무한한 은혜를 베푸심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하심이었고, 또한 스스로 자고(自高)했던 유대인들의 교만을 꺾으신 일이었다.

 

이러한 일을 통해 우리에게 교훈하시는 것은 스스로 자고하지 말라는 것이다. 먼저 믿음을 가졌다고 자랑하지 말고 스스로 겸손의 띠를 매고 사는 삶을 살라하심이다.

(요 18: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마 19: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벧전 5: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예수는 승천하심으로써 그의 대제사장직을 수행하실 수 있었다.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희생의 제물로 드리시고 이제는 천국에서 성부하나님 앞에 나아가 우리의 죄를 사하여주실 것을 간구하는 그 일, 대제사장으로서의 그 일을 행하실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분명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 앞에 서실 절대적 필요를 가지셨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승천은 필연적이었다. 그는 단번에 영원한 성소에 들어가셨다. 오직 우리를 위해서!

 

예수는 참되고 영원한 성소 그곳에서 우리를 위하여 끊임없이 간구하시니 그의 제사장직의 근본적, 영구적 부분은 하늘에서 수행됨이다.

(히 9:11)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히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이러한 예수의 승천은 우리가 장래에 있게 될 그 영원한 복의 예조요, 예증이었다. 곧 우리의 부활과 승천을 예표하는 일이셨다.

(엡 2: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요 17: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이 일은 우리의 원시적 영장권, 즉 에덴동산에서 영원히 죽지 않을 우리의 영적 권리를 회복시켜주실 것에 대한 예증이었다.

(히 2:7) 그를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며

(히 2:8) 만물을 그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은즉 복종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하겠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히 2:9)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그의 승천은 곧 그의 행하시는 그 사역의 완성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었다.

 

예수의 승천에 관한 이 모든 것은 오직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주시는 은혜의 선물인 것이다.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주님의 이 은혜에 우리가 어찌 감사하지 않으리요!

 

오늘도 우리는 주님의 이 은혜에 빚지는 삶을 살고 있다.

이 땅을 사는 날 동안 우리가 양심있는 신앙인이라면 최소한 이 빚을 갚기 위해 몸부림쳐야 하지 않을까?